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정치’ 칼날에 쓰러진 야당 대표
반복되는 정치 테러 비극… 尹대통령 “어떤 폭력도 용납해선 안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일 새해 첫 지역 일정으로 부산·경남 지역을 방문하던 중 괴한의 흉기 습격을 당했다. 이 대표는 경정맥 손상이 의심된다는 의료진 소견에 따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즉각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며 우려를 표했다. 양 진영의 극단적 대립과 혐오를 자양분으로 하는 정치가 보편화되면서 최근 정치인에 대한 테러도 계속되고 있다. 이번 사태 이후에도 여야 일부 정치인과 강성 지지층은 자작극 등의 음모론과 배후설을 제기하며 갈등을 키웠다.
이 대표는 이날 오전 10시 25분쯤 부산 강서구 대항동 가덕도신공항 부지에서 취재진 질문을 받다가 괴한의 흉기 습격을 받았다. ‘내가 이재명’이라고 쓰인 파란색 종이 왕관을 쓴 괴한은 취재진을 비집고 “사인 하나 해달라”며 이 대표에게 접근했고, 갑자기 길이 18㎝가량의 흉기를 꺼내 들어 이 대표의 왼쪽 목 부위를 공격했다. 이 대표는 10시 52분쯤 현장에서 구급차와 헬기 편으로 부산대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받은 뒤 오후 3시 20분쯤서울대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았다. 이 대표 가족 측의 요청에 따라 이 대표의 서울대병원 이송이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술은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소요됐고, 이 대표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민주당 지도부는 서울대 병원에서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갖고 “정치 테러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고 도전”이라며 “수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달라”고 밝혔다.
이 대표의 피습 소식이 전해진 후 대통령실 김수경 대변인은 11시 20분쯤 “윤석열 대통령은 이 대표의 안전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며 “우리 사회가 어떤 경우에도 이러한 폭력 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도 “절대로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라며 “이 대표의 빠른 회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수사 당국은 총력을 다해서 엄정 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야 정치권은 모두 이재명 대표 피습 사태에 대해 내부적으로 ‘입단속’에 나섰다. 사건의 배경이 확인되기 전에 불필요한 음모론이 번졌다가 부메랑이 되는 상황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3일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했다. 홍익표 원내대표는 의원들에게 “동요하지 마시고, 대표님의 쾌유를 비는 발언 이외에 사건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나 범인에 대한 언급을 자제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린다”고 공지했다. 여권도 즉각 대통령실과 지도부의 우려 표명 메시지가 나오면서 공개 발언에 대한 수위 조절에 들어갔다.
하지만 ‘코인 사태’로 민주당을 탈당한 김남국 의원은 페이스북에 “정치인에 대한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계획된 살인미수에 해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라며 “최악의 정치 테러”라고 썼다. ‘보복 운전’ 유죄 판결로 부대변인직에서 사퇴한 이경 전 민주당 부대변인은 “대통령이 민생은 뒷전이고 카르텔, 이념 운운하며 국민 분열을 극대화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 아닌가”라고 했다. 양이원영 의원은 “혐오와 차별의 정치가 증오와 폭력을 조장할 수 있다”며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공적 권한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권력과 정치 이제는 그만둬야 한다”고 썼다.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기도 전에 정부·여당으로 이번 테러 사건의 책임을 돌린 것이다. 당원 게시판이나 지지자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 뉴스 댓글에도 음모론과 배후설이 도배되기 시작했다. 여당 지지자들은 자작극설을 제기했고, 이날 국민의힘 행사장에서는 이 대표 피습 소식에 환호성이 나오기도 했다.
친명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민주당을 깨고 나가려는 이낙연 등 신당파가 관련돼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번졌다. 여야 간 대립뿐만 아니라 민주당 내에서도 친명·비명이 갈려 음모론을 키워간 것이다. 이후엔 괴한이 국민의힘 당원이란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경찰에 따르면 괴한은 충남에 거주하는 1957년생 남성으로 인터넷을 통해 총 길이 18㎝, 날 길이 13㎝의 흉기를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은 살인미수 혐의를 적용해 수사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사건에서 파생된 조각조각 장면도 모두 정쟁의 대상이 됐다. 여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재판을 지연시키기 위한 자작극 아니냐” “(단식을 치료했던) 녹색병원으로 또 가겠지”라는 얘기도 나왔다.민주당의 모든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다.반면 야당 지지자들은 “일부러 구급차가 늦게 온 것 아니냐” “상태가 심각한데 경찰이 사건을 축소 발표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당뿐 아니라 정부 자체에 불신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극한의 좌우 갈등 속에 테러 집단까지 횡행했던 해방 정국이 겹친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그런 정치 테러가 허용되지 않는 법치가 작동하긴 하지만 분위기는 비슷한 것 같다”며 “상대를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악마화하며 혐오·증오를 부추기는 정치가 이런 비극적 상황을 만든 것”이라고 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사람들이 사건의 본질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접근하는 게 일상이 됐다”고 지적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한국은 외국에 비해 정치를 사람 중심으로 바라보는 현상이 강하다”며 “추종하는 정치인의 반대쪽에 있는 상대방을 악으로 보고 제거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상대와는 “밥 자리를 함께하는 것도 불편하다”고 하는 국민이 44~45%에 달하고, 10명 중 6명은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은 국가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에 더 관심이 많다’고 손가락질한다(본지 2023년 신년 여론조사). 상대를 절멸시켜야 하는 악하고 추한 존재로 바라보고, 여기에 여야 정치권이 쏟아내는 가짜 뉴스, 음모론이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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