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문해력’이 필요한 시대
기만과 속임수는 정치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정치가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면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시민이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분별하는 판단력을 키워 거짓을 알아보고 걷어내야 한다. 정치가 정치답게 되는 것은 가짜와 진짜를 가르는 시민의 판단 능력에 달려 있다.
20세기 현대미술의 흐름에 가장 큰 충격을 안긴 작품으로 마르셀 뒤샹의 ‘샘’이 꼽힌다. 1917년 뒤샹은 공중화장실에서 흔히 보이는 소변기를 구입해 간단한 서명을 넣어 전시장에 세워놓고는 미술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샘’의 출현은 ‘미학적 쿠데타’였다. 기성품을 가져다 놓고 작품이라고 해도 되는가? 이건 사기 아닌가?
프랑스 철학자 미셸 옹프레는 ‘예술의 이유’라는 책에서 똑같은 물음을 던진다. 옹프레는 뒤샹의 체스놀이 친구였던 화가 발레리오 아다미가 해준 이야기를 전한다. 어느 날 아다미가 체스를 두다가 뒤샹에게 그 ‘샘’이 속임수였는지 아니면 깊은 미학적 숙고 끝에 나온 작품인지 물었다. 뒤샹은 체스를 두다 말고 몸을 일으키더니 아무 말 없이 체스판을 떠나버렸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다시 보지 못했다. 뒤샹의 침묵은 무얼 의미하는가? 사기라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인가?
진실이 무엇이든 뒤샹의 쿠데타는 성공해 ‘개념 미술’의 시대를 열었다. ‘사물의 공들인 재현’ 같은 앞 시대의 미적 기준은 폐기되고 미술가가 오브제에 어떤 개념을 집어넣느냐가 작품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이 됐다. 그러나 개념 미술의 시대에는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기에, 전시된 작품이 사기인지 예술인지 판별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 또 그럴수록 가짜 예술이 범람할 위험도 커진다. 어떤 작품이 예술작품으로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보는 대중의 감식안, 곧 판단력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미학적 판단이 정치적 판단과 유사하다고 주장한 사람이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다. 아렌트는 대표작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ur), ‘작업’(work), ‘행위’(action)로 나누어 살핀 바 있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이 세 활동은 어떻게 다른가?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를 떠올려 보자. ‘노동’은 인간의 생계에 꼭 필요한 활동을 가리킨다. 무인도에 떨어져 혼자 살아가야 하는 크루소는 수렵과 채취로 배고픔을 달래고 염소를 잡아 가축으로 기르기도 한다.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이런 활동이 노동이다. 그러나 노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비를 피하고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집도 필요하다. 무인도를 탈출하려면 배도 만들어야 한다. 외로움에 시달리는 크루소에게는 놀이 도구도 필요하다. 이렇게 내구성이 있는 삶의 도구를 제작하는 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작업’이다.
마지막으로 ‘행위’는 말을 통해 개성을 드러내는 활동을 뜻한다. 아렌트가 특히 주목하는 행위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타인을 설득하는 정치적 행위다. 이런 행위는 복수의 인간을 전제로 한다. 크루소는 식인부족에게 잡힌 원주민을 구출해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하인으로 삼는다. 이렇게 두 사람이 모였으니 정치적 행위가 등장하는가? 그렇지 않다. 정치적 행위가 성립하려면 프라이데이가 크루소와 동등한 사람이 돼야 한다. 인격적 동등성이 보장될 때에야 비로소 정치적 행위가 나올 수 있다. 이런 동등성의 지평 위에서 두 사람은 당면한 관심사, 이를테면 무인도를 기웃거리는 이웃 식인부족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놓고 토론할 수 있다.
아렌트의 정치철학이 밝히려 하는 것이 바로 이 행위의 영역이다. 정치적 행위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개성과 인격을 드러내고 공동의 관심사를 놓고 말로써 상대를 설득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한다. 이것이 아렌트가 생각하는 정치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자유로운 시민들이 아고라에 모여 정치적 쟁점을 두고 저마다 격론을 벌이던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가 아렌트가 생각한 정치의 본령이었다.
아렌트 정치철학에서 독특한 것은 이 정치 영역에서 ‘진리’를 배제한다는 사실이다. 정치는 진리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의견들이 경합하는 장이다. 이때 아렌트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진리는 플라톤적 진리, 곧 ‘불변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라는 진리다. 이데아라는 영원한 진리를 통찰한 철인왕이 다스리는 곳에서는 시민 각자의 불완전한 판단과 의견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진리가 통치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진리 통치는 구성원 각자의 개성이 말살되는 전체주의를 부를 수밖에 없다고 아렌트는 생각한다. 정치가 꽃피려면 이런 초월적 진리, 절대적 진리가 정치를 좌우해서는 안 된다. 플라톤이 정치에서 ‘의견’을 추방한 사람이라면, 아렌트는 정치에서 ‘진리’를 추방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같은 명제는 어떨까? 이런 명제는 오늘날의 정치에서 일종의 진리 명제로 통용된다. 아렌트의 논리대로라면 이런 명제도 정치의 장에서 추방당해야 할까? 그러나 이 명제는 수학적 명제처럼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명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끊임없이 검증하고 확인해야 할 명제다. 정치란 이 명제를 온전히 구현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구나 현실의 수많은 정치적 쟁점을 보면, 인간의 평등성과 존엄성을 구현하는 방법과 절차에 관한 것인 경우가 많다. 세금을 거두어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부터가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보편적으로 구현할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에 닿아 있다. 우리 삶을 관통하는 이런 진리 명제들이 의견의 형태로 정치의 장에 들어와 논쟁과 설득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야말로 아렌트식 정치다.
더 생각해 볼 것은 진리(truth)와 가족 유사성 관계에 있는 진실성(truthfulness)의 문제다. 진실성이란 ‘거짓 없이 진실에 충실함’이다. 그렇다면 이런 진실성도 초월적 진리를 추방하듯이 정치의 장에서 추방해야 할까? 당연히 아렌트는 이런 생각에 반대한다. 정치 행위의 진실성은 정치가 정치다워지는 데 토대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거짓으로 시민을 속이면, 정치적 의견이 오염되고 토론이 왜곡된다. 기만과 속임수는 정치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정치가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면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시민이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분별하는 판단력을 키워 거짓을 걷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정치가 정치답게 되는 것은 가짜와 진짜를 가르는 시민의 판단 능력에 달려 있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를 지탱한 기둥 가운데 하나로 거명되는 것이 ‘도편추방제’(ostracism)다. 참주가 될 위험이 있는 정치인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 10년 동안 못 돌아오게 하는 제도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시민들은 한해에 한번씩 도편추방을 실시할 것인지를 투표로 결정했다. 도편추방이 결정되면, 깨진 도자기 조각(ostrakon)에 정치인의 이름을 적어냈다. 그중 다수표를 받은 자가 추방당했다. 이 도편추방제에 걸려 아테네 밖으로 쫓겨난 정치인 가운데 아리스테이데스(기원전 520~468)라는 사람이 있다. 아리스테이데스는 누구든 공평하게 대했기 때문에 ‘공정한 사람’이라고 불렸다. 기원전 477년 델로스동맹이 결성됐을 때도 공납금을 공정하게 분배해 찬사를 받았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은 델로스동맹 이전에 일어난 아리스테이데스의 도편추방 일화를 이렇게 전한다. 투표일에 시골에서 온 사람이 아리스테이데스에게 다가가 도자기 조각을 내밀며 이름을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누구 이름을 적어 넣을지 묻자 시골 사람은 ‘아리스테이데스’라고 말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도자기 조각에 자기 이름을 적어넣고는 물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습니까?” 시골 사람이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게 아니고, 만나는 사람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공정하다고들 하니까 지겨워서 그럽니다.”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아리스테이데스는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가 침략하자 시민들의 부름을 받고 2년 만에 돌아와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일화는 아테네 민주주의가 얼마나 철저하게 민주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등장한다. 동시에 이 일화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약점도 보여준다. 도편추방제는 경쟁하는 유력 정치인을 몰아내는 수단으로 쓰였고 나중에는 정치적 담합의 도구가 돼 아테네 민주주의의 뿌리를 갉아먹었다. 아리스테이데스 추방에 찬성한 그 시골 사람은 문자적 문맹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문맹이기도 했다. 고대 아테네 역사가 보여주듯이 민주주의는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다.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정치적 문해력이 없다면, 아무리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더라도 민주주의는 튼튼해지지 않는다. 의견이라는 이름으로 맹목이 번성하면 민주주의는 말라 죽는다.
고명섭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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