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수 없는 강 건넜나? 통일 접고 두 국가론 펼친 김정은, 자신감?
'정녕, 남북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일까?' 연말연시에 전해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발언과 노동당 9차 전원회의 결정사항을 접하고 내뱉게 되는 탄식어린 질문이다.
2023년 12월 30일자 <조선중앙통신>은 전원회의에서 "불신과 대결만을 거듭해온 쓰라린 북남관계사를 냉철하게 분석한데 입각하여 대남 부문에서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도모하기로 했다며, 김정은의 발언을 소개했다.
발언의 핵심은 "장구한 북남관계를 돌이켜보면서 우리 당이 내린 총적인 결론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에 기초한 우리의 조국통일노선과 극명하게 상반되는 '흡수통일', '체제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 것들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이며 이에 따라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 전환을 뒷받침하기 위해 북한은 "통일전선부를 비롯한 대남 사업부문의 기구들을 정리·개편하는 작업"에 곧바로 착수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선 김정은 정권 들어 북한이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에서 '두 국가 체제'로의 전환을 염두에 둔 움직임이 있었던 것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0년을 전후해 '우리민족제일주의'에서 '우리국가제일주의'로 슬로건을 바꾼 것이나 2023년부터 북한 지도부가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북한이 남북관계에서 통일이라는 단어를 거둬내고 두 국가 체제를 공식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제는 북한의 이러한 방향 전환이 윤석열 정부 등장 이후 격화되어온 남북한 사이의 정치군사적 적대감에 따른 것만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북한이 전원회의 결과를 발표하면서 남한에서 "정권이 10여 차나 바뀌었지만 '자유민주주의체제하의 통일' 기조는 추호도 변함없이 그대로 이어져왔다"거나 흡수통일을 시도한 것은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고 평가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대남 인식의 결정적인 전환기는 2019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18년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황금기를 구가했던 남북관계는 2019년부터 악화일로를 걸었었다. 이와 관련해 북한의 대남 기구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담화를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이 기구는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통해 남북한이 '한반도 평화경제론'을 통해 일본을 따라잡아보자는 취지의 연실을 하자, 다음날 "삶은 소대가리 양천대소할 노릇"이라며 "남조선(남한)과는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조평통의 이 담화는 마치 자신의 임무를 다한 것이라도 한 것처럼 이때가 마지막이었다.(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졸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참조)
주목할 점은 또 있다. 북한의 대남 방향 전환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 그리고 윤석열 정부에 대한 적대감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남한의 필요성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극심한 경제난의 탈출구로써, 또 하나는 북한이 간절하게 원했었던 북미 관계 개선의 중재자이다.
그런데 북한은 2020년을 전후해 대미 관계 정상화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오히려 대미 정책 기조를 '강대강, 정면대결'로 거듭 선포하고 있다. 더욱 주목할 점은 북한의 경제다.
김정은은 이번 전원회의에서 2023년에 목표로 삼았던 알곡 생산을 비롯한 '12 가지 고지'를 초과달성했다고 말했고, 특히 2021∽2023년 국내총생산액이 2020년에 비해 "1.4배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김정은은 2022년 9월 시정연설에서 "2025년 말에 가서 2020년 수준보다 국내총생산액은 1.4배 이상" 성장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9차 전원회의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목표 달성에 이미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북한이 남한의 대북지원이나 남북경제협력 없이도 경제난과 식량난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의 대남 기조 전환도 이러한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이유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볼 때, 북한의 선택은 표면적인 것도 일시적인 것도 아닌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달라진 북한을 어떻게 상대하고, 무너진 남북관계를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가'라는 중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와 관련해 국내 일각에서도 남북관계를 '두 국가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헌법상의 영토조항을 바꾸고 국가보안법 개폐를 통해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남북관계를 재설계해보자는 취지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동시에 이러한 방향 전환이 남북관계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적대성'을 완화하고 해결하는 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따져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즉,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이든 '두 국가 관계'이든 핵심은 적대성, 특히 무력충돌과 전쟁의 위험을 품고 있는 정치군사적 적대성을 완화하고 해소하는 데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군비통제의 중요성과 시급성이 더욱 커졌다. 남북관계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의 본질은 군사 문제에 있고, 그 중요성과 위험성은 나날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군비통제는 상호간의 적대성과 불안감이 커질 때 그 필요성도 커진다. 냉전 시대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사이의 헬싱키 프로세스, 그리고 미국과 소련 사이의 각종 군비통제와 군축 조약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었다. 경쟁은 하되 경쟁이 충돌로 이어지지 않고, 또 군비경쟁이 수위를 낮추거나 통제해 가급적 낮은 수준의 군사력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안보와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전쟁 위기를 머금고 날로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의 재설계 실마리를 군비통제에서 찾자는 주장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맞닿아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과 제안은 본 연재를 통해 하나둘씩 담아볼 계획이다. 이에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빈곤하고 굶주리는 줄만 알았던 북한이 달라지고 있고, 달라진 북한이 남한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차분하고도 냉정하게 짚어봐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도외시한 대북정책이나 남북관계 설계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뤄보기로 한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wooks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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