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요가 선생 “아써너에 얽매이지 마라”
인도에서 만나 도반이 된 부부는 그곳에서 15년 동안 요가와 명상을 수련하고 2009년 한국에 돌아왔다. 지금은 실력 있는 요가 선생이자 명상 지도자로 자리잡았지만 처음 한국에 돌아와선 낯선 풍경에 당황하는 이방인 같았다. 한국에 널리 퍼진 대중 요가는 인도에서 본인들이 배운 요가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이동환, 이정수 두 사람은 자세의 정렬을 강조하는 하타요가의 세계적 거장 아엥가(1918~2014)에게 요가를 배우고 인도에서 불교 수행의 신기원을 연 고엥까(1924~2013)에게 명상을 사사했다. 2003년 고엥까 전통의 위빳사나를 지도하는 한국인 최초의 법사가 됐고 지금은 전북 진안에 있는 담마코리아 위빳사나 명상센터에서 지도하며 봉사한다. 고엥까위빳사나는 세계 140여 개 센터가 있고 고엥까의 법문을 따라 수행하는데, 한국어 버전은 이동환이 녹음했다.
평소 부부는 서울 마포구에서 요가 스튜디오 ‘조이 오브 요가’를 운영하며 몸의 회복과 순환을 돕는 ‘메디컬 요가’를 안내한다. 영화감독 박찬욱, 드라마작가 노희경이 이곳에서 요가를 배운다. 이동환, 이정수를 ‘고수’라 알아보고 가장 먼저 기사를 썼던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는 이들이 ‘얼치기 요기’들과 확연히 달랐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최근 만만치 않은 책을 발간했다. <요가 해부학>(이동환 지음), <요가 인문학>(이정수·이동환 지음, 각 판미동 펴냄)이다. 일반인이 이 책을 읽어내려면 부처가 살았던 시기 고대 인도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빠알리어(팔리어)에 대한 마음의 준비와 집요한 투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요가, 명상, 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수행 차원을 높이는 섬세하고도 결정적인 힌트를 만날 수 있다.
이동환이 홀로 쓴 <요가 해부학>은 골격계, 근육계, 호흡기계를 따라 요가의 해부학적 원리를 설명하고 생리학적 원리를 살펴본다. 고대 수행자들이 남긴 몸에 대한 이해와 현대 의학적 연구를 접목한 전례 없는 작업으로 ‘요가 해부학’이라는 장르를 수립한 책이라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집필한 <요가 인문학>은 저자들의 체험 위에 요가의 역사, 철학, 수행법의 정신 문화사적 이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요약하자면 이론부터 실제까지 담은 요가 교과서라는 얘긴데, 요가의 기본기는 물론이고 요가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고차원 수행법까지 망라한 실천적 가이드다. 이런 전문서 출간 자체가 얼어붙은 출판 환경에서는 상당한 도전이자 성과다. 저자들을 2023년 연말을 코앞에 두고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인도라는 맨땅에 헤딩한 ‘맨발의 청춘’
부부는 젊은 시절, 그야말로 가진 것 없는 ‘맨발의 청춘’으로 맨땅에 헤딩하듯 인도라는 땅에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가 공부했다. 빨리빨리 모든 것을 처리하는 한국과 달리 여유롭게 자기만의 시간으로 일을 진행하는 인도의 수행센터에서 두 사람은 뜻하지 않은 고행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스승의 눈 밖에 나지 않으면서도 한국에서 오는 성질 급한 수행자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져야 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인도는 수십 개 언어가 공존하는 땅이다. 소통의 기본 언어인 영어뿐 아니라 인도 고대어인 산스크리트어와 빠알리어를 공부해야 했고, 덕분에 힌두교와 불교도 깊게 파고들 수 있었다. 수행과 세속적인 공부를 동시에 한 셈이다. 이정수는 엄격하기로 소문난 뿌네대학 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동환은 10대 초반부터 태권도 선수로 활동하면서도 마음과 수행에 관심이 많아 뿌네대학에서 철학과 고대언어, 초기불교, 현상학 등을 공부했다. 그런데 왜 인도였을까.
―인도에 어떤 계기로 갔나?
이정수(이하 정): 그때가 31살이었다. 당시 정신세계사에서 오쇼 라즈니시 책을 많이 번역했다. 그런 책을 읽다가 막연히 인도에 가면 성자를 볼 수 있나보다 했다. 대구에 살면서 요가 수련은 이미 하고 있었다. 내면에서 요가를 수련해야겠다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거기에 귀 기울였다.
이동환(이하 동): 7대째 이어진 천주교 집안이다. 정약용의 부인도, 김대건 신부의 복사도 우리 집안 조상이고 순교하신 어른도 있다. 한국 가톨릭 역사를 정리하던 어느 신부님이 ‘자부심을 가지라’고 할 정도로 천주교사 곳곳에 우리 조상들이 있다고 들었다.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목숨을 거는 문제였는데 우리 조상이 좀 거침없었구나 싶다. 내 핏속에도 그런 기질이 흐른다고 생각하는데 나 역시 요가의 근본을 알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영적 세계에 관심 있었고 신학교(가톨릭대)에 다녔지만 방황하다가 1년 만에 뛰쳐나왔다. 한국에도 스승이 있었지만 숨이 여기(가슴팍을 가리키며)까지 차서 이곳에선 못 견딜 것 같았다. 항상 허기진 거지 같은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자학으로 밥이 안 넘어갔다. 그래서 인도로 떠나 요가를 시작했다.
―두 분은 아엥가 요가센터에서 처음 만났나.
동: 그렇다. 한국인이 많지 않을 때였다. 그런데 센터에서 한국인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다. 한국인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많이 쌓여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이 한국인의 얼굴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성실함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기로 마음먹었다.
―몸의 회복과 정화를 돕는 메디컬 요가를 주로 지도하는데, 어떻게 배우게 됐나.
정: 일반적인 요가를 할 때마다 채워지지 않는 뭔가 있었다. 내 경우엔 사지가 길지 않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웃음) 동작 수련을 할 때는 육체적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고, 리메디얼 요가(메디컬 요가)를 꼭 배워서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타협 없는 요가 책
―책은 어떻게 내게 됐나.
정: 한국에 와서 대학에서 요가학 개론을 강의하게 됐는데 적당한 교재가 없었다. 강의 준비 자료가 이 책의 초고가 됐다. 뿌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부터 이런 구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현대 요가는 대부분이 몸을 다루는 하타요가인데 어떤 맥락에서 이런 아써너(asana, 자세·동작)를 하는지 등을 잡아줘야만 요가가 가진 특징과 차별점이 드러나겠구나 생각했다.
―독자가 “타협 없이 쓴 책”이라 평가하더라. 어렵다는 소리다.
동: 산스크리트어를 써서 진입장벽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감행하는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선 산스크리트어 용어 표기조차 통일이 안 돼 있고, 번역도 엉망이었다. ‘냐너 요가’(jñāna yoga)를 영어로 ‘날리지 요가’(knowledge yoga)라 일컫는다 하여 무턱대고 ‘지식의 요가’라고 번역하는 식이다. 한국에서 ‘즈냐나 요가’라고 알려진 이 요가는 발음도 ‘냐너’라고 하고 ‘지혜의 요가’ 또는 ‘앎의 요가’라고 옮겨야 맞는다. 산스크리트어는 어렵지만 일관되게 책에 적용해놓았으니 읽다보면 그만한 보상이 있으리라 믿는다.
두 사람이 수련한 하타요가는 영혼이 머무는 신전인 몸을 정화하는 수련으로, 몸을 통해 마음을 이해하고 의식을 계발하는 방법이다. 힘들고 낯선 자세를 하면서 호흡하고 내부를 통해 몸의 통증과 마음의 고통을 바라본다. 생리적·심리적 정화와 건강을 개선하는 단련법이다. 마음은 왜 이리 멀리 달아나는가, 인간은 이리도 정신이 산란한 동물인가. 번뇌와 괴로움은 총량이 없는 운명처럼 다가온다. 수행 단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수행하면서 마음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세계를 파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상할 정도다.
두 사람은 요가의 목적이 마음 작용의 소멸에 있다고 설명했다. 요가는 대상에 집중해 마음 작용을 정지시키는 방법이다. 마음을 집중한 상태에서 지혜가 생긴다는 원리다. 이에 견줘 불교 명상은 지(samatha, 싸마타)와 관(vipassanā, 위빳사나)의 균형을 추구한다. 고요한 평정 상태의 싸마타만으로는 열반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불교 명상 원리를 보면, 탐욕스럽고 증오와 노여움을 갖고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탐진치’ 삼독으로 일어나는 괴로움의 뿌리는 위빳사나의 힘으로 소멸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돼 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요가와 명상은 다른 것 같다.
동: 우리가 인도에 갔던 초기엔 이론도 체험도 부족해서 요가를 정신수행이라 알고 갔다. 그런데 처음 만난 날 아엥가 선생님은 “나는 명상을 지도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육체적 단련과 호흡을 통해 명상 단계로 이끈다는 거였다. 아엥가 선생님은 정말 섬세하게 몸을 터치하고, 일반 의식상태에서는 알 수 없는 부분까지 조심스럽게 아써너와 쁘라나야마(pranayama, 호흡법)를 가르쳤다. 요가로 환자들을 치유했다.
정: 아엥가 선생님은 의식세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요가를 지도할 때 ‘인텔리전트하게’라는 표현을 많이 썼는데 처음엔 그게 와닿지 않았다. 동작이나 호흡을 지적으로 이해한다는 게 아니라 수련할 때 ‘섬세한 몸으로 드러나는 자립적인 지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알듯 말듯 하다. 관성적으로 아써너나 호흡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동: 우리가 2009년 귀국하고 보니 예쁜 요가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사진을 찍으면서 요가라고 생각하더라. 너무 맹목적으로 요가를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자세나 동작에 함몰돼 그게 목표가 되니까. 흔히 ‘아써너의 노예’라고 표현한다. 동작을 완성한다고 그것이 마음으로 이어진다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과정을 깨어 있는 의식으로 바라보라
두 사람은 상징적 자세나 동작만으로 실상을 바라볼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한다. 짜끄러(chakra, 생리학적으로 신비한 역할을 하는 통로가 모인 신경총), 꾼덜리니(Kuṇḍalini, 근원적 에너지) 등도 현대 의학 지식이 없던 중세 인도인이 인체를 이해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의 일환이라고 담담하게 정리한다. 하지만 동작을 하면서 짜끄러나 꾼덜리니 각성을 최고 경지로 알고 지내온 요가 수행자도 적지 않다.
―동작은 중요한 게 아닌가.
동: 아써너라는 단어 자체가 명상하기 위해 안정적으로 앉는 좌법을 가리킨다. 아써너 수련은 몸의 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모든 과정을 깨어 있는 의식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끄리슈너무르띠(크리슈나무르티, 1895~1986)는 매일 한두 시간씩 요가를 하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아써너에 함몰되지 말라고 얘기했다. 승화시켜 포장하거나 어떤 종파처럼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아써너 수련이 영적 여행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어도 자세 자체는 목적이 아니다. 자각, 자기성찰은 생활과 일치되고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며 분리돼선 안 된다.
―그렇다면 현대에서 요가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동: 디지털 사회의 현대인은 머리를 쓰지만 운동량은 너무나 적기 때문에 요가는 여전히 중요하고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거다. 요가에서 버릴 수 없는 단 한 가지 기능이 있다면 건강 증진과 치유, 회복이다. 최근 고등학생에게 요가를 지도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명상한다고 앉으면 20분을 못 넘긴다. 좌식생활에 익숙지 않아 꿇어앉는 것도 할 수 없다. 몇 시간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힘, 버티는 힘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오뚝이처럼 아래로 중심이 잡혀 있어야 한다.
―여성이 요가를 운동으로 많이 선택하는데.
정: 단순한 동작이지만 요가를 하면 스트레스받았던 몸이 이완되고 호르몬 분비의 균형을 잡을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섬세하게 지켜보기 때문에 정적인 동작 속에서 의식을 각성하고 중심을 잡거나 힘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된다. 등산이나 테니스 같은 운동을 해도 똑같은 현상을 만날 수 있지만 그렇게 하기까지 엄청난 육체적 에너지 소모가 있어야 한다. 요가는 그렇게 혹독하게 육체적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몸의 순환을 일으킬 수 있다. 숙달되면 의식적인 노력만으로 단시간 안에 가능해진다.
현상에 자꾸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
아엥가는 세계적 영성가 끄리슈너무르띠를 만나 어려운 요가 동작을 보여줬다. 그러자 끄리슈너무르띠는 “유 아 프로페셔널”(당신은 프로군요)이라고 말했다. 칭찬일 수도, 세속적이라는 비난일 수도 있었다. 끄리슈너무르띠는 마음으로 직입하면 된다고 보는 관점을 가졌고, 아엥가는 명상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엥가는 자신이 결코 돈과 명예를 좇은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끄리슈너무르띠의 호흡을 수정해줬다. 이후 끄리슈너무르띠도 아엥가에게 요가를 지도받으며 아엥가를 인정했다. 마음과 몸을 다루는 이슈를 둘러싼 대가들의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건 무엇인가.
동: 영적으로 깨어 있음을 뜻한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피부 한 껍질을 경계로 내부 우주와 외부 우주가 만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 사이에 벌어지는 현상을 지켜보고 목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예수님이 기도하러 가면서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신 말씀도 잠들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관건은 무의식에 뿌리 깊게 쌓인 축적물을 비우고 마음을 조건 짓는 일정한 틀, 쌍스까러(samskara)를 해체하는 일이다. 도교에는 ‘삼시충’(몸 안의 세 마리 벌레, 탐진치라고도 한다)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쌍스까러와 비슷한 말이다. 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이 맑아지고 섬세해져야 한다.
―‘달마 캔디’라고 하던데, 명상하다가 어떤 현상을 만나고 신비주의에 매몰되는 사람도 있지 않나.
동: 2003년 한국인 최초로 고엥까 전통의 위빳사나 지도법사로 임명받은 뒤 지금까지 명상을 지도하면서 무수한 사람의 ‘경험’을 만났다. ‘꾼덜리니가 각성된 것 같다’ ‘내가 깨달음을 성취한 것 같다’는 등이다. 남들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그런 현상에 자꾸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환상에 빠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서 모든 스승이 경계하는 일이다. 착각하고 엉뚱한 길로 빠져들어 폐해가 더 많다는 거다. 그 경지는 남들에게 과시할 내용도 아니고, 자기가 알고 나면 그저 그 길로 가면 된다. 조금 전에도 삼시충 얘기를 했지만, 그것은 이야깃거리일 뿐 궁극의 깨달음은 그 너머에 있다.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정: 우리는 사회에 기여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우리의 저술은 그동안 배운 것을 타인과 사회로 돌리는 회향 작업이었다. 일선 요가 지도자들에게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됐으면 좋겠고 우리 또한 앞으로 좋은 계기와 인연을 만나길 기원한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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