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생은 복합 결과, 잠시 합계출산율 수치는 잊자[플랫]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와!” EBS <다큐멘터리K-인구대기획 초저출생> 인터뷰에 응한 미국의 한 교수가 한국의 지난해 합계출산율 수치(0.78명)를 듣고 보인 반응이 인터넷 ‘밈(유행 게시물)’이 됐다. ‘저출생 공포’는 점차 강해지고 있다. 최근 통계청은 내년 합계출산율이 0.6명대로 내려앉을 것이라는 장래인구추계 전망을 내놓으며 두려움 하나를 더 얹었다. 그러나 더 무서운 통계들이 있다. 통계청 발표 하루 전 보건복지부는 고립·은둔 청년이 54만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들 4명 중 3명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1020세대의 사망 이유 1위가 자살이기도 하다. 지난해 자해·자살 시도자의 46%가 10~20대였다.
세계 ‘꼴찌’ 출산율이라는 수치 반대편에는 자살률, 산재사망률, 성별 임금격차 모두 1위라는 통계가 거울처럼 서 있다.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비해 2배나 높다. 산재사망률도 OECD 국가 중 1위다. 지난해 산재 사망자의 78.9%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지만 정치권에서는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남녀의 임금격차는 OECD에 가입한 이래 줄곧 선두다. 남성이 100을 받을 때 여성은 69를 받는다. 국제 성평등 지수들에서 한국은 대부분 하위권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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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늙어가는 것은 두려워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위기 신호에는 왜 무감한가. 저출생은 복합 결과다. 어렸을 때부터 과도한 경쟁과 불안을 강요받지만 정작 사회에 나와서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 구직 의사가 없어 실업률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쉬었음 청년’이 40만명이다. 지방 중소도시 한 곳 인구만큼의 청년들이 미래를 계획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수년 전부터 청년들은 결혼하지 않는 이유로 주로 ‘결혼자금 부족’을 꼽았다. 이제 결혼은 일부 상위 계급이 할 수 있는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일하고 싶은 여성들을 위한 사회 시스템은 여전히 부족하다. 여성의 연령대별 고용률을 보면 30대만 뚝 떨어져 경력단절이 되는 ‘M자형 그래프’가 굳건하다. OECD 회원국 중 한국처럼 M자의 굴곡 심한 사회는 없는데도, 지난 10년 동안 그래프의 기울기 변화는 크지 않았다. 사회가 돌봄 부담을 나눠 지고 부모가 함께 돌보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지만 여전히 육아휴직조차 그림의 떡인 사업장이 많다.
한국은 빠르게 성장한 만큼 빠르게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출산율은 50년 뒤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를 노인 부양비를 걱정하기 위한 지표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온 공동체의 현재를 냉정하게 살펴보라는 지표다.
“출생률이 절망적인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리고 출생률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그 바닥이 어디인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한국 얘기와 똑같아 놀랐지만 뮈르달 부부가 저서 <인구 위기>에서 1930년대 스웨덴 상황을 정리한 문장이다. 1930년대 스웨덴은 유럽 내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국가였다. 당시 보수세력은 기혼 여성의 고용이 출산에 방해된다고 보고 공공 부문에서 고용을 금지하는 법을 발의할 정도였다.
뮈르달 부부는 “경제적 분배의 소규모 조정”으로는 해결이 어렵다고 보고 ‘근본적인 개혁’을 주문했다. “출산 장려, 다자녀 가정 세금 혜택 등이 잠시나마 긍정적인 인구 정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런 정책들은 출산율 증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희망 사항만 열거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사회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뮈르달 부부는 “자녀를 기르면서 드는 비용을 줄여야만 한다”며 양육 비용을 사회화하는 구체적인 아동·청소년 복지 정책을 제안했다. <인구 위기>에서 제시한 정책들은 스웨덴 사민당을 통해 40년 이상 시행됐다. 이는 스웨덴이 복지국가로 가는 디딤돌이 됐다.
세계 초유의 출산율은 한국에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걸 말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적어도 50년 이상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각 부처의 정책을 취합하는 모델로는 불가능하다. 인구 정책을 총괄할 부처 신설, 적극적 재정 투자는 충분 조건이 아니라 필요 조건이다. 지난 10년간 위기의 규모만큼 적극적 재정 투자는 없었다. 저출생 극복을 위해 예산 260조원을 투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예산은 부풀려졌고 위기에 대한 대응력만 떨어뜨렸다. 여전히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족 관련 지출은 선진국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청년 취업률, 성별 임금격차, 과도한 사교육비, 자살률, 산재사망률 등 ‘청년들의 비명’이라 일컬어지는 수치들을 먼저 고치자. 출산율 통계는 이 통계들의 결과이고 원인 통계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는 것이 먼저다. 잠시 합계출산율 수치는 잊자. 한국이 성장해온 모든 도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 그게 시작이다.
▼ 임아영 젠더데스크·플랫팀장 ayknt@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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