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경계가 무너지는 빅블러 세상이 온다

최연구 (과학문화칼럼니스트·필로 스페이스 고문) 2024. 1. 3.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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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대전환이 동시에 진행되고 게다가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쳐 세상은 격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시계가 불투명한 빅블러 세상에서 그나마 앞을 비춰 분간할 수 있게 해주는 전조등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빅데이터 분석으로 현상을 파악하는 역량, 인사이트와 포사이트(미래예측), 그리고 전문지식을 넘어서는 지혜 등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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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구 과학문화칼럼니스트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대전환이 동시에 진행되고 게다가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쳐 세상은 격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혼돈의 시대다. 격변기에는 눈에 보이는 시계(視界)는 불투명해지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점점 커진다. 보이는 것만 갖고 상황을 파악할 수 없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볼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만 그렇다고 보이는 대로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다.

프랑스 고어에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황혼 무렵을 의미하는데 해질녘에는 언덕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려는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금의 격변이 딱 그러하다. 자고 나면 세상이 변화하기에 변화를 식별하기 힘들고 새로운 것에 적응하기도 벅차다. 빠른 변화로 경계가 무너지고 융화되며 불확실성이 커지는 현상을 전문가들은 '빅블러'(Big Blur)라고 부른다. 블러는 경계가 흐릿한 형체를 뜻하고 빅블러는 격변으로 경계가 모호해지거나 융화돼 사라짐을 의미한다. 특히 산업과 기술, 비즈니스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위키백과의 정의에 따르면 빅블러는 '소비자 역할, 기업 관심사, 서비스 역할, 비즈니스모델, 산업장벽, 경쟁범위 6가지 측면에서 동시다발적인 힘이 작용해 산업, 업종간 경계가 급속히 사라지는 현상'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경계가 무너지고 융합되는 현실이다. 경계가 무너진다는 건 구분이 어려워지거나 서로 융합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근대화, 산업화 시대에는 경계가 분명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20세기 후반 대두한 포스트 모더니즘은 오랫동안 가진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과 합리적 사고에 기반한 모더니즘(근대성)에 대한 회의와 반발로부터 시작됐고 개성, 자율성, 다양성, 융합 등 새로운 변화에 주목했다. 전통적 시공간의 의미는 해체되기 시작했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존 생각과 개념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됐다.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프로슈머(prosumer)라는 개념이 등장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연계되고 가상과 현실이 융합되는 '메타버스'라는 가상공간이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했다. 인공지능은 이제 사람처럼 글을 쓰고 이미지도 만들고 있어 인간의 창작과 인공지능의 생성을 구분하기조차 어려워졌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면 미래에는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가 상용화하고 인간과 인조인간의 경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 증강현실을 이야기한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건만 지금은 첨단기술로 인간의 신체적, 인지적 능력을 강화하는 증강인간, 포스트 휴먼을 언급한다.

빅블러 현상에 불을 지피는 것은 다름 아닌 디지털 전환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현실과 가상, 인간과 인공지능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은 디지털 혁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로 만들어진 사이버 공간은 물리적 공간과는 전혀 다른 가상의 공간이다. 첨단 디지털 기술과 인간의 사유가 빚어낸 또 다른 세상이다.

하지만 빅블러는 단지 물리적 공간과는 다른 사이버 공간이 등장했고 공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이버 공간과 물리적 공간, 현실과 가상세계가 서로 연계되고 통합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빅블러와 함께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열리고 있다. 불확실성이 커지고 경계가 모호해지는 새로운 세상에서는 현상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해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이 최고의 경쟁력이 될 것이다. 시계가 불투명한 빅블러 세상에서 그나마 앞을 비춰 분간할 수 있게 해주는 전조등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빅데이터 분석으로 현상을 파악하는 역량, 인사이트와 포사이트(미래예측), 그리고 전문지식을 넘어서는 지혜 등이 아닐까 싶다.

최연구 (과학문화칼럼니스트·필로 스페이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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