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준법·중대재해법 없는 기업 해방구라니… [하종강 칼럼]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백화점에 노조를 설립했다고 연락이 왔다. ‘생산직 노동자가 진짜 노동자’라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시기여서 조금 심드렁한 마음으로 갔다. 백화점 매장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노동자들에게 질문부터 했다.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달라진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노동조합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묻는 나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역시 아무도 답이 없다. “답하지 않으면, 저도 그냥 가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건방을 떨며 다그치자 맨 뒷자리에 있던 여성이 일어나 말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일합니다.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에는 온종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려도 나에게 인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노동조합을 설립한 뒤 나한테 인사하는 사람이 생기더군요. 노동조합을 만든 뒤부터 나는 인사를 받게 됐습니다.”
내가 그 말을 받았다. “그것이 바로 노동조합입니다. 노동자를 비로소 사람답게 보이게 해서 인간 대접받도록 하는 것, 우리가 지금 돈이나 몇푼 더 받자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한껏 목소리를 높이다가 목이 콱 메었다. 그동안 갖고 있었던 부끄러운 편견에 대한 반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35년 전 일이다.
금속 사업장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설립했다. 다음날 점심시간 식당에서 설립 보고대회를 열었다. 노조위원장이 식탁 위에 올라가 일장 연설하고 가입원서를 받았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을 때, 아무도 뛰어가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설립한 뒤, 그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작업장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18년 전 일이다.
보험회사 콜센터 노동자 대표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누군가 말한다. “요즘 화장실 앞에 줄을 서요.” 나는 화장실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아직도 그렇군요”라고 대꾸했다.
그이가 다시 말했다. “그게 아니라, 노동조합 만들기 전에는 할당된 콜 수를 채우기 위해 화장실 가고 싶어도 꾹 참고 일해야 해서…. 사람은 100명이나 되고 화장실은 두칸밖에 없는데도 화장실 앞에 줄이 없었어요.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한 뒤부터 화장실 정도는 갈 수 있게 돼서 이제 화장실 앞에 줄 서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콜센터 노동자 중에는 방광염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2023년 12월 일이다. 우리 사회 어려운 노동자들의 처지는 세월이 흘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노동 현실에 대해 강의를 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이주노동자를 돕는 일을 오래 해온 활동가가 묻는다. “좋은 강의 잘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주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책을 갖고 있습니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 강의 속에 이주노동자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특수교육 분야 석학으로 알려진 미국 대학교수가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미래 사회 노동의 전망을 듣고 싶다고 했다. 두시간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가 주로 설명했고 그 교수는 묵묵히 들었다. 대화가 끝날 무렵 그 교수가 말했다.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 노동자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고 있나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 장황한 설명 속에 장애인 노동자에 관한 내용은 한마디도 없었으니까.
우리가 개선해야 할 노동 문제는 이토록 쌓여 있다. 인류 역사 어느 시기에서도 노동하는 사람의 권리를 확대하는 것은 사회가 발전하는 방향이었다. 노동 조건을 후퇴시키는 조처는 사회 발전의 저해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혹독했던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당시 기업을 살리기 위해 노동자의 권리를 잠시 유보했던 각종 정책은 결국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만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초래했고, 대한민국을 ‘최저 출생률’과 ‘최고 자살률’의 나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가 지난해 11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정한 ‘기회발전특구’에서는 근로기준법이나 중대재해처벌법의 주요 조항들을 적용하지 않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지역균형투자촉진특별법’을 통과시켰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자본가들에게 우리나라 곳곳에 헌법의 노동권을 무력화하는 일종의 ‘해방구’를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회 회의록에 따르면 이 특별법이 산자위에서 논의되는 동안 문제제기한 의원은 여야를 막론하고 단 한명도 없었고, 고용노동부는 법안이 산자위를 통과할 때까지 사정을 몰랐다고 한다.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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