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 정의채 몬시뇰 [김한수의 오마이갓]
김한수의 오마이갓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80904
지난 연말 또 한 명의 ‘거인’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천주교 정의채(鄭義采) 몬시뇰입니다.
지난해 12월 27일 밤,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으로부터 정 몬시뇰의 부음을 받았습니다. 정 몬시뇰은 1925년생이시죠. 건강하셨지만 워낙 고령(高齡)이었고, 특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는 잘 뵙지 못해서 마음으로는 ‘준비’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부음기사를 급히 송고한 후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빈소가 마련된 서울 명동대성당 지하성당으로 갔습니다. 오전 11시 공식 조문이 시작되기 직전, 정 몬시뇰의 시신이 도착해 유리관 안에 안치됐습니다. 유리관 안에 누운 정 몬시뇰은 생전에 뵀던 모습보다 더 작아보였습니다. 성인 남성이 양팔을 벌리면 길이가 남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표정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는 160㎝가 채 안 되는 체구였지만 세상 어떤 거인보다 당당했고, 그의 머릿속엔 항상 인류 미래에 대해 ‘큰 그림’이 있었지요.
정 몬시뇰과는 1년에 한 두번쯤 뵙고 점심식사를 하곤 했지요. 만남은 항상 ‘장시간’이었습니다. 점심 식사는 보통 2시간을 넘었고, 전화 통화도 30분~1시간씩 이어지곤 했습니다. 정 몬시뇰이 전화를 걸어오시면 저는 전화를 받기 전 ‘향후 1시간 정도’의 일정을 먼저 체크하곤 했습니다. 만약 그 사이에 다른 약속이 있으면 다시 전화를 드리겠다고 양해를 구하곤 했습니다. 일단 통화가 시작되면 나라와 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말씀이 이어졌거든요.
정 몬시뇰의 대화 주제는 반복되곤 했습니다. 워낙 드라마틱한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거의 1세기에 걸친 정 몬시뇰의 생애는 한국 현대사와 겹칩니다. 일제 하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그는 유교 집안에서 유일하게 천주교 신자가 됐고, 사제가 됐습니다. 사제가 된 이유엔 ‘민족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정 몬시뇰은 “천주교를 통해 일본보다 앞서 있는 미국식이나 유럽식으로 공부하여 성직자가 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후 덕원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해방을 맞고, 공산치하에서 죽을 고비를 넘겨 월남하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사제로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새로웠습니다.
트레이드마크 ‘돌덩이 백팩’
공식 부음 기사에 기록하지 못한 몇 가지 에피소드가 떠오릅니다. 우선 ‘엄청 무거운 가방’입니다. 정 몬시뇰은 항상 백팩을 메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늘 약속 시간 보다 먼저 도착해 계셨지요. 10분 전, 15분 전에 가도 먼저 와 계셨습니다. 한번은 아예 30분쯤 일찍 약속 장소에 갔더니 아직 도착 전이시더군요. 저보다 10분쯤 후에 도착한 정 몬시뇰은 백팩을 메고 계셨는데, 그 백팩을 받아 들다가 저는 휘청했습니다. ‘팔순의 노학자가 멘 가방이 얼마나 무겁겠어?’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었는데, 가방을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가방 안에 돌덩이가 들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가방 안에는 책이 가득했지요. “가방이 항상 이렇게 무거우시냐”고 여쭸더니 정 몬시뇰은 씩 웃으시더군요. 서강대 석좌교수 시절에도 그랬고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도 가방은 무거웠습니다. 아마도 6·25 직후 로마 유학시절 이후 평생 그의 가방 무게는 한결같았을 겁니다. 평생 그렇게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니시니 결국 허리가 버티지 못했고 수술도 받았습니다. 누가 대신 들어줄 수도 없는 그 무거운 가방에서 ‘한국 천주교 지성’이 탄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젊은이에 대한 희망과 기대
정 몬시뇰은 항상 ‘젊은이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말씀했습니다. 그는 평소 시간이 나면 대학가의 패스트푸드점에서 시간 보내곤 했습니다. 패스트푸드 점에 앉아서 오가는 청년들의 대화를 듣는 것을 좋아했지요. 그러면서 “젊음은 항상 이상과 새로운 세계를 추구한다. 경제적 발전 일변도로 젊은이들을 잡는다는 것은 망상”이라며 “우리 젊은이들은 정부와 선대(先代)를 잘못 만나 막심한 손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시대를 내다본 생각의 크기
정 몬시뇰은 생각의 크기가 남달랐습니다. 시간의 단위도 1년, 10년, 100년이 아니라 ‘1000년’을 이야기했지요. 새로운 천년대의 키워드는 ‘공존’ ‘공조’ ‘공영’이 될 것이라고 제시했지요.
로마 유학 이후 정 몬시뇰은 항상 생각의 주파수를 세계에 맞췄습니다. 과거 양주동 박사가 스스로를 ‘국보’라고 칭했다고 하듯이 정 몬시뇰은 세계적 석학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요.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1961년부터 가톨릭대 교수로 재직해 ‘한국의 사제 대부분이 내 제자’라고도 하셨지요. 지난달 30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정 몬시뇰의 장례미사를 주례한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도 강론에서 신학생 시절 정 몬시뇰의 강의를 들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도 했지요.
정 몬시뇰은 ‘생명문화’라는 용어를 확산시킨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표하곤 했습니다. 운동권의 분신자살과 어린이 유괴살인사건이 잇따르던 1991년 서강대에 생명문화연구소’를 열었는데, ‘인류사에서 처음’이라고 자랑하셨지요. 지금이야 ‘정치문화’ ‘생활문화’ ‘기업문화’ 등 ‘문화’라는 단어를 여러 곳에 붙이지만 당시엔 ‘생명’에 ‘문화’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상당히 낯설어 하는 분위기였답니다. 그럼에도 정 몬시뇰은 ‘생명문화’라는 단어를 관철시켜 우리 사회에 생명 문제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는 것이지요.
정 몬시뇰 선종 후 차동협 신부와의 대담집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를 꺼내 읽다가 ‘노인 사목’과 ‘이민자 문제’를 다룬 대목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했습니다. 이 책이 나온 것은 2010년, 지금부터 14년 전입니다. 지금이야 노인 문제나 이민자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당시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제 노인 문제가 옛날처럼 애긍시사의 대상이나 봉사에 의존할 시대는 완전히 지났다”면서 “가톨릭대학교 안에 노인 대학원을 설립, 이런 면에서 발전의 선각자 역할을 하여 국민에게 많은 혜택을 주며 사목적으로 큰 공헌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민자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는 싫고 좋음을 떠나 숙명적으로 단일 민족 사상을 넘어 다민족 사회로 넘어가야 한다”며 “우리 후대는 뿌리 깊은 단일 민족 사상과 배타성으로 고통스러운 많은 문제와 만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정 몬시뇰과 대화를 나눌 때 이런 말씀을 들으면 뜬구름 잡는 것처럼 여겨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보 ‘ .‘역
정 몬시뇰은 이 책에서 “언제부터인지 나이에 대한 초조감도 사라졌다”며 “지난날의 원한이나 증오, 섭섭했던 일들은 하나둘씩 잊혀져가고 좋았던 일, 고마웠던 일만 기억해 새로워진다. 다른 분들도 다 그런지 모른다. 한마디로 지금 내 심정은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일 뿐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저와 식사를 할 때에도 ‘은혜’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표정이 그렇게 평안했던 모양입니다. 정 몬시뇰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김한수의 오마이갓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80904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충북 영동 농로서 50대 남녀 숨진 채 발견...경찰 수사 착수
- 與의총서 '당원 게시판 논란'... 친윤 "당무감사 필요" 친한 "경찰 수사 중" 갑론을박
- 의료사고 심의위 만든다... 필수의료는 중과실만 처벌토록
- 韓총리 “67학번인데도 입시 기억 생생… 수험생 여러분 고생 많으셨다”
- IT회사까지 차려 4조원대 도박 사이트 운영한 일당 적발
- 수능 영어, 작년보다 쉬워... EBS 교재서 많이 나왔다
- “마약 투약 자수” 김나정, 필로폰 양성 반응 나왔다
- “감사 전합니다”...총리실, 칠곡 할머니 래퍼들 부른 사연
- 도로석으로 쓴 돌덩이, 알고보니 현존 최고 ‘십계명 석판’
- “타인에 노출되는 것 두렵다”... 성인 5명 중 1명 심한 사회불안 느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