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대 대법원장 ‘한국형 디스커버리’ 추진 시사

이종민 2024. 1. 2.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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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장 “증거수집제도 개선”
조건부 구속영장제 도입 검토
개인이 기업 상대 소송시 ‘증거 확보’ 보장
분쟁 초기 정확한 증거조사 가능
재판 중 결정적 증거 공개 방지
화해 권고 등 통해 효율적 해결
조희대, 신속한 재판 의지 피력

조희대 대법원장이 “증거수집제도를 개선하겠다”면서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증거개시 제도) 추진 방침을 시사했다. 또 “구속과 압수수색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재차 밝혔다. 조 대법원장이 영장제도와 함께 민사소송 절차를 개편해 재판 지연의 해소를 이뤄낼지 주목된다.

조 대법원장은 2일 대법원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신체의 자유’ 등을 보장한 헌법 원칙을 언급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과 실체적 진실 발견을 조화롭게 구현하겠다”면서 “증거의 구조적 불균형이 불공정한 재판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증거수집제도’를 개선해 반칙과 거짓이 용납되지 않는 법정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2024 시무식에서 시무식사를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11일 취임한 조 대법원장은 인사청문 절차에서부터 구속제도를 개선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다. 대법원은 조 대법원장의 지시에 따라 조건부 구속영장제의 도입을 구체적으로 검토 중이다. 조건부 구속영장제는 피의자에게 영장을 발부하되 거주지 제한 등의 조건을 달아 석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조건을 위반하면 피의자를 구금할 수 있는데, 재판 중인 구속 피고인을 석방하는 보석 제도와 유사하다.

법원은 이를 통해 무죄추정과 불구속 수사·재판의 원칙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조 대법원장은 후보자 시절 관련 서면질의에 대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하되 전자장치 부착, 피해자 접근금지, 의료기관 치료·입원 등 조건을 부과할 수 있게 된다면,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하는 동시에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 방지도 효과적으로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조 대법원장은 형사재판뿐 아니라 민사재판 절차에도 개혁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법조계에서는 특히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이는 재판 개시 전에 당사자가 서로 가진 증거와 서류를 상호 공개해 쟁점을 명확히 하고, 전문가 현장조사를 통한 증거를 공유하도록 하는 제도다.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경우 기업이 가진 방대한 자료에 접근할 수 없어 불리하다는 점에서 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대두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2024년도 대법원 시무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권영준, 오석준, 천대엽, 김상환, 이동원 대법관, 조 대법원장, 김선수, 조정희, 이흥구, 오경미, 서경환 대법관. 뉴스1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은 사법부 최우선 과제로 꼽히는 재판 지연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디스커버리 제도를 통해 분쟁 초기 단계에서 정확한 증거조사를 할 수 있고, 화해 권고 등을 통해 분쟁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영미법계 국가에서 일찍부터 도입됐다. 미국은 변론 절차 전 쌍방 당사자가 법원의 관여 없이 증인을 신문하는 ‘진술녹취’ 등을 증거조사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영국과 호주, 캐나다 등에서도 미국과 유사한 제도를 운영 중이다.

조 대법원장도 인사청문 서면 답변에서 대법원 디스커버리 연구반이 제안한 민사소송법 개정안에 공감을 표하며 “이런 사항이 입법화될 경우 실체적 정의에 부합하는 소송 결과를 도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법관과 교수,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연구반은 지난해 △소송당사자의 자료보존의무 부과 △제출명령 위반에 대한 제재 강화 △제출문서 유출 방지 위한 비밀유지명령제도 등을 제안한 바 있다.

부장판사 출신인 허경호 변호사(법무법인 로백스)는 “현행 민사 절차로는 소송당사자가 증거를 수집하는 데 구조적 어려움이 있다”면서 “디스커버리 제도가 충실한 재판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사전에 쟁점이 명확하게 드러나 신속한 재판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진우 변호사(법무법인 주원)도 “증거를 하나의 패로 숨겨 두다가 재판 중 갑자기 공개하는 경우가 많다”며 “(제도 도입으로) 재판에서 무의미한 절차가 진행되는 걸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전주지법 설민수 부장판사는 최근 법원 내부 게시판(코트넷)에 올린 ‘재판 지연 이슈와 제도론’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미국은 20세기 중반 제도 혁신을 통해 사건을 외부로 전환했다. 한국에서 논의되는 디스커버리 제도도 외주화의 일환”이라며 디스커버리 제도를 언급한 바 있다. 이영창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지난달 4일 대법원에서 열린 ‘재판 장기화와 그 해법’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에서 디스커버리 제도를 재판 신속화 방안 중 하나로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모습. 연합뉴스
현재 국회에도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민사소송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디스커버리 제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진술녹취 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 국민의힘 최재형 의원의 개정안,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의 실효성을 강화하는 내용 등을 담은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의 개정안 등이다. 그러나 국회의 관심 부족으로 관련 논의에 진전이 없는 상태다.

조 대법원장은 이날 재판 지연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를 재차 피력했다. 그는 법원 구성원을 향해 “가능한 한 신속하게 첫 기일을 지정하고 당사자와 함께 사안에 맞는 사건 처리 계획을 실천함으로써 절차에 대한 예측 가능성과 신뢰를 높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법원장이 중심이 돼 장기 미제 사건 처리 역량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각급 법원의 실정에 맞는 사무 분담 장기화를 통해 심리의 단절과 중복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론 신속히 첫 기일을 지정하고 변론 종결부터 판결 선고까지 늘어지지 않도록 할 것, 쟁점이 많지 않은 사안은 판결서를 간이로 작성할 것을 주문했다.

이종민·안경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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