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찰스 척 피니(Charles Chuck Feeney)가 한 말이다. 그는 누구인가? 1931년 미국 뉴저지에서 아일랜드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으로 10대 때부터 크리스마스카드와 우산 등을 팔아 용돈을 썼고, 대학을 다닐 때에도 샌드위치를 팔아 등록금을 마련했다. 1960년 DFS 면세점을 창업해서 세계 최대의 글로벌 면세점으로 성장시켰으며, 1997년 DFS 면세점 매각 당시에 언론에 공개된 회계장부 덕(?)에 약 15년 동안 2900회에 걸쳐 무려 40억 달러(약 5조 원)를 가명으로 모두 기부한 사실이 알려져 미국 전역을 놀라게 했다. 그는 평생 15달러(약 2만 원)짜리 시계를 차고 다녔고, 비행기도 이코노미석만 탈 정도로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았다. 2020년 거의 전 재산 80억 달러(약 10조 원)를 전액 기부한 후 지난해 10월 방 2칸 소형 임대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런 사람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세계 굴지의 기업을 경영한 것도 대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치가 ‘기부와 나눔’이라는 점으로부터 대단함을 넘어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며 평생 기부를 해왔던 그 의미가 읽힌다.
한편, 찰스 척 피니와 같은 큰 부호가 아니더라도, 살펴보면 잔잔한 감동을 주는 기부자가 참 많다. 매년 수백만 또는 수천만 원의 현금다발을 주민센터, 경찰서, 각종 모금회 앞에 놓고 사라지는 익명의 기부자들, 국가로부터 받은 기초생활수급비 중 일부를 꼭 다시 기부하는 어느 독거노인, 텔레비전에 나오는 안타까운 사연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함께 눈물 흘리며 십시일반으로 기부하는 무수히 많은 시민이다.
여기서, 기부(寄附)는 왜 하는 걸까? 또는 왜 해야만 할까? 라는 근본적 질문을 해본다. 그리고 나는 그 답을 ‘인간다움’에서 찾고자 한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공감의 시대(The Empathic Civilization)’라는 책에서 인간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icus)’, 즉 공감하는 인간으로 규정지었다. 다시 말해, 인류 역사를 주도하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바로 공감이고, 그 뛰어난 공감 능력 때문에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종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럼, 공감(共感)은 무엇일까? 안타깝고 슬픈 내용의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면, 우리도 따라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이 공감이다. 힘겨운 역경을 뚫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그 다짐이 공감이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배고프고 아픈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앞다투어 달려가 손을 잡는다. 그 손 맞잡음이 공감이다.
이렇듯 공감하는 인간은 인간을 위하고 살리는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그 일을 할 때 가장 인간다움을 뿜어낸다. 우리가 기부를 하는 이유, 그리고 기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고 본다. 덧붙여, ‘기부를 통해 나누는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끼게 되어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는 숨은 기부 영웅들의 담담한 이야기에서 나는 더더욱 ‘인간다움’에 그 근거를 두고 싶다.
그런데, 간혹 찬물을 끼얹는 기사들이 눈가를 찌푸리게 하곤 한다. 아동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기부받은 돈 127억 원을 횡령한 사건이라든지, 이따금 터져 나오는 공익법인이나 사회복지법인의 정부 보조금 빼먹기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 주변의 지인들조차도 기부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거나 심지어 거부반응까지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불법행위를 한 일부 사람 또는 단체로 인하여 인간다움에 근거한 기부와 나눔이라는 인간의 보편성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기부와 나눔을 계속 이어 나가야 한다.
2024년 새해, 새 아침에 나 스스로에게 핍진하게 자문(自問)해 본다. 나는 얼마나 인간다운가? 그리고 새 결심을 한다. 인간다움을 뿜어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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