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무작정 여행
김수로왕릉은 겨울에 산책하기 좋다. 돌담이 찬 바람을 막아주고 후원에는 상수리나무 등 아름드리 고목이 운치를 더한다. 후원을 돌아 왕릉 안 작은 연못가 벤치에 앉아 동쪽에 있는 분성산을 바라본다. 춥진 않은지 안부를 묻는다. 산은 심심한 내 마음을 안다는 듯 나의 안부를 되물어 온다. 분성산이 내 대화의 상대가 된다.
맑은 날 산을 바라보면 파란 동쪽 하늘엔 낮달이 놀러 와있다. 그 사이를 가르며 아득히 날아가는 비행기가 눈에 들어온다. 비행기에는 반가운 사람을 만나러 가거나 여행을 가는 사람이 타고 있을 것이다. 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리움과 여행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오늘도 왕릉을 한 바퀴 돌고 연못가 벤치에 앉아 분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내 옆 벤치엔 이순(耳順)을 넘겨 보이는 부부가 다정하게 앉아 있다. 부부는 머뭇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나란히 나에게로 와 말을 건넨다. 분성산을 가리키며 “저기 돌담처럼 보이는 것과 지붕이 둥글게 보이는 저곳은 무엇입니까?” 나는 “저기 돌담처럼 보이는 것은 분산성이고, 둥근 지붕으로 보이는 곳은 김해 천문대입니다”고 답해주었다.
성은 고려시대 박위 장군이 왜구를 막기 위해 처음 쌓았으며 천문대는 우주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청소년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 2000년대 초에 지었다고 말해 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부부는, 사는 곳이 충남 논산이며 아침에 무작정 여행을 떠나 도착한 곳이 이곳이라고 한다. 죄송하지만, 난생처음이라 안내를 부탁한다고 한다. 아는 대로 안내를 해주었다.
김해는 가야왕도(伽倻王都)다. 그 옛날 도읍을 정함에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방위를 지키는 사신(四神)과 배산임수(背山臨水)는 필수 요소로 고려되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흔적만 있는 김해읍성을 두고 볼 때 동으로는 좌청룡 격인 분성산, 서로는 우백호 격인 임호산, 남으로는 남주작 격인 봉황대, 북으로는 북현무 격인 구지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배산임수에서 임수로 해반천이 있다.
김수로왕이 묻혀 있는 곳은 사라진 김해읍성 서문 밖에 위치하며 왕릉은 명당이다. 왕릉 정문을 나가 우로 돌아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가야 시대 지배층 무덤군인 대성동 고분군이 있다. 가리킨 저 산은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이러한 내용은 국문학과 민속학을 가르친 고(故) 김열규 교수로부터 배웠다. 지금 나에게 이런 훌륭한 스승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그분이 그립기도 하다.
부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저곳에 가보고 싶다며 가는 길을 묻는다. 길을 가르쳐주면서 가까이에 있는 신어산 은하사를 들러보길 권했다. 그러자 도시가 조용하고 깨끗하여 하루를 머물고 싶다며 조심스레 숙박업소도 물어 온다. 가까운 곳에 있는 한옥 체험관과 경전철 부원역 앞에 있는 숙박업소 등을 소개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떠나온 여행길이라 그런지 돌아서는 부부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그 뒤로 세월이 따르고 그림자도 따른다. 사람의 삶은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고 찾고 나면 또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노마드의 삶이다. 여기에 충실하면 삶도 윤택해지지 않을까?
부부와 헤어진 후 벤치에 앉았는데 ‘무작정 떠나온 곳’이 김해라는 말이 마음에 머문다. 나는 언제 무작정 여행을 떠나본 적이 있던가? 실제로 한 번도 없었다. 아등바등 살아간다는 삶 탓과 쉽사리 실천하지 못하는 소심한 용기 때문이리라. 여기서 삶에는 작은 여유와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검은 토끼의 해’가 저물고 ‘푸른 용의 해’가 밝았다. 지난 연말은 새해의 계획과 각오를 새기느라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했으리라고 본다. 작심삼일이라고 하지만, 평소에 하는 각오보다 새해를 맞으며 하는 각오가 성공 확률이 열 배나 높다고 어느 연구에서 밝혔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실천하길 바란다.
올해는 내가 사는 고장 가야왕도 ‘김해 방문의 해’다. 시는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충남 논산의 부부처럼 무작정 여행지로 김해를 추천한다. 청룡처럼 엎드려 내려오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걸어오는 분성산을 마주하고 새해 각오를 다진다. 올해엔 무작정 여행을 떠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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