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경쟁, 아픈 교실] 학원 가는 길
미니픽션 10부작 ⑩ 서유미
대한민국 교육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수학능력시험 ‘킬러문항 배제’ 논쟁은 현행 입시제도를 둘러싼 각종 문제점이 다시 한번 공론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서울 서초구 한 초등학교 교사의 극단적 선택을 통해 공교육의 한 단면이 드러나면서, 교육주체들의 여러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들의 바탕에는 승자독식 사회의 그림자를 그대로 담고 있는 대한민국 교육 현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실해져 가는 공교육의 이면에는 갈수록 고도화, 효율화돼 번성하는 사교육이 존재합니다.
한겨레는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작가 10명과 손잡고 한국 교육의 현실을 소재로 한 미니픽션 10회 연재 ‘슬픈 경쟁, 아픈 교실’을 시작합니다. 격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이번 기획에는 장강명 정진영 주원규 한은형 최영 정아은 지영 염기원 서윤빈 서유미 작가가 함께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수업 끝나는 종이 치자마자 서진은 교과서를 사물함에 넣고 필통과 알림장을 챙겼다. 효우도 서둘러 책상을 정리한 뒤 가방을 멨다. 6학년 1반 교실에서 나온 서진과 효우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후문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서진과 효우의 긴 머리가 배낭에 달린 키링과 함께 찰랑거렸다. 겨울이지만 날씨가 포근해서 가을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서진은 아침에 등교할 때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쉬는 시간에도 효우의 자리로 가서 틈틈이 수다를 떨었지만 금세 수업 시작 종소리가 울렸고 할 이야기는 많이 남아있었다. 월요일 방과 후에는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주말이 지난 뒤에는 언제나 할 이야기가 잔뜩 쌓여있지만 지난주에는 효우가 가족 여행을 가서 학교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보다 할 얘기가 넘쳤다.
서진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래를 부르자 효우도 자연스럽게 따라 불렀다. 둘은 운동장을 지나 후문 쪽으로 걸어가며 두 곡의 노래를 불렀다.
-뭐 먹을까?
후문 밖으로 나가면서 효우가 1번과 2번 중에 고르라고 했다. 학원에 가기 전에 둘은 후문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거나 번화가 쪽으로 나가 떡볶이와 탕후루를 사 먹곤 했다. 급식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배는 고프지 않지만 밖에서 파는 먹거리는 맛있고 군것질은 언제나 즐거웠다.
서진은 1번과 2번의 내용이 뭔지 듣지도 않고 1번이라고 대답했다. 효우가 떡볶이랑 탕후루 당첨, 하면서 손뼉을 쳤다.
월요일의 서진과 효우는 일주일치 용돈을 받아서 주머니 사정이 괜찮다. 사실 용돈은 언제나 넉넉한 편이다. 부족한 건 시간이다. 서진과 효우는 서로 다른 학원에 다니기 때문에 시간표도, 학원이 끝나는 시간도 다르다. 집도 효우는 정문 쪽, 서진은 후문 쪽이라 같이 놀 수 있는 시간은 학원가기 전 30분이 전부다. 그 30분을 위해 효우는 학원 셔틀을 포기하고 서진은 효우의 학원까지 같이 갔다가 혼자 학교 쪽으로 걸어와 학원에 갔다.
학원에 늦거나 빠지면 엄마에게 바로 연락이 가기 때문에 둘은 아쉬워도 시간을 지키려고 애썼다. 효우의 마음이 흔들릴 때는 서진이 잡아주고, 서진이 엄마한테 전화하자고 조를 때는 효우가 고개를 저었다.
기다란 종이컵에 담긴 떡볶이를 먹으면서 서진과 효우는 영어학원 쪽으로 걸어갔다. 다가올 겨울방학과 중학교 교복에 관해 얘기하며 둘은 교복 입은 사진을 교환하기로 약속했다. 엄마가 크게 맞추자고 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깔깔거리며 웃으면서도 휴대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했다.
학원 앞에서 효우가 서진에게 핫팩을 건넸다. 서진은 주머니에서 풍선껌을 꺼내 하나는 효우에게 건네고 하나는 껍질을 벗겨 자신의 입에 넣었다. 손을 흔들며 요란하게 인사한 뒤에야 효우는 학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서진은 효우가 준 핫팩을 주머니에 넣은 뒤 학교 쪽으로 걸어갔다. 핫팩은 뜨끈뜨끈하고 뭉친 데가 하나도 없었다. 평소에 효우와 헤어지고 나면 서진은 학원에 미리 가서 수학 숙제를 하거나 영어 단어를 외웠지만 오늘은 후문 쪽으로 걸어갔다. 수학시간까지 30분의 여유가 있었다.
하교 시간이 지난 뒤의 후문과 벤치는 한산했고, 방과후 수업과 학원 시간을 기다리는 아이들 예닐곱 명이 철봉과 구름사다리, 미끄럼틀, 시소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저학년 때는 서진도 철봉 옆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시소를 타거나 미끄럼틀에서 잡기 놀이를 했다. 학년도 반도 다르지만 방과후에만 만나게 되는 친구들이 거기 있었다. 고학년이 되면서 애들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로 학원으로 갔다.
서진은 벤치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아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껌을 씹으며 풍선을 커다랗게 불다가 터뜨리기를 반복했다. 6학년으로 올라갈 때 친구들 몇 명이 전학을 갔다. 그건 저학년 때, 쌓인 추억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전학을 가는 것과는 달랐다. 친구들이 앞에 나와서 그동안 고마웠어, 우리 반 잊지 않을게, 너희들도 나 꼭 기억해줘, 라고 말하면 서진은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문 채 힘껏 손뼉을 쳤다.
이번에도 방학식을 하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어차피 중학교에 올라가면 학교나 반이 달라지겠지만 멀리 이사가버리면 만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사라져버린다. 어른들은 학교 근처나 마트에서 만나면 이 동네 학군이 별로다, 학원도 시원찮다, 좋은 대학에 보내려면 초등학생 때 학교를 옮기는 게 좋다는 얘기를 애들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래서 중학교 배정이 끝나기 전에 전학 가는 친구들이 많았다.
서진이 소파에 앉아 유튜브나 만화책을 보면서 빈둥거리면 엄마는 서진아, 하고 불렀다.
너 곧 중학생이야.
그럴 때 엄마의 목소리는 낮고 눈동자는 걱정으로 부풀어 올랐다.
지금부터 공부하는 습관을 들여야지.
중학생이 된 다음에는 습관을 바꾸기 힘들다고 했다. 우린 다른 동네로 이사갈 수도 없으니까 여기서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하는 엄마를 볼 때 서진은 전학 가는 친구를 배웅할 때의 마음과 비슷해졌다.
이번에도 겨울방학하는 날에 서진은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게 될 것이다. 졸업하면 많은 친구들과 헤어지겠지만 효우가 멀리 이사가는 게 제일 슬펐다. 베프인데도 하루종일 같이 있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 실컷 하고 노래도 따라부르고 춤도 추고 유튜브 보고 게임 하며 시간을 충분히 보낸 적이 없었다. 언제나 학원 시간이 걸림돌이 되었다.
철봉 옆에 쌓여있던 가방은 이제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이어폰 볼륨을 높이며 서진은 미래나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얘기를 하면 어른들은 사춘기라 그래, 네가 사춘기라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라고 했다.
사춘기라는 말 너무 짜증 나지 않냐.
30분 전에도 서진과 효우는 샤인머스켓 탕후루를 오독오독 씹으며 짜증 나, 뭐만 하면 사춘기 때문이래, 그 말 제일 듣기 싫어, 하고 투덜거렸다.
요즘 우리 엄마가 제일 많이 하는 얘기도 그거야.
서진은 사춘기라서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인생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많아졌다. 공부와 상관없고 해답이나 정답이 없어 보이는 것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고 얘기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학교나 학원에서는 그런 것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았다.
마지막 두 개 남은 가방의 주인들이 후문 옆에 대기 중인 학원 버스에 탔다. 서진도 서두르지 않으면 수학 시간에 지각할 것 같았다. 벤치에 앉아 발을 까딱거리며 서진은 학원에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공부하기 싫은 건 아니었다. 수학과 영어는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다들 수학과 영어학원 정도는 다닌다는 것도 알았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설명하는 내용만 들으면 시험을 잘 볼 자신이 없었다.
겨울방학까지 2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방학이 시작되면 효우는 바로 이사갈 텐데, 하루쯤은 수업이 끝난 뒤 효우와 같이 시간을 보내면 안 될까. 엄마들을 졸라 볼까? 서진이 묻자 효우가 그 동네 학원에서는 예비 중학생 특강을 바로 시작할 거라고 했다.
좋은 고등학교에 가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대.
시간표를 알려주며 효우가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럼 우리는 언제 놀 수 있는 거야? 대학 가면?
아닐 걸.
너무하네.
서진과 효우는 탕후루의 기다란 꼬치를 버리며 너무하네, 를 반복했다.
서진은 풍선껌을 씹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겨울의 햇빛은 밝고 공기는 따뜻하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목소리는 환상적이었다. 주머니 안의 핫팩은 아직 뜨끈뜨끈하고 언제까지나 열기가 식지 않을 것 같았다. 덕분에 학원으로 가는 길이 힘들지만 외롭지 않았다. (끝)
서유미 | 소설가.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 ‘끝의 시작’, ‘틈’, ‘홀딩, 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펴냈고, 에세이 ‘한 몸의 시간’, 소설집 ‘당분간 인간’과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이 밤은 괜찮아, 내일은 모르겠지만’이 있다. 월급사실주의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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