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행사비 종잣돈으로, 다문화 엄마 2000명 가르쳤다

최은경 기자 2024. 1. 3.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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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학교 운영 ‘한마음교육봉사단’… 전·현직 교수 등 130여명 활동

2023년 마지막 토요일인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도봉가족센터에는 폭설이 내렸다. 걷기도 힘든데 ‘다문화 엄마’ 11명이 교실에 모였다. 전직 교수인 윤경진씨가 국어 강사로 나서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는 말, 한국에 사는 동안 한번쯤 들어봤죠? 오리발을 내민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라며 속담 설명을 시작했다. 받아 적는 다문화 엄마들의 손이 바빠졌다.

폭설이 내린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도봉구 도봉가족센터에서 다문화 여성 11명이 국어 공부를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9년 전 최병규(맨 오른쪽) 전 카이스트 교수가 다문화 인재를 키우려면 엄마들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만든 '한마음교육봉사단'이 진행하는 '다문화 엄마학교'다. /이덕훈 기자

세밑 연휴에도 한마음교육봉사단은 ‘다문화 엄마학교’ 수업을 진행했다. 이 봉사단은 초등 교육을 전공하고 은퇴한 교수·교사 등 130여 명으로 구성돼 있다. 초등학교 자녀를 둔 다문화 엄마들에게 우리 초등학교 교과를 가르치는 ‘엄마학교’를 2015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대전에서 시작해 지금은 전국 25개 지방자치단체에 학교를 뒀다. 봉사단장인 최병규(75) 전 카이스트 산업·시스템공학과 교수가 2014년 정년 퇴임하고 교육봉사단의 깃발을 들었다. 당시 다문화에 관심이 많던 예비 며느리가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학교 부적응 실태를 알려준 것이 ‘다문화 교육’ 봉사를 결심한 계기가 됐다. 최 전 교수는 “많은 다문화 엄마들이 ‘아이가 초등 3·4학년만 돼도 엄마가 한국 말·역사에 서툴다고 무시한다’ ‘아이가 학교 숙제를 물어봐도 가르쳐줄 수 없으니 답답하다’고 호소하고 있다”며 “아이들도 (외국 출신인) 엄마 도움을 못 받으니 기가 죽고 학교에서 겉도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는 다문화 아이들을 도우려면 다문화 엄마부터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최 전 교수는 제자들이 퇴임식 등에 쓰겠다며 모은 돈 2000만원을 현금으로 달라고 했다. 퇴임식을 하지 않았다. 대신 제자들 정성과 사비 1000만원을 종잣돈으로 봉사단을 만들었다. 지역 센터별로 연간 2000만원이 넘는 운영비가 드는데 450명의 기부금과 지자체·교육청 지원으로 충당한다. 개인 기부자 중 79명은 카이스트의 전현직 교수들이라고 한다.

‘엄마학교’는 다문화 엄마에게 5개월 동안 온라인과 대면 수업으로 우리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국어·수학·역사·과학·도덕 등을 가르친다. 졸업 후에도 넉 달 동안 숙제도 내주고 온라인 시험도 치르게 한다. 담임은 초등 교육 전공자들이다. 도봉가족센터의 담임 윤경진씨는 한국교원대 초등영어교육과 교수, 담임 한수연씨는 초등 교사를 지냈다. 가르치는 수준도 높다. 이날도 다문화 엄마들은 수학 ‘분수의 사칙연산’을 풀고, 국어에서 ‘배신하다’와 같은 말이 ‘등을 돌리다’인지 ‘눈을 돌리다’인지 맞히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자신이 알아야 집에서 자녀 공부도 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 9년간 엄마학교를 거쳐간 다문화 엄마는 2000명에 달한다. 출신국도 중국, 베트남, 필리핀, 일본, 캄보디아, 우즈베키스탄 등 25국에 이른다. 북한 출신도 있다.

교육봉사단은 2016년부터 ‘한마음 글로벌 스쿨’도 열어 다문화 중고생에게 수학·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엄마학교를 졸업한 다문화 엄마들이 “중고생이 된 우리 아이들도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지난 2학기에는 중1~고1 다문화 학생 125명이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었다. 엄마학교 교사들과는 별개로 전현직 교수 28명이 ‘글로벌 스쿨’에서 봉사하고 있다. 한 선생님은 “글로벌 스쿨 출신 학생들이 ‘어느 대학 소프트웨어학과에 합격했다’ ‘군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온다”며 “우리 학생을 가르칠 때와는 다른 뿌듯함이 있다”고 했다.

최 전 교수는 “다문화 엄마와 아이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더 다양하게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최악의 저출생 문제를 겪는 우리나라에서 현재 태어나는 아이 100명 중 6명이 다문화 가정 출신이다. 이 비율은 매년 늘고 있다. 최 단장은 “다문화 부모와 아이들을 우리 기업과 대학이 뽑고 싶을 정도의 인재로 만들어야 한다”며 “다문화 지원과 교육은 우리 미래와도 연결돼 있다”고 했다.

은퇴 교수·교사들의 교육 자원 봉사는 실제 다문화 엄마들을 바꾸고 있다. 페루 출신으로 한국에서 삼남매를 낳은 김하은(34)씨는 “엄마학교에서 평소 접할 기회가 적던 한국의 역사를 배우고 고급 한국말을 익히고 있다”며 “우리 삼남매를 이순신 장군 같은 애국자로 키우고 신사임당 같은 엄마가 되는 것이 목표가 됐다”고 했다. 필리핀 출신인 김은아(36)씨는 “올해 초등 1학년이 된 아이 교과서를 보니 수학조차 필리핀에서 배운 것과 달라 보이더라”며 “내년부턴 집에서 아이 수학을 직접 가르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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