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금희]단순함의 미덕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2024. 1. 2.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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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생각-감정, 파고들수록 공허감
스마트폰 살 때조차 복잡한 고민의 연속
새해에는 용기 내 ‘깊숙이’ 단순해지자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얼마 전 선물 받은 수건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궁서체로 수놓은 글귀는 일종의 농담 같은 면이 있었지만, 새해를 기다리며 불쑥불쑥 떠올랐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한 문장을 깊이 생각한 것이다.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내가 천착해 온 마음의 형질이었다. 대부분의 작업이 나를 불시에 휘감는 과거의 기억들과 감정들로부터 출발했고 나는 그것의 연원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늘 분투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내면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딘가에 발 닿지 않고 허공을 발버둥 치는 듯한 허무와 무력감, 고립과 고독 속으로 빠져든 것도 사실이다.

더 우려스러운 건 그 모든 폐쇄성에 언어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지금껏 내게 도움이 되었던 그 오래고 끈질긴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안에 쥔 눈덩이가 결국 때 묻고 녹아버리듯, 어떤 생각과 마음이든 내 안에 갇혀 있다면 결국 제빛을 잃고 결론 없는 회의에 가닿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새해 첫날,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든 형제들’이라는 문헌을 다시 읽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회적 우애와 우정 그리고 미래에 관한 사려 깊은 안내서인 이 글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지난해 이 글을 읽으면서 ‘가난’이나 ‘청빈’ 대신 사용되는 ‘단순함(semplicità)’이라는 단어에 대해 알고 놀랐던 적이 있다. 단순함은 가난이 의미하는 수동적 결핍과 청빈이 내세우는 윤리적 당위를 뛰어넘는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간단하지만 자주적 질서를 스스로 갖춘 삶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렇게 새로이 쓰인 말과 마주친 것만으로도 어떤 무지에서 한 걸음 나온 느낌이었다.

연말이 다가올 즈음에는 아빠 생신 선물로 몰래 스마트폰을 준비했다. 몰래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빠가 변화를 싫어하시는 분이라 아직 2G폰을 고집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스마트폰 얘기를 지나가듯 하셨고 이때다 싶었던 나는 생일 선물로 사드리면 어쩔 수 없이 쓰겠지 하고 여겼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간 내가 구입했던 방식으로 스마트폰을 살 수는 없었다. 기간 약정을 하고 OTT 무료 이용 등 딱히 필요는 없던 서비스를 큰 혜택처럼 받아들이고 고가 요금제나 부가 서비스를 수용하며 때론 신용카드까지 만들어 할인받아야 하는, 사인하고 돌아서면 기억도 못 할 약정을 끝도 없이 한 끝에 받아 들게 되는 그런 방식 말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MZ세대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이름마저 아주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이른바 ‘자급제폰’을 구입했다. 가장 기본적인 기능의 스마트폰을 사고 원하는 통신사를 선택해 유심칩을 끼우면 끝이었다. 더 주는 것도 없고 덜 주는 것도 없이 개통되었고 아빠에게는 다행히 좋은 선물이 되었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하나로 잇는 듯한 간단한 과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간의 스마트폰 구입이 내 마음의 갖가지 감정들을 복잡하게 건드려 왔구나 싶었다. 가능한 한 지출 없이 물건을 얻으려는 욕심, ‘호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불안, 높은 이익을 위해서는 편법이 불가피하다는 속물주의, 물건이 왜 이렇듯 저렴하게 심지어 공짜로 쥐어지는가는 알 바가 아닌 느슨한 아노미. 물건을 사고파는 과정 뒤에 숨은 이 복잡한 이해들은 사람의 방식이라기보다는 자본의 방식이었다, 이면의 이면의 이면을 만들어 사람에게서 최대한 많은 이익을 끌어내는. 나는 새해에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좀 더 ‘단순함’으로 채워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2023년의 마지막 날, 본가에 갔더니 이제 팔순을 넘기신 친척분께서 최근에 몇 년 뒤 당신이 중병에 걸린다 해도 이러한 경우 치료에 나서지 말라고 기준을 정하셨다고 했다. 어른은 돈을 통한 ‘나’의 연장보다 자기 육체와의 자연스러운 이별을 원하셨다. 단순해진다는 건 ‘나’와 내 ‘욕망’에만 머무는 폐쇄적 순환을 끊는 것이고 물질이든, 욕망이든, 심지어 생명의 영역조차 ‘부의 창출’로 삼는 자본의 방식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하게는 스마트폰 구입에서부터 크게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까지 많은 것이 이 단순한 용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니 2024년 갑진년, 모두 깊이 생각하지는 마시기를, 그러나 가장 ‘깊숙이’ 단순해지시기를 바란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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