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리더십의 부재와 이중과세
역사적 교훈은 분명하다, 문제는 지도자의 솔선수범… 속으로 딴생각하면 늘 끌려다녀
2024년엔 스스로의 주인 돼야
책을 읽겠다, 술을 줄이겠다, 살을 빼겠다. 새해가 밝아오면 다들 하는 결심이다. 물론 지키지 않는다. 하루나 이틀 정도 하는 시늉을 했다가,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으니 사흘에 한 번씩 결심하면 된다는 둥, 연말 술자리들의 여파가 아직 덜 끝났다는 둥, 온갖 핑계를 대며 똑같은 일상을 이어나간다.
그러다가 한 달쯤 시간이 흐르면 다시 결심의 시간이 다가온다. 우리는 양력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음력으로 또 한번 새해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조상님의 지혜가 담긴 음력설이 진짜 새해의 첫날이라며, 한 달 전의 다짐과 결심과 약속을 되풀이하고, 역시 작심삼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새해가 두 번 오는 나라는 흔치 않다. 미국 등 원래부터 양력을 쓴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옆 나라 일본만 해도 그렇지 않다. 12월 31일 밤부터 NHK에서 방송하는 홍백가합전을 보며 한 해를 마무리 짓고 새해를 맞이한다. 반면 우리는 방송사마다 내보내는 연말 시상식을 보며 새해 인사를 주고받은 후, 한 달 남짓 지난 후 다시 한번 설 명절을 치른다.
왜 우리는 설을 두 번 쇠는 이중과세(二重過歲)의 나라가 된 걸까? 리더십과 솔선수범의 문제 때문이다. 때는 1896년 1월 1일. 대한제국을 건립한 조선의 임금 고종은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제시하며 공식 역법으로 태양력을 채택했다. 왕실 탄생일, 공식 제사, 축제 등을 모두 양력으로 변경했다. 주체적인 근대화의 길에 접어든 일본을 본따 세계 표준 달력을 바탕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지겠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고종의 ‘새 달력 선포’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변화는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이루어졌다. 궁정의 가장 높은 곳부터 단발을 하고 철두철미하게 양력에 따랐다. 반면 ‘고종실록’에 따르면 조선 왕실은 자신들이 선포한 달력을 지키지 않았다. 음력 정월 초하루에 제사의 일종인 오향대제를 지냈고, 동지에는 신하들에게 신년 하례를 받고 있었다.
달력을 바꾸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변경하는 것이다. 세대를 넘어 시대를 전환하는 일이다. 그런 막중한 과업을 수행하면서도 조선의 궁궐은 말 따로 행동 따로였다. 임금이 새 달력을 지키지 않으니 백성들이 새 시대를 맞이할 리 없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국권이 넘어가자 조선인들의 마음은 더욱 양력 새해맞이와 멀어졌다.
해방 후 정부 차원의 지속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음력설을 지켰다. 결국 1984년 12월 민주정의당이 “내년부터 구정 하루 동안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국민적 여망을 수용해 나가기로” 발표하면서 음력설은 공휴일이 되었다. 그 후로 ‘구정’에는 하루씩 날짜가 덧붙고 ‘신정’ 공휴일은 당일 하루로 축소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양력을 공식 달력으로 쓰는 나라에서 음력에 맞춰 사나흘씩 공휴일을 갖게 된 역사적 맥락이다.
어떤 이들은 이 과정을 민족주의, 민중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일제와 군부 독재 정권이 강요한 양력을 민중이 끈질긴 저항으로 이겨낸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일리가 없지 않겠지만 이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세계 표준의 양력을 택하는 것은 근대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조선 임금은 자신이 선포한 달력을 지키지 않았다. 조선 백성들 역시 기존 풍습을 유지했다. 그런 ‘저항’을 칭송하면서 조선이 스스로 근대화하지 못했다고 애통하게 여기는 것은 모순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주체성’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주체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을 하거나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 자기 인생의 지배자이며 스스로의 리더인 사람이라면, 하기 싫은 일도 기꺼이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 자신이 바뀐다. 내가 먼저 달라지지 않으면 세상도 움직이지 않는다.
양력 전환을 결정하고 스스로 모범을 보인 일본 왕실은 근대화에 성공했다. 양력을 선포하고 음력으로 제사를 지낸 조선 왕실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물론 조선의 근대화가 실패한 이유가 그것 하나만은 아닐 테지만, 역사적 교훈은 분명하다. 겉으로 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딴생각을 품고 미적거리는 이들은 영원히 남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2024년은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옳은 선택을 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한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충북 영동 농로서 50대 남녀 숨진 채 발견...경찰 수사 착수
- 與의총서 '당원 게시판 논란'... 친윤 "당무감사 필요" 친한 "경찰 수사 중" 갑론을박
- 의료사고 심의위 만든다... 필수의료는 중과실만 처벌토록
- 韓총리 “67학번인데도 입시 기억 생생… 수험생 여러분 고생 많으셨다”
- IT회사까지 차려 4조원대 도박 사이트 운영한 일당 적발
- 수능 영어, 작년보다 쉬워... EBS 교재서 많이 나왔다
- “마약 투약 자수” 김나정, 필로폰 양성 반응 나왔다
- “감사 전합니다”...총리실, 칠곡 할머니 래퍼들 부른 사연
- 도로석으로 쓴 돌덩이, 알고보니 현존 최고 ‘십계명 석판’
- “타인에 노출되는 것 두렵다”... 성인 5명 중 1명 심한 사회불안 느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