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영화 '서울의 봄' 극중 인물들의 실제 삶은?

신동진 2024. 1. 2.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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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라디오 YTN]

■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방송일 : 2023년 12월 30일 (토요일)

■ 진행 : 최휘 아나운서

■ 대담 : 송영훈 뉴스톱 기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최휘 아나운서(이하 최휘)> 지난 한 주간 있었던 뉴스들 가운데 사실 확인이 필요한 뉴스를 팩트체크 해보는 시간입니다. 팩트체크 전문미디어 뉴스톱의 송영훈 팩트체커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송영훈 기자(이하 송영훈)> 네. 안녕하세요.

◇ 최휘> 오늘 첫 번째로 팩트체크해 볼 내용은 무엇인가요?

◆ 송영훈> 1979년 12·12 군사 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누적 관객 수 11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천만관객 영화는 물론 2023년 최고 흥행영화가 됐습니다. 44년 전 역사적 실화를 다룬 영화여서, 이 정도 흥행을 기록할 거라고는 대부분 예상을 못했기에 더욱 관심을 모았는데요.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이 국방부 브리핑에서 '서울의 봄'을 언급하며 "군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 가운데,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위한 소임을 다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고, 한 일본 네티즌이 SNS에 남긴 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한일 흥행영화를 비교한 글인데, "한국에서는 '서울의 봄' 같은 작품이 큰 인기를 끌며 상영 중인데, 일본에서는 시간여행을 한 여고생이 카미카제 특공대원이랑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영화가 인기가 많다. 한국과 차이가 너무 커서 괴롭다"는 내용입니다. 역사적 사실, 과거사에 관한 경각심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12.12 군사반란이 44년 전의 일이다보니, 현재 젊은 층에서는 이 영화를 보면서 당시 역사를 알아보는 계기가 됐다는 반응도 많았는데, 12.12 군사반란이 성공한 후 실제 인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살아갔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오늘은 당시 반란에 성공한 신군부 주요 인사들과 그들에게 맞섰던 핵심인물들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봤습니다.

◇ 최휘> 영화적 재미를 위해 일부 영화적인 설정을 넣은 장면이 있기는 했지만,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인만큼 궁금한 점이 많은 게 당연할 것 같기도 합니다. 일종의 영화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사실 확인'이 되겠군요.

◆ 송영훈> 네. 먼저 당시 군인의 본분을 지키며 반란군에 맞섰던 핵심 인물, 극중 주인공 격인 수도경비사령관, 육군참모총장, 특전사령관, 육군본부 헌병감 등은 오랜 세월 고통 속에 수모를 견뎌야 했습니다. 끝까지 반란에 저항한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은 이등병으로 강등된 뒤 아버지가 화병으로 숨지고, 외아들이 실종됐다 숨진 채 발견되는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강제 전역을 당한 뒤 1987년 11월, 기자회견을 열고 12.12 진상규명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88년 10월 실종됐고, 실종 139일째인 1989년 3월 4일 경기도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수사기관은 자살로 결론 내렸지만, 의문사라는 의혹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은 반란 이듬해인 1980년 예비역 준장으로 자진 예편한 뒤, 농사를 짓거나 섬에서 광어 양식업을 하는 등 한동안 거의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반란군인 신군부에 납치됐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역시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내란죄로 기소돼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2002년 6월 73세로 숨질 때까지 어떤 공직도 맡지 않은 채 조용히 여생을 보냈습니다. 영화 속 정해인 배우가 연기한 인물은 김오랑 당시 소령입니다. 정병주 전 사령관을 체포하려던 반란군에 맞서다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김오랑 소령의 양친은 막내아들의 비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홧병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졌고, 김 소령의 부인은 시력약화증을 앓고 있었는데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은 뒤, 1990년 12월 반란 주범들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 준비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6개월 뒤인 1991년 6월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실족사로 수사가 마무리되었는데, 떨어진 난간의 높이는 사람의 허리 정도였습니다.

◇ 최휘> 이후에도 영화 같은 스토리가 현실로 이어진 느낌이네요. 반란에 성공한 신군부 인사들은 나중에 법적 처벌을 받기는 했죠.

◆ 송영훈> 당시 끝까지 저항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12·12 반란 이후 10년이 지난 1993년 7월 19일 전두환을 포함한 반란주도자 34명을 검찰에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29일 검찰은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습니다. 이후 여론의 반발이 거세지자 국회에서 5·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고,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한 34명 중 16명이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황영시, 허화평, 이학봉,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 유학성, 허삼수, 최세창, 차규헌, 장세동, 박종규, 신윤희, 박준병입니다. 1996년 8월 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1심은 반란군 주역으로 이후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 6월을 선고했지만,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는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으로 형량이 줄었습니다. 또, 항소심 재판부는 황영시, 허화평, 이학봉에게 반란 중요임무 종사죄 등을 적용해 각각 징역 8년을, 그리고 정호용, 이희성, 주영복에게는 징역 7년을 각각 선고했습니다. 허삼수, 유학성에게는 징역 6년, 최세창에게는 징역 5년 그리고 차규헌, 장세동, 신윤희, 박종규에게는 각각 징역 3년6월이 선고되는 등 대부분 1심보다 낮은 형량이 선고됐습니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던 박준병을 제외하고, 유죄가 선고된 15명 중 14명이 감형을 받은 것입니다. 그나마, 최종적으로는 감형된 형량조차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정부는 특별사면을 통해 유죄를 받은 15명 전원을 사면했습니다. 앞서 진행된 유죄선고가 '사면을 위한 처벌'이었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 최휘> 이름을 들어보니 이 분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정부 고위직을 지냈던 분들이죠.

◆ 송영훈> 아시다시피 전두환, 노태우는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이외의 반란 가담자 중 6명이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대부분 장관, 공사 이사장 등의 고위직을 역임했습니다. 당시 보안사령부 비서실장이었던 허화평은 포항에서 14대-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1998년 설립된 미래한국재단 이사장직을 역임하고 올해 초까지도 도서를 집필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학봉은 청와대 민정수석, 안기부 2차장에 이어 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됐습니다. 2006년 한 신문 인터뷰에서 "난 반대 세력이 뭐라 해도 당당하다. 정승화 참모총장을 잡으러 간 것에 대해서 추호의 죄책감이 없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정호용은 1987년 국방부 장관을 맡은 데 이어 대구에서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이후 2004년부터 2012년까지 8년간 육군사관학교 발전 기금 이사장을 역임했습니다. 군사반란의 핵심인물이지만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반란 당시 육군 1군단장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황영시는 육군참모총장에 이어 1984년부터 4년간 감사원장을 두 차례 지냈습니다. 국방부 군수 차관보였던 유학성 중장은 중앙정보부장을 맡았고, 이후 전국구 의원으로 제12대, 경북 예천 지역구 의원으로 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최세창은 합동참모의장에 이어 국방부 장관을 맡았고, 이후 대한광업진흥공사, 대한태권도협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등에서 고위직을 역임하였습니다.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허삼수는 부산에서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한국문화연구원 이사장, 국제장애인협의회 이사장을 2004년까지 역임했습니다.

◇ 최휘> 정부 고위직은 물론 선출직이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원을 지낸 분들도 많군요.

◆ 송영훈> 네 그렇습니다. 이 밖에 이희성은 국방부 기획국장, 육군 참모차장 자리를 거쳐 국토교통부 장관과 한국 토지주택도시공사 이사장직을 역임했고, 반란 당시 수도군단장이었던 차규헌 중장은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 참모차장, 2군사령관을 지냈습니다. 전역 이후 비상기획위원장을 거쳐 국토교통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국방부 장관이었던 주영복은 이후에도 국방부 장관으로 1982년까지 재직 후 내무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다른 인물들도 정부와 군의 주요 요직을 역임했는데, 시간 관계상 여기까지로 정리하겠습니다.

◇ 최휘> 한 마디로 12.12 군사반란에 성공한 이들은 이후 정부 요직을 맡으며 부와 권력을 누렸고, 중간에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최종적으로는 모두 사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군요.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라는 극중 대사가 인상적인 이유로 보입니다.

YTN 신동진 (djshin@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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