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안부를 묻는 마음

2024. 1. 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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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까지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사람들 머리 위로 눈이 수북해 누가 얼마나 오래 눈 속에 있었는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너무 무거운 눈송이들은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를 내며 쌓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다.

눈이 아주 많이 오잖냐, 이런 날은 곤란한 일들이 자꾸 생긴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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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까지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폭설주의보에 걸맞게 쏟아지는 눈의 무게와 속도감이 남달랐다. 바람이 적어 눈은 조금도 흩어지지 않고 떨어진 자리에 고스란히 쌓였다. 사람들 머리 위로 눈이 수북해 누가 얼마나 오래 눈 속에 있었는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마을버스 안에서 얼어붙은 도로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구경했다. 너무 무거운 눈송이들은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를 내며 쌓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다.

버스가 재래시장 앞에 멈춰 섰을 때였다. 온몸이 눈투성이인 중년 남자가 버스에 오르자마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왜 배차 간격을 지키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남자는 운전석 옆에 버티고 서서 몸에 붙은 눈들을 거칠게 털었다. 중간에 버스 한 대가 고장으로 멈추는 바람에 늦어졌다는 버스기사의 대답을 무시한 채 남자는 줄곧 거친 말들을 토해냈다. 남자는 차가 너무 흔들려 멀미가 난다고, 히터 온도가 너무 높다고, 신호가 떨어졌는데 왜 더 빨리 출발하지 않느냐고 트집을 잡았다.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룸미러를 훔쳐보았다. 버스기사가 점점 사납게 차를 몰기 시작한 탓이었다. 전조등이 거리를 훑을 때마다 도로 위 얼음막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바퀴가 헛돌거나 미끄러지는 차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도 두 사람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나는 허리를 곧게 편 뒤 앞에 설치된 바를 양손으로 꽉 잡았다. 버스 안의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사정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숫제 발까지 굴러대며 화를 내더니 종점까지 서너 정류장 남았을까 싶던 차에 불쑥 앞문으로 하차해버렸다. 버스기사가 남자의 뒷모습을 기가 막힌 얼굴로 바라보았다.

버스 안은 고요해졌다. 귀를 기울이면 버스 위로 툭툭, 눈이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버스기사가 이어폰을 만지더니 그래, 나야, 하고 말했다. 누군가 전화를 걸어온 모양이었다. 그는 잠자코 이야기를 듣다 불쑥 이렇게 물었다. 너는 별일 없고? 하차 벨이 울리자 뒤를 힐끔 바라본 기사가 말을 이었다. 눈이 아주 많이 오잖냐, 이런 날은 곤란한 일들이 자꾸 생긴단 말이지. 너는 괜찮지? 별일 없지?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 버스기사가 낮게 웃었다. 그래, 괜찮으면 됐다. 다 좋다.

종점에 다다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했으나 작은 목소리였으므로 운전석까지 가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인도에 쌓인 눈은 사람들 발자국 모양대로 다져져 단단하고 미끄러웠다. 넓적하게 뭉개진 눈자국이 몇 개 눈에 띄었다. 넘어지면서 손으로 짚었는지 뭉개진 자국 옆에 손가락 모양이 선명했다. 누군가 옆에서 괜찮냐고 물어주었을까. 몸을 부축해 일으켜주었을까. 주변에 부산하게 찍힌 발자국들을 가늠하며 나는 버스기사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상대방에게 자꾸만 안부를 묻던 목소리와 축 처진 입매 같은 것을. 그제야 내 마음을 쿡쿡 찔러대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깨달았다. 말갛게 얼어붙은 죄책감을 손에 쥐고 나는 뒤늦게 내가 했어야 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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