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원, 피아노 위에 붓질한 보컬…목소리에 풍경이 사네

이재훈 기자 2024. 1. 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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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피아노만으로…정규 9집 '권진원 롭 반 바벨' 호평
'국내 포크대부' 김민기·학전과 큰 인연
'김광석 노래상 경연대회' 심사·'학전 어게인' 참여
[서울=뉴시스] 권진원. (사진 = 뮤지션 측 제공) 2024.01.02.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싱어송라이터 권진원의 노래와 목소리 안엔 풍경이 살아간다.

담백하게 갸륵한 선율, 여백의 고운 노랫말을 품은 권진원의 곡절(曲節)들은 듣는 사람들의 곡절(曲折)과 공명하며 아름다운 사연들을 만들어낸다.

권진원의 노래가 일종의 대화처럼 들리는 이유다. 특히 최근 발매한 정규 9집 '권진원 롭 반 바벨(Kwon Jin Won with Rob Van Bavel)'이 이를 증거한다. 권진원의 목소리, 네덜란드 재즈 피아니스트 롭 반 바벨(Rob Van Bavel)의 피아노 소리만으로 간결하게 구성했다.

'난 그대를 생각해', '가을비가', '그 장소에 갔던 것도', '너는 내 안에서 반짝인다' 같은 신곡 네 곡 등 총 아홉 곡이 실렸는데 이를 찬찬히 듣고 있으면, 검정 먹물이 점점이 박힌 하얀 도화지 위에 권진원의 보컬이 정경을 그려나가는 듯하다. 목소리만으로 서사를 만들어내는 권진원의 드라마틱함이 절정에 이른 앨범이다.

특히 권진원의 숨소리가 삶의 신비로움을 환기한다. 들숨과 날숨의 하모니는 어쩌다 만나는 삶의 불협화음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숨결이다.

롭 반 바벨은 권진원과 작업에 대해 "매우 특별했다"고 흡족해했다. 그러면서 "권진원은 음악에 대해 정말 명확하다. 그녀의 노래와 따뜻한 목소리를 정말 좋아한다. 녹음이 끝난 후 우리는 네덜란드에서 함께 즐거운 여름을 보냈다. 정말 놀라운 시간이었다"고 기억했다. 다음은 최근 서울 서초구에서 만난 권진원과 나눈 일문일답.

-이번 앨범 사운드 질감이 너무 좋아요. 믹싱과 마스터링에 각각 노상준·황병준 선생님이 참여를 하셨더라고요.

"믹싱해 놓은 음악을 모니터링 할 때 날씨는 물론 시간대에 느낌이 달라져요. 그날 기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요. 질감을 선택하는 게 어려운 거죠. 그럼에도 기준이 됐던 건 자연스러운 것이었어요. 피아노 연주도 잘 들리고, 노래 가사도 잘 전달이 되는…. 그리고 제 호흡하는 숨소리도 살아있어야 하는 것도 중요했죠."

-제대로 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판소리 듣는 느낌도 들었어요. 고수의 북이랑 소리꾼이 빚어내는 판소리처럼 롭 반 바벨의 피아노와 선생님의 보컬로만 모든 풍경이 그려졌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름답고 가사가 예쁘니까 선생님의 보컬이 정경을 붓질한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보컬 녹음하시면서 가장 신경 쓰셨던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그냥 노래 안으로 깊이 들어가려고 했어요. 전주가 시작이 되면 그냥 가사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가는 거죠. 저도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표현이 될지 모르는 일종의 몰입 상태가 되는 거죠."

-특히 싱어송라이터는 직접 쓴 곡으로 직접 노래를 부르시니 몰입도가 더 높을 거 같아요. 특히 남성, 여성을 구분하기는 좀 그렇지만 비교적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장수하는 경우가 드물어 선생님 같은 분이 더 귀한 때입니다.

[서울=뉴시스] 권진원, 롭 반 바벨. (사진 = 뮤지션 측 제공) 2024.01.02.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저는 노래 부르는 것도 너무 좋고, 노래 만드는 것도 너무 좋고 그래서 살아있는 한 계속 노래 부르고 노래를 만들어나갈 거 같아요."

-롭 반 바벨 선생님과 호흡은 어떠셨나요?

"10년 전 정도부터 알고 있었어요. 연주가 참 좋다는 생각은 했는데 재즈 분야에 계시기 때문에 같이 연주할 생각은 하지 못했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장르 구분이 제게는 많이 사라진 거 같아요. '만남'(2014) 앨범은 국악 요소가 있었고요. 이제 전 '그저 음악을 하는 사람 또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거죠. 이번 앨범은 음원 플랫폼에서 재즈로 분류가 돼 있어요. 저는 '재즈 앨범을 만들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게 아니었어요. 보컬과 피아노로 된 아주 간결한 노래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앨범을 몇 년 전부터 만들고 싶었을 뿐이죠. 그간 어떤 피아니스트와 호흡해야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내 음악이 잘 표현될 수 있을까 고민해왔어요. 근데 롭 반 바벨 선생님과는 한 번도 같이 작업을 해보지 않았었는데 '바로 이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에브리싱 해펀스 투 미(Everything Happens to Me)'를 듣고요. 이 곡이 실린 앨범 '타임 포 발라드 : 더 솔로 세션(Time For Ballads: The Solo Sessions)'(2023)은 다른 곡들도 참 좋은데 특히 '에브리싱 해펀스 투 미'는 피아노가 말을 하고 있고 노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만든 음악을 생각했을 때 딱 이 피아노 소리와 겹쳐졌죠. 한 번도 같이 작업을 안 했는데 제가 이런 협업 결정을 내린 것이 신기했어요."

-그래서 지난 여름에 바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가신 건가요?

"작년 봄에 제가 근무 중인 서울예대로 '마스터 클래스'를 하러 오셨거든요. 그 때 만났을 때 '난 당신의 피아노 연주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같이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라고 인사를 했어요. 올해 봄에 다시 오신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켜 암스테르담에 간 거죠. 제 음악들을 제가 피아노로 연주한 데모 음원을 먼저 들려드렸어요. 바로 '같이 해보고 싶다'는 답변이 온 거죠. 뵙고 나서 처음으로 연습할 곡을 고민하다가 롭 반 바벨 선생님이 (권진원의 대표곡인) '해피 버스데이 투 유(Happy Birthday To You)'를 이번 앨범에서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사실 신곡으로만 이번 앨범을 작업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새로운 표현이 있을 수 있을 거 같아서 마음을 열고 같이 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 드렸죠. 근데 선생님 반주에 맞추니 노래가 저절로 됐죠."

-결단력이 대단하세요.

"돌아보면 제가 그런 식으로 많이 해왔던 것 같아요. 강변가요제 나갔을 때부터 제가 체력이 엄청 좋거나 외향적이지 않거든요. 그런데 '뭘 해야 되겠다'고 결정하면 그냥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에요. 누가 출전하라고 한 것도 아니었어요. 학생들한테도 얘기해줄 때도 마찬가지에요. 무엇을 시작할 때 상처 받을까 두려움을 갖는데 '그냥 원하면 일단 부딪혀 봐라'고요. 인연이 있으면 맺어지는 거고 인연이 없다 싶으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도 제가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고 찾아간 거예요. '강변가요제'에서 상도 받고 경력이 있는데 왜 찾아왔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선생님에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시는 진심의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숨결을 불어넣는다고 할까요. 그래서 이번 앨범이 더 좋았던 게 피아노 반주만 있으니까 선생님 숨소리가 좀 많이 들렸어요.

"노래할 때도 굉장히 숨을 중요하게 여겨요. 마음을 다스리는 데도 들숨, 날숨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명상을 할 때도 숨이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노래할 때도 숨이 반 이상을 차지하거든요. 음악과 사랑이 제 삶의 전부인데 숨에 사랑을 불어넣으면 신기하게 음악과 마음이 달라져요. 그렇게 사랑이 채워지고 그러면 마음에 드는 결정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서울=뉴시스] 권진원 정규 9집 '권진원 롭 반 바벨(Kwon Jin Won with Rob Van Bavel)' 커버. (사진 = 뮤지션 측 제공) 2024.01.02.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선생님의 '숨의 미학'은 자기 수양 같은 느낌도 듭니다.

"저는 그렇게 살아오고 있고 살아가고자 해요."

-선생님이 계속 음반을 내주시는 건 우리 대중음악계를 다양하게 만들어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숨통을 틔워주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가수 경서가 제 제자인데요. 이번 음반을 듣고 문자를 보내줬는데 '숨이 쉬어진다'는 말이 있었어요."

-학생들이 존경하는 교수님이기도 합니다.

"'교육과 음악을 어떻게 잘 병행해 나가세요?'라고 많이 묻기도 하시는데 그럴 때 이렇게 답해요. '병행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음악하는 거'라고요.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음악을 같이 만드는 시간이에요. 실제로 같이 작업을 하기도 하고요. '음악을 같이 서로 나눈다'라는 마음이지 제가 뭘 가르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김민기 선생님이 이끄시는 학전과도 선생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계시죠. 학전은 올해 3월 폐관 위기를 앞두고 다양한 활용 방안이 나오는 등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선생님도 더 바빠지셨어요. 오는 6일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열리는 '제2회 김광석 노래상 경연대회' 본선 심사위원을 보시고, 학전 되살리기를 위한 '학전 어게인' 프로젝트 공연에도 함께 하십니다.

"김민기 선배님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를 대학생이던 친구 언니가 들려줬거든요. 노래가 너무 예쁘고 좋은데 그 때 들었을 땐 가사가 이상했어요. 그 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었죠. 고등학교 1학년 때엔 교생 선생님이 바들바들 떨면서 같은 음이 계속되는 노래를 하나 해주셨는데 알고보니 김민기 선배님의 '친구'라는 노래였죠. 또 역사 선생님이 교내 방송에서 '상록수'를 틀어준 적이 있었는데 감동이 밀려왔어요. 그런데 80년대라 학교가 발칵 뒤집어지기도 했죠. 그렇게 제 성장 과정에서 김민기 선배님의 노래가 계속 등장했어요. 아까 판소리 같다고 하셨잖아요. 김민기 선배님이 딱 한번 제게 '된장 맛'이 느껴진다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어요. 이밖에도 다정한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죠."

-선생님의 노래도 누군가의 성장 과정에 분기점이 됐습니다. 이전에 발표하셨고 이번 앨범에도 담긴 '사월, 꽃은 피는데'도 대표적인 예죠. 많은 이들을 위로한 곡입니다.

[서울=뉴시스] 권진원. (사진 = 뮤지션 측 제공) 2024.01.02.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앞서 싱글로 발표했을 때 정재일 씨가 해준 편곡은 오케스트라에서 주는 장엄한 느낌이 있었죠. 전주도 정말 깊고 너무너무 좋아요. 이번 롭 반 바벨 선생님 버전은 아주 간결하게 표현됐어요. 단순함에서 오는 절제된 슬픔이 아주 투명하죠. 저와 롭 반 바벨 선생님의 나이대가 비슷하거든요. 같은 시대 학교 생활을 한 동년배인 거예요. 각각 네덜란드, 한국에서 청년기를 보냈지만 들었던 음악이 같죠. 비틀스, 퀸 프레디 머큐리, 엘라 피츠제럴드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면서 음악으로 통하니까 서로 원하는 음악 표현이 나올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또 이번 앨범이 진짜 좋았던 부분은 사계절의 풍경이 다 녹아 들어가 있다는 점이었어요.

"어린 시절은 봄이고 청년기는 여름이고 가을이 중년이고 노년이 겨울이라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중장년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계속 순환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선생님 말씀 들으니까 아티스트분들은 더 많은 계절을 산다는 생각이 더 드네요. 그래서 더 많은 풍경을 담으실 수 있는 거 같아요.

"지구에 와서 좋았던 것을 한번 적어본 적이 있는데 자연 풍경이 참 많더라고요. 비 내리는 아침 풍경, 눈 오는 밤의 풍경, 봄날에 핀 꽃…."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선생님의 음악은 하얀 도화지 위에 수채화 같은 풍경을 그리는 느낌입니다. 특히 이번 앨범은 피아노가 더 하얀 도화지 같은 역할을 했고요.

"사람과 풍경에서 음악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길을 가다가 어떤 멜로디가 떠오르면 그걸 막 외워두고 집에 와서 곡을 만들고 그랬거든요. 근데 '나무'(2006) 앨범부터인가 곡을 만드는 스타일이 달라졌어요. 피아노 앞에 책을 보고 글을 읽는데 아주 깊이 들어가는 거죠. 그게 제일 강했던 게 '만남' 앨범 때였어요. 다산 정약용,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선생님들의 시와 산문을 놓고 한 장 한 장 읽다가 그 글에 깊이 들어갈 때 피아노에 손을 얹어 놓으면 선율이 그냥 흘러나왔죠. 이후에 피아노 앞에서 책을 읽고 또 어떤 풍경을 유심히 바라보면 거기에서 음악이 생겨나요."

-피아노 원재료도 나무, 책 원재료도 나무, 선생님 대표곡 중 하나도 '나무'이고 나무 즉 자연과 인연이 참 많습니다. 하하. 선생님을 이렇게 뵈니까 '좋은 사람이 좋은 뮤지션'이라는 확신이 더 강해집니다. 자연, 사람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좋은 음악을 만들어낸다고 할까요.

"저는 정말 모든 게 다 신비롭거든요. 이번 앨범에 실린 신곡 '가을비가'의 첫 시작은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인) 허난설헌이었어요.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그 시대가 어땠겠어요? 짧은 생을 살다 간 예술인인데 그분에 대해 혼자 상상을 해본 거예요. 저는 싱어송라이터지만 제 이야기를 수필이나 일기 형식으로만 만들지 않아요. 물론 저의 이야기도 있지만 사람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많죠. 강릉에 가면 허난설헌의 생가가 있어요. 그곳 툇마루에 걸터앉아 가을비를 내리는 걸 보면서 자신의 슬픈 상황을 떠올리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거죠. 원치 않는 결혼을 했는데 마음속에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았을까 상상한 거죠. 사랑의 감정을 그렇게 담아본 거예요. 창작이라는 게 그렇게 이뤄지는 거 같아요. 신비로움과 호기심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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