30㎝ 포디움이란 육중한 벽…현실 속 ‘차세음’들의 분투
새로 온 지휘자가 여성이었다. 단원들은 영화 ‘미션 임파서블’ 주제곡을 연주한다.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시위에, 여성 지휘자는 “싸우고 싶으면 음악으로 하라”고 응수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전세계에 여성 지휘자가 5%밖에 안 되는데, 차세음은 남녀 통틀어 톱 5에 들잖아”라고. 드라마 ‘마에스트라’(tvN)에서 차세음(이영애) 지휘자는 무대가 뭐냐는 질문에, “전쟁터”라고 답한다.
클래식 전문 사이트 ‘바흐트랙’은 2020년 ‘세계 톱 100’ 지휘자 중에 여성이 8명이라고 전했다. 2013년 같은 조사에서 미국 지휘자 마린 올솝(68)이 ‘톱 100’에 든 유일한 여성 지휘자였다. 2016년 미국 오케스트라연맹 보고서는 800개 회원 오케스트라 가운데 여성 상임지휘자 비중이 9.2%라고 집계했다. 성별 데이터 수집을 시작한 2006년엔 8.5%였다. 미국 잡지 ‘더 포디움’은 여성 지휘자 비율을 영국 6%, 프랑스 4%로 추산하면서, 독일은 이보다도 더 낮을 것으로 추정했다.
서양 음악사는 여성에게 높은 장벽을 쳤고, 그중에서도 지휘봉은 유독 여성과 거리가 멀었다. 지휘자의 필수 자질로 여겨져온 권위와 리더십이 여성에겐 결여돼 있다는 편견 탓이었다.(민은기 ‘음악과 페미니즘’) 지난해 작고한 러시아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는 “지휘자란 직업의 본질은 힘이고, 여성의 본질은 약함”이라고 주장했다. 수많은 지휘자를 길러낸 핀란드 지휘 스승 요르마 파눌라(94)도 “여성 지휘자들은 여성스러운 음악을 해야 한다”며 “드뷔시라면 괜찮아도 브루크너나 스트라빈스키는 곤란하다”고 했다.
이 육중한 ‘금녀의 벽’을 깨기 위해 많은 여성 음악가가 분투했다. 여성 지휘자를 다룬 영화 ‘컨덕터’(2018), ‘타르’(2023)는 불과 30㎝ 남짓한 높이의 포디움(지휘대)에 오르기 위해 여성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를 잘 보여준다. 포디움의 성별 장벽을 줄이는 데 헌신한 프랑스 지휘자 클레르 지보(79)는 2년 주기 국제 여성 지휘자 콩쿠르 ‘라 마에스트라’(La Maestra)를 창립했다. 202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첫 대회엔 50여 나라 여성 지휘자 200여명이 참석했다. 3회 행사가 오는 3월 시작된다.
지보가 이 대회를 만든 사연이 있다. 2018년 멕시코에서 열린 지휘 콩쿠르의 유일한 여성 심사위원이던 그는 성차별적 심사에 충격을 받는다. 한 남성 심사위원은 “아기를 안기 위해 바깥쪽으로 향한 팔 때문에 여성들은 생물학적으로 지휘를 할 수 없다”며 여성 참가자가 나올 때마다 재킷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과 귀를 막았다. 분노한 지보는 프랑스 여성 기업인의 후원을 받아 ‘라 마에스트라’를 출범시켰다. 지보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라 마에스트라가 유망한 여성 지휘자들에게 자신감과 예측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여성 지휘자들의 활동이 늘고 있다. 지난해엔 지휘자 여자경(54)이 대전시향 예술감독으로 취임했다. 청주시향은 김경희(65) 전 숙명여대 교수를 상임지휘자로 위촉했다. 부천시립합창단 김선아(54) 상임지휘자는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을 이끌며 고음악 분야에서 독보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봉미(49), 진솔(37), 김유원(36) 지휘자도 민간 악단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마에스트라’의 이영애에게 지휘법을 가르친 진솔은 게임 음악으로도 영역을 넓혔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오페라(SFO) 음악감독인 김은선(44)은 오는 4월18~20일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다. 동양 여성 최초다. 장한나(42)는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상임지휘자, 독일 함부르크 심포니 객원 수석지휘자다. 경기필을 이끌던 지휘자 성시연(49)은 뉴질랜드 오클랜드 필하모니아 수석 객원지휘자다.
국내에서 유명 여성 지휘자의 공연을 볼 기회도 많아졌다. 지난해엔 옥사나 리니우(46)가 국립심포니를 지휘했다. 이탈리아 오페라극장 역사상 첫 여성 지휘자이자 독일 바이로이트 축제 무대를 지휘한 첫 여성이다. 빈 필하모닉 수석 바순 연주자 소피 데르보(33)도 한경 아르테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여성 지휘자들의 활약이 늘고 있다. 독일 지휘자 요아나 말비츠(38)를 빼놓을 수 없다. 2020년 모차르트 오페라 ‘코지 판 투테’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축제 100년 역사상 오페라를 지휘한 첫 여성이다. 시몬 영(63)은 빈 필하모닉을 지휘한 첫 여성이다. 그게 불과 19년 전인 2005년이었다.
‘더 포디움’은 미국에서 여성 지휘자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지휘대를 떠나게 될 고령층 남성 지휘자들이 많은데, 빈자리를 채울 부지휘자·보조지휘자 중엔 여성이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다. 현재 미국의 ‘25개 메이저 오케스트라’ 가운데 여성 지휘자는 애틀랜타 심포니 예술감독인 나탈리 슈투츠만(59)이 유일하다. 지휘자 진솔은 여성 지휘자에 대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란 직감을 믿고 지휘를 시작했다”며 “차츰 장벽이 낮아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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