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겜 추리닝, 금자씨 물방울 원피스…그녀의 대박엔 원칙이 있다
세계에 K콘텐츠를 각인시킨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의 상징은 녹색 추리닝과 분홍 유니폼이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두 조합은 조상경(52) 의상감독의 감각이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에서 배우 이영애가 입은 물방울 원피스,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서 송강호가 걸친 후줄근한 추리닝도 그가 만들었다. 그는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2002·감독 류승완)로 시작해 영화·드라마·공연·CF 100여 편을 작업했다. 박 감독과는 ‘올드보이’(2003)에서 만나 올해 하반기 공개 예정인 ‘전,란’까지 함께한다. 지난 29일 경기도 성남에 있는 의상 스튜디오 ‘곰곰’에서 만난 조상경은 “잘 만든 의상의 핵심은 위트”라며 “작품의 긴장을 풀어줄 숨구멍이나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강조하는 위트가 담긴 대표작이 ‘오징어게임’이다. ‘오징어게임’은 황동혁 감독의 전작 ‘남한산성’(2017)을 같이한 인연으로 맡았다. 제작 당시 황 감독의 주문은 하나.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알아보기 쉽게 넣어달라”는 것뿐이었다. 넷플릭스 첫 화면에서 눈에 띄도록 색을 강조하고 싶었다. 원래는 버건디(포도주색)와 카키 조합도 후보였다. 최종적으로 보색 대비가 더 뚜렷한 녹색과 분홍으로 결정했다. “미국 워싱턴에 사는 조카가 ‘핼러윈 파티 때 고모 작품을 입었다’며 분홍 유니폼 영상을 보내줘서 뿌듯했어요. 그렇게 축제의 장에서 함께 즐길 수 있어야 오래 기억되죠.”
SF 무협 활극을 만들 때도 원칙은 같다. 오는 10일 개봉하는 영화 ‘외계+인’ 2편의 주역인 배우 김태리는 고려 시대 몽골에서 건너온 철릭을 입는다. “한복 고증이 바탕이지만 한 끗의 위트를 넣는 거죠. 철릭 자락을 직선으로 두지 않고 불규칙하게 잘라서 실루엣의 변화를 줘요. 어딘지 불균형해 보이면서 개성이 생기죠. 움직이기 편해 실용적이기도 하고요.” 올해 하반기 공개 예정인 ‘오징어게임 시즌 2′ 의상도 만든다. 조상경은 “’단순하고 위트 있게'라는 시즌 1의 원칙을 그대로 가져간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글로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색 조합이 더 중요해졌다. 서양인이 혼동하기 쉬운 한국·중국·일본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줘야 하기 때문. 조상경은 “같은 빨간색을 쓰더라도 나란히 세우는 색이 무엇인지에 따라 국가별 느낌이 다르다”며 “빨강 옆에 파랑이면 한국, 황금빛이면 중국, 검정이나 하양이면 일본 느낌이 난다”고 했다. 조상경이 입힌 SF 영화 ‘승리호’(2021)에서 주인공이 빨강과 파랑이 들어간 복장을 한 것도 한국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고민의 결과였다.
의상은 기성복을 쓰거나 협찬받지 않고 손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괴물’의 송강호 추리닝도 수작업으로 만들었다. 시중에서 파는 추리닝을 여러 벌 입혀봤으나 느낌이 살지 않았다. “어딘지 둔중하게 처진 듯한 배기 바지 느낌을 살리고 싶었거든요.” 여러 남성 배우가 일제히 정장을 입고 나오는 작품은 꼭 만들어 입힌다. “옷이 비슷해 보일수록 미세한 차이가 캐릭터를 결정해요. 사소함이 모여 엄청난 영향을 주니까 다 만들어 입혀요.” 넥타이 폭 6~9㎝에서 변화를 주고, 20가지 매는 법도 다르게 해 인물 개성을 살린다.
조상경은 고증에 깐깐하기로도 유명하다. ‘후궁: 제왕의 첩’(2012·감독 김대승)으로 한복을 만들기 시작해, ‘남한산성’에서 갑주(갑옷과 투구)를 제작할 때는 ‘밀덕(밀리터리 덕후·군사 분야에 관심이 많은 팬)’ 카페 회원들을 불러 의견을 듣고 복식 전문 교수의 자문도 거쳤다. “요즘 일부 영화나 드라마는 갑주 작업을 중국에 넘겨요. 하지만 중국 스태프는 납품을 받아보면 수준이 떨어질 때가 있어 위험해요.” 그래서 그는 ‘곰곰 스튜디오’ 팀원 40여 명과 함께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쪽을 선택한다.
때로는 의상이 캐릭터를 결정한다. 영화 ‘신과함께-죄와 벌’(2017·감독 김용화)에서 거짓지옥을 관장하는 태산대왕이 아이로 설정된 것은 조상경의 아이디어였다. ‘암살’(2015)에서 전지현이 결혼식 때 기모노가 아닌 웨딩드레스를 입은 것도 부케에서 총을 꺼내게 하자는 조상경의 제안을 최동훈 감독이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성사됐다. “영화는 연애하고 같아요. 설레는 작품이 좋아요. 어떤 계획도 세워지지 않고 잘 모르겠는 작품, 저를 두근거리게 하는 작품에 달려들어 도전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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