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바둑 하러왔다" 韓 택한 日소녀… 한일관계 미래를 보다

한예경 기자(yeaky@mk.co.kr) 2024. 1. 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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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적' 15세 日 바둑천재 나카무라 스미레
또래 같지않은 집중력이 기재
바둑 9단 부친, 바둑강사 모친
태생부터 바둑이 운명인 셈
전후 일본서 배운 한국 바둑을
이젠 日프로들도 한국서 배워
반일·혐한은 어른들의 세계
새 한일관계 표상이 된 10대
반상에 돌을 떨굴 때면 스미레는 재밌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된다. 새벽 6시부터 잠들 때까지 그의 하루는 바둑뿐이지만 쉴 때는 K팝을 듣는 평범한 여중생이다. 이충우 기자

나카무라 스미레(仲邑菫). 이제 막 열다섯 살이 된 2009년생 여류 바둑 프로기사를 '나카무라 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어디를 가나 여전히 '스미레'다. 열 살 때 프로기사로 데뷔해 일본 기원 사상 최연소 기록을 세운 바둑 신동, 일본 기원의 마스코트였던 그가 지난해 한국 이적을 알리면서 일본 바둑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한국에서는 바로 '스미레 팬클럽'이 생겨났고 양국 언론도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스미레는 존재만으로 한일관계에 많은 화두를 던졌다. 그가 한국에 바둑을 배우러 왔던 2018년은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판결을 내린 이후 한국과 일본 정치인들이 앞다퉈 반일·혐한 정서를 부추기고 있던 때다. 스미레는 그러나 일본에서 입단한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오직 프로의 시각으로 세계 최강인 한국 바둑리그를 택한 것. 정치인들은 한일관계를 이용했지만 10대들은 이렇게 달랐다. 지난해 11월 서울로 이사한 뒤 성동구 한종진바둑도장에서 수학하고 있는 그를 매일경제가 처음으로 인터뷰했다.

"강해지고 싶었다.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을 택했다."

프로 스포츠 세계에서 '신동'이란 흔히 정신적 미숙과 기교적 완성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특징을 동시에 암시하곤 한다. 스미레는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작은 입을 앙다물었다가 잠시 생각한 후 내놓는 답변에는 정체 모를 원숙함이 묻어났는데, 반상에 돌을 떨굴 때는 재미있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또래들과 대국을 잠시 멈추고 인터뷰룸에 들어선 스미레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한국을 택한 이유를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여덟 살 때부터 한국과 일본 도장을 오가면서 공부했는데 언젠가 한국에 와서 살고 싶었어요. 한국이 (바둑에서) 강하기 때문에 여기서 배우면 이길 수 있으니까요."

일본식 억양이 묻어나는 수준급 한국어 실력이었다. 스미레를 만나기 전 그의 한국행에는 부모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천재를 키우는 부모들은 자녀의 존재 자체가 한 가족의 운명이 되곤 하니까. 어머니 나카무라 미유키 씨는 그러나 전혀 다른 얘기를 했다. 그는 "딸이 한국에서 열심히 하고 싶다고 하는데 부모로서 그걸 응원해주고 싶었다"며 스미레가 먼저 한국행을 고집했다고 말했다.

스미레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프로 바둑기사로 활동 중인 나카무라 신야 9단이고 어머니도 일본 기원 바둑강사 출신이라 일본을 떠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터. 더군다나 일본 기원은 스미레를 위해 '영재 특별 채용 시스템'까지 만들어 2019년 정식 프로기사 자격을 줬다. 일본 바둑 사상 최연소 프로기사 스미레에게 미래를 걸었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스미레가 이적을 발표하던 날 일본 바둑계 여론이 좋지만은 않았다. 나카무라 미유키 씨는 "(스미레의 한국행에) 유감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었기 때문에 불안하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미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많아서 딸의 도전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과연 한국 바둑이 얼마나 특별하기에 그렇게 좋은지 물었다. 스미레는 "친구들과 떠들고 선배님·사범님과도 재미있게 장난치고 대화하니 배우는 게 즐겁다"는 마냥 아이 같은 답변을 내놨다. 1960년대 조훈현 기사가 일본 바둑계 거목 세고에 겐사쿠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을 때 바둑을 가르치기는커녕 마당을 쓸거나 방 청소만 시켰다는 일화들이 스치듯 떠올랐다.

스미레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나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은 한종진 사범(한국프로기사협회장·9단)은 "아무래도 일본 바둑계에 아직 도제 문화가 남아 있다 보니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다"며 "한국에서는 너무 자연스럽게 선후배가 어울리고 사범들과도 허물없이 대화하니까 그런 게 좋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치면 이제 겨우 중학교 2~3학년. 친구들과 놀다가도 "난 이만 바둑 두러 가보겠다"고 말하는 게 힘들지 않았을까. 스미레는 너무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바둑이 가장 재밌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기실 스미레가 보여준 일과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둑이다. 어머니 나카무라 씨는 "아이가 기재(奇才)는 없는 것 같은데 집중력이 좋고 즐거워하니까"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스미레를 가르치는 한종진 사범은 "집중력이 기재고, 즐기는 게 기재"라며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스미레처럼 한 가지에 몰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스미레가 바둑을 둘 때나 공부할 때 집중력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얘기할 때 보면 그냥 보통 아이예요. 장난도 잘 치고."

그는 스미레의 바둑에 대해 "일본 프로기사들은 수비적이고 모양이나 격식을 중시하는 스타일인데 스미레도 부친의 영향을 받아 그런 부분이 강했다"며 "이제 한국에서 공격적인 스타일을 겸비하면서 좀 더 업그레이드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초반 포석, 중반 전투, 종반 끝내기까지 전반적으로 고급 공격 기술을 익혀가면서 스미레만의 바둑 스타일을 찾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세 살 때부터 스미레에게 직접 바둑을 가르쳤던 어머니도 "스미레가 끈기와 집중력 하나는 누구보다 강했다"고 말했다. 수담(手談)이 아닌 화담(和談)이라 그 집중력이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한국 음식 중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한다는 스미레. 그는 "쉴 때는 K팝을 듣고 노래방에도 간다"며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떠들면서 인터뷰룸을 떠났다.

프로의 세계에서 스미레는 이제 3단이다. 싸움에 힘이 붙는다는 '투력(鬪力)'의 단계. 그가 잘생겨서 좋아하고 바둑 잘 둬 존경한다는 한국의 박정환 9단처럼 되려면 아직 멀었다.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오늘도 투력을 불태우는 스미레. 인터뷰룸을 떠나 다시 반상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의 눈이 독수리처럼 번뜩였다.

[한예경 글로벌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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