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넘나든 ‘심판자’이거나 정치에 관심 끊은 ‘방관자’[중도, 그들은 누구인가]

정대연·박채연·배시은·이예슬·최혜린 기자 2024. 1. 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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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위기를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정치가 지목된다. 진영으로 나뉘어 소모적 갈등과 대립을 반복하는 정치는 한국 사회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는 이념·세대·성별에 따른 분열의 골을 더욱 깊게 하고, 토론과 소통을 가로막는다. 이대로 가다간 공동체의 근간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진보·보수에 속하지 않은 ‘중도’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이런 위기의식의 발로이다. 한국 사회에서 중도를 호명하는 빈도가 늘어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중원을 잡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선거 격언이 있듯 진보·보수가 대결하는 구도에서 중도 유권자가 선거의 승자를 결정한다는 현실적 이유에서다. 오는 4월 국회의원 총선거가 가까워질수록 각 정치세력의 중도를 향한 구애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둘째, 스스로를 중도로 생각하는 시민이 늘었다. 한국행정연구원의 사회통합실태조사(2013~2022년), 성균관대 서베이리서치센터의 한국종합사회조사(2003~2021년) 등 장기 패널 여론조사에선 중도층 증가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된 상황에서 한쪽 이념에 매몰되지 않은 중도가 균형을 잡아줌으로써 갈등과 대립을 완화시켜줄 것이란 기대가 있다.
경향신문이 2024년 신년기획으로 ‘중도 대해부’에 나선 이유이다. 중도에 대한 정치권의 구애와 사회적 관심에 비해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와 분석은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중도는 단일한 집단인가. 중도는 정치와 사회에 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가. 중도는 어떤 투표 행태를 보이는가. 과연 중도는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경향신문은 설문조사와 전문가 분석, 시민 인터뷰 등을 통해 중도가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진보·보수 못지않게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높은 집단을 중도 내부에서 발견했다. 전체 유권자 5명 가운데 1명 정도가 이처럼 적극적인 중도, 행동하는 중도로 분류됐다. 좌우 대립이 팽팽한 선거에선 이들의 선택이 결정적일 수 있다.
이들은 다른 이념 집단에 비해 개방성이 높았다. 정치에서 타협의 중요성도 높게 봤다. 중도 내부 집단의 이 같은 유연한 태도는 ‘불통’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중도층은 각종 현안에 대해 진보·보수에 비해 일관되지 않은 선호 체계를 갖고 있었다. 중도층이 선호하는 지점은 대체로 진보·보수 사이에 존재했지만 완전히 가운데가 아닌 경우도 적지 않았다. 중도가 선호하는 사안 가운데 일부가 진보 혹은 보수가 선호하는 사안과 겹치는 현상이 발견됐다. 중도가 정책 여론에서 균형을 잡거나, 반대로 균형을 무너뜨리는 추 역할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경향신문은 8회에 걸쳐 연재될 ‘중도, 그들은 누구인가’ 시리즈를 통해 중도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가 지향할 방향을 모색할 예정이다.
①한 지붕, 두 햄릿
대전 30대 “무관심이 중도?
입장 정하지 않고 선택할뿐”
서울 60대, 기사 매일 검색
“여든 야든 잘못 지적해야”

100명 가운데 21명.

경향신문이 중도층의 실체를 규명해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주목할 만한 집단의 크기이다. 중도층 전체로서는 진보·보수층에 비해 정치와 사회 현안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낮다는 전통적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중도 내부를 들여다봤더니 이질적인 집단이 포착된 것이다. 이 집단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나 참여가 낮고, 비논리적으로 투표하는 무의미한 집단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특질을 가지고 있었다.

경향신문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응답자 이념 분포는 진보 30%, 중도 33%, 보수 36%였다. 다른 조사에서 도출되는 한국 사회 이념 지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도층 내부를 들여다볼 첫번째 열쇠는 정치에 대한 관심도였다. 구체적으로 ‘평소 정치 문제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2024년 4월 치러질 총선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를 물었다. 두 질문에 대해 ‘전혀 관심 없다’고 답한 경우 0점, ‘관심 없는 편’은 1점, ‘관심 있는 편’은 2점, ‘매우 관심 많다’는 3점을 각각 부여했다. 두 질문 모두에 ‘전혀 관심 없다’고 한 응답자는 0점, ‘매우 관심 많다’고 한 응답자는 6점이 부여되는 식이다. 점수가 높을수록 관심도가 높다는 뜻이다.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보수 응답자 평균이 4.16점, 진보 응답자 평균이 4.12점으로 나왔는데 중도 응답자는 3.52점이었다. 중도가 보수·진보에 비해 정치 관심도가 크게 낮은 것이다. 그런데 중도 응답자는 자료의 분산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인 표준편차가 진보·보수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중도의 표준편차는 1.41로 진보(1.14)·보수(1.16)보다 높았다. 이번 조사에 자문단으로 참여한 정한울 한국사람연구원 원장은 “표준편차가 클수록 집단 내부의 이질성이 크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정치 관심도 측면에서 중도가 진보·보수에 비해 내부 응집력이 약하다는 의미다. 중도라는 한 지붕 아래 고뇌하는 햄릿이 2명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다시 정치 관심도를 기준으로 저관심(0~3점), 고관심(4~6점) 집단으로 구분해보았다. 그 결과 진보와 보수는 모두 고관심 집단이 80%대 초반, 저관심 집단은 20% 미만으로 나왔다. 중도는 달랐다. 중도층 가운데 정치 고관심 집단은 62%, 저관심 집단은 38%였다. 앞서 언급한 100명 가운데 21명은 중도 내부의 정치 고관심 집단을 말한다. 전체 이념 지형 가운데 중도 집단을 둘로 쪼개면 진보 30%, 저관심 중도 13%, 고관심 중도 21%, 보수 36%로 배열할 수 있다.

■ 방관자와 심판자

직장인 김동훈씨(31·남)는 “내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도 크게 바뀌지 않는 것 같아서 관심을 끄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지금까지 투표를 거의 하지 않았고, 오는 총선 때도 할 생각이 없다. 김씨는 정치에 관심을 끊은 이유로 세월호 참사를 들었다. 그는 “세월호 때 정치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정말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대전에 거주하는 직장인 A씨(33·여)는 정치에 관심이 많다. 선거 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투표했지만 스스로를 중도라고 규정한다. A씨는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는 걸 중도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양쪽 입장을 다 열린 마음으로 보는 사람도 중도”라면서 “미리 입장을 정해놓지 않고 그때그때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씨와 A씨는 저관심 중도와 고관심 중도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100명 중 13명에 속하는 김씨와 21명에 속하는 A씨를 달리 부를 이름은 없을까. 경향신문 특별취재팀과 자문단은 이들이 속한 집단을 각각 ‘방관자’와 ‘심판자’로 부르기로 했다. ‘어떤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보기만 하는’ 방관자와 ‘어떤 문제에 대해 잘잘못을 가려 결정을 내리는’ 심판자의 정의가 두 집단의 특성을 잘 반영하기 때문이다.

두 집단의 정치 관심도 차이는 정치 관련 기사를 접하는 빈도와도 연결됐다. 하루 한 번 이상 정치 기사를 찾아본다고 응답한 비율은 심판자 중도가 73%로 진보·보수보다 높은 반면, 방관자 중도는 28%로 가장 낮았다. 정치 기사를 잘 보지 않는다는 사람은 방관자 중도에서 39%에 달했다.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정모씨(29·여)는 “(정치) 기사를 보면 눈살이 찌푸려져서 관심이 안 간다”고 말했다. 정치 기사를 안 본다고 답한 심판자 중도는 4%에 불과했다.

인구학적 특징을 살펴보자. 심판자 중도는 방관자 중도에 비해 나이·자산·학력이 높은 경향이 있었다. 연령 평균값은 심판자 중도(52.4세), 보수(51.3세), 진보(46.0세), 방관자 중도(44.4세) 순이었다. 자가주택 보유율은 심판자 중도(70%)가 가장 높고, 방관자 중도(49%)가 가장 낮았다. 월평균 가구소득 평균값은 진보·보수·심판자 중도·방관자 중도 순이었고, 가구 순자산 평균값은 보수·심판자 중도·진보·방관자 중도 순이었다. 학력으로는 고등학교 졸업 이하보다 대학교 재학 이상에서 방관자 중도 대비 심판자 중도의 상대적인 규모가 컸다. 정 원장은 청년층에서 방관자 중도의 상대적 비중이 높게 나타난 데 대해 “향후 전체 투표율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2020년 후 총선·대선·지선
‘심판자 중도’ 투표율 높고
3명 중 1명, 투표 정당 바꿔
선거 ‘스윙보터’로 힘 지녀

■ “여든 야든 잘못한 건 심판해야”

서울에 사는 장모씨(65·남)는 하루에도 여러 번 인터넷으로 정치 기사를 찾아본다. 대학교수를 하다 은퇴한 그는 지금 윤석열 정부를 견제한다는 측면에서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지만, 2022년 지방선거 때는 국민의힘 소속 구청장 후보를 뽑았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 재건축이 빨리 추진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장씨는 “여든 야든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중도”라고 했다.

중도층을 들여다볼 두번째 열쇠는 정치 효능감이다. 정치 효능감은 자신이 정치적 의식과 역량이 뛰어나다고 믿는 내적 효능감, 정치 주체들이 나의 요구에 반응할 것이라고 믿는 외적 효능감으로 나뉜다. 흔히 중도는 내·외적 정치 효능감이 모두 낮고, 투표율도 낮을 것이란 인식이 많다.

실제로는 어떨까. 외적 효능감 측면에선 이념에 따른 차이 없이 모두 낮았다. 외적 효능감을 측정하는 ‘정부는 나 같은 사람들의 의견에 관심이 없다’는 문장에 진보·보수, 방관자·심판자 중도 모두 70% 이상이 동의했다. 내적 효능감을 묻는 ‘나는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정치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문장에 대해선 심판자 중도의 83%가 그렇다고 답해 진보(81%)·보수(77%)보다 높았다. 방관자 중도는 43%만 그렇다고 답했다. 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비율은 심판자 중도(60%)가 진보(73%)·보수(65%)보다 다소 낮았지만 방관자 중도(45%)에 비해선 크게 높았다.

■ 정당 경계를 넘나드는 투표

부산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이성환씨(48·남)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대 정당을 오가며 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후보를 뽑아 모두 당선시켰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정치를 안 하던 새로운 사람을 선호한다는 그는 “특별히 당을 정해놓고 찍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오는 4월 총선에 누굴 찍을지 묻자 국민의힘과 민주당에 모두 실망했다면서 “신당 후보가 나오면 무조건 찍을 것”이라고 했다. 이씨는 자신을 중도로 규정한다.

세번째 열쇠는 투표율과 투표 성향이다. 방관자 중도와 심판자 중도는 2020년 이후 치러진 세 번의 전국단위 선거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2020년 총선, 2022년 대선, 지방선거에서 투표를 하지 않았다(투표권 없었음 포함)는 응답은 심판자 중도가 각각 16%, 12%, 16%였다. 투표율이 진보·보수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반면 방관자 중도는 기권했다는 응답이 40%(총선·지방선거)에 달했다.

투표율이 진보·보수 못지않은 심판자 중도가 표를 던진 정당은 일관적이지 않았다. 최근 세 번의 선거에서 모두 투표한 집단만을 뽑아서 봤더니 심판자 중도 3명 중 1명(34%)은 한 번 이상 투표 정당(후보)을 바꿨다고 답했다. 반면 진보와 보수는 세 번 모두 같은 정당에 투표한 사람이 각각 80%, 75%였다.

진보·보수는 투표율이 높고 지지 정당을 바꿀 가능성이 낮아 각각 민주당·국민의힘 고정 지지층으로 볼 수 있다. 지난 세 번의 선거에서 모두 투표했다고 답한 방관자 중도 가운데 투표 정당(후보)을 바꾼 응답자는 44%로 ‘스윙투표’ 비율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방관자 중도 집단 전체가 투표율이 확연히 낮아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작다. 반면 심판자 중도는 투표율과 지지 정당 변동성이 모두 높아 진정한 스윙보터이자 캐스팅보터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선거에서 승자를 정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심판자인 것이다.

심판자, 포용·실용 더 중시
중도가 진보·보수층에 비해
정치 효능감·투표율 낮다는
‘무의미한 집단’ 기존 견해 깨

■ 유연성과 개방성

네번째 열쇠는 정치나 이념에 대한 유연성과 개방성이다. 심판자 중도는 다름을 포용하려는 태도에서 다른 집단과 차이가 났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통해서 종종 입장이나 생각을 바꾸게 된다’와 같은 다원주의적 태도를 측정하기 위한 8개 문항 가운데 심판자 중도는 6개 문항에서 동의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

‘중도정치’에 대한 평가는 이념에 상관없이 긍정적인 의견이 대체로 우세했는데, 역시 심판자 중도가 중도정치를 가장 적극적으로 긍정했다. 중도정치에 관해 떠올릴 법한 표현을 제시하고 고르도록 했더니 실용주의적 태도, 국민통합, 극단주의에 대한 반대, 균형추 역할, 양당정치에 대한 거부감, 이념보다 민생을 중시하는 태도 등 긍정적인 이미지를 내포한 표현에 대해 심판자 중도가 긍정하는 정도가 가장 높았다. 기회주의적 행동, 방관적 태도라는 부정 평가에 대해서는 심판자 중도만 유일하게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동의한다’는 답변보다 많았다.

심판자 중도는 정치에서 타협의 필요성도 높게 평가했다. ‘정치에서 타협은 원칙 없음을 의미한다’(0점)와 ‘정치인은 기꺼이 타협할 태도를 갖춰야 한다’(10점)는 명제 가운데 자신이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를 0~10점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했더니, 평균값이 진보(7.07), 심판자 중도(6.79), 보수(6.74), 방관자 중도(5.92) 순이었다.

◇어떻게 조사했나?=이번 여론조사는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해 12월12일~15일, 19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533명을 대상으로 웹(온라인)조사 방식으로 진행했다. 표본은 한국리서치 설문에 응하기로 미리 동의한 마스터샘플(지난해 11월 기준 86만여명)에서 지역·성·연령별 비례를 할당해 추출하고 가중치를 부여해 보정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5%포인트이며, 응답률은 4.4%다. 결과값은 소수점 첫째 자리에서 반올림해 정수로 표기했으므로 합이 100%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특별취재팀=김재중 스포트라이트부 부장, 배문규(데이터저널리즘팀)·심진용(스포츠부)·정대연(정치부)·권정혁(경제부)·문재원(사진부) 기자

정대연 기자 hoan@kyunghyang.com, 박채연 기자 applaud@kyunghyang.com, 배시은 기자 sieunb@kyunghyang.com, 이예슬 기자 brightpearl@kyunghyang.com, 최혜린 기자 cher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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