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칼럼] 대통령이라는 자리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윤석열 정부처럼 스스로 국가 기강을 어지럽히고 국정운영을 엉망으로 하는 정권은 경험하지 못했다. 엄연한 삼권분립 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이 집권여당을 떡 주무르듯 농단하는 뉴스가 넘쳐나고, 국회의원 선거 차출을 위해 3개월짜리 장관, 6개월짜리 차관이 양산되고 있다. 곳곳에서 부실한 국정운영으로 국민의 삶이 각박해지고 나라가 어려움에 빠지고 있다.
상투적인 비난이 아니다. 최근 외교안보 분야 뉴스만 봐도 그 예가 차고 넘친다. ‘박빙 승부와 역전승’을 예고하며 국민 기대를 부풀려 놓고 ‘29 대 119’라는 외교적 참변으로 끝난 엑스포 부산 유치 작전, 정보부서 책임자급 간부 대부분을 대기·교육·지원 근무 등 형식을 통해 떠돌이 신세를 만들어 놓고 주야장천 권력투쟁에 몰두한 국가정보원 수뇌부, 항일 독립영웅 홍범도 장군을 욕보이더니 끝내 영토 보존의 신성한 의무마저 망각하고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표현한 얼빠진 국방부, 마치 거친 상대방을 다루는 특별한 비방이나 있는 듯이 한껏 목청을 높이고 힘을 과시했으나 결과적으로 ‘언제 물리적 충돌이 발생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린 남북관계! 이러고도 나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이런 난맥상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 윤 대통령이 대한민국 공동체의 보편적 이익이 아니라 특정한 정파적 이익을 ‘정의’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게 크다고 본다. 정작 자신이 검찰 정권으로 상징되는 ‘용산 카르텔’을 꾸려 나라를 위험하게 만들면서도 툭하면 “자기들만의 이권과 이념에 기반을 둔 패거리”라며 이러저러한 ‘카르텔 척결’을 주창하는 정신세계를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윤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한다. 대선 후보 시절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한 노 대통령을 회상하며 “고뇌와 결단을 가슴에 새긴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그래서 노 대통령을 보좌했던 참모로서 대통령의 고뇌와 결단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에게 비친 노 대통령의 고뇌는 ‘내 생각이나 기질 혹은 내 개인의 이익이 국익과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결단은 이때 자신을 버리고 국익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2003년 9월 노 대통령은 허버드 주한 미국대사와의 대화에서 이라크 추가 파병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 “나를 지지하는 대부분 사람은 파병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약 파병하기로 하면, 이 중 절반 정도가 나에 대한 지지를 이 이유만으로 철회할 것입니다. 나머지 절반가량은 나를 위해 ‘파병 반대’를 철회할 것입니다. 또 지금 파병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치적으로 나의 반대자들입니다.”
이처럼 노 대통령은 지지자의 절반을 잃을 줄 알면서도 추가 파병을 결정하였다. 한국 경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대통령이 결단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때도 그는 많은 지지자를 잃었다. 시간이 흘러 역사는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안 내고, 원래의 대국민 약속대로 이라크 평화 재건을 도왔으며, 한·미 FTA는 급변하는 국제 경제 환경 속에서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일들이 누적되면서 노무현 정부는 낮은 국정 지지율을 면하지 못했다.
노무현에게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어떤 것이었기에 이런 ‘고뇌에 찬 결단’을 했을까? 나는 2003년 어버이날에 노 대통령이 쓴 ‘국민에게 드리는 편지’ 속에서 그 답을 찾는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힘있는 국민의 목소리보다 힘없는 국민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체질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할 때는 그 누구에게 혹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 수 없습니다. 중심을 잡고 오직 국익에 의해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심을 잃는 순간 이 나라는 집단과 집단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통치는 다릅니다. (중략) 저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국익이라는 중심을 잡고 흔들림 없이 가겠습니다.”
이처럼 국익을 위해 자신을 버렸기에 많은 국민이 지금 노무현 전 대통령을 국민 전체를 대표하여 나라를 이끈 통치자로 기억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이런 말을 귓등으로도 들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반대파가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주장한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당파적 이해를 관철하고자 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대표하여 나라를 이끄는 통치자의 자리다. 대한민국 공동체를 포용하는 눈으로 봐야 참된 국익이 보인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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