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고향 땅 떠나 살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유령 같은 존재' 제주 4·3 밀항인 취재기
2018년 7월 제주시 월평동 자택에서 아흔을 훌쩍 넘긴 강영일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당시 제주에서는 예멘 난민 사태로 혐오 물결이 거셀 때였습니다. 그는 70여 년 전 제주4·3 당시 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했습니다. 예멘 난민처럼 ‘4·3 난민’이었습니다. 강 할아버지는 당시 예멘 난민 추방 여론이 거센 데 대해 “억지로 고향 땅을 떠나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그때 인터뷰를 계기로 4·3 난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2019년 10월 4·3 수장학살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 대마도 현지를 찾았을 때도, 4·3 당시 많은 도민들이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밀항했다는 증언을 들었습니다. 이후 4·3밀항인 자료나 정부 진상조사보고서를 찾아보는데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관련 기사도 없었습니다. 역사의 어둠 속에 묻힌 4·3밀항인을 취재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이유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일본 밀항
70여 년 전 제주4·3 광풍 당시 3만여 명의 많은 사람이 희생됐습니다. 가옥 4만여 채가 불타고, 중산간 마을은 폐허로 변했습니다. 피해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정든 고향 땅을 떠나 일본으로 밀항한 도민도 또 다른 의미의 희생자입니다. 4·3 당시 1만여 명이 불타버린 마을을 뒤로하고 밀항선에 몸을 맡겼습니다. 4·3 이후인 1970년대까지도 연좌제와 생계 곤란 문제로 매해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의 도민이 일본으로 밀항했습니다. 일본에서의 삶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혐오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재일제주인은 ‘하루 16시간’ 노동에 일본인조차 꺼려하는 일을 도맡아서 하는 등 꿋꿋이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리고 고향 사랑을 잊지 않고 어렵게 일해서 번 돈을 제주 땅에 성금으로 보냈습니다. 고향 사랑의 씨앗이 제주 발전에 토대가 됐습니다.
◇‘유령 같은 존재’ 쉽지 않은 취재
‘4·3의 전국화와 세계화’ 속에서 대통령과 군·경 수뇌부가 사과하는 등 과거사 해결에 큰 진전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4·3밀항인의 역사는 그동안 잊힌 역사였습니다. 4·3 정부 진상조사나 4·3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재일 4·3희생자와 유가족은 외면받은 겁니다. ‘밀항’이라는 방법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탓에 70여 년 세월 ‘유령 같은 존재’였습니다. 취재진이 제주와 일본 대마도, 오사카 현지에서 그들을 추적하고 실체화하려 한 이유입니다. 특히 재일제주인 사회는 남북 분단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재일 4·3희생자 유족들 사이에서도 북한계인 ‘조총련’과 남한계인 ‘민단’으로 갈라진 겁니다. 현재 분단이 고착화하면서 남북통일이 요원해진 상황입니다. 가족 안에서조차 이산가족이 발생하는 재일제주인의 비극을 조명함으로써 통일의 가치, 분단의 아픔을 전하려 했습니다. 아울러 일본 사회에서 극심한 차별과 혐오에 시달렸던 4·3밀항인의 목소리를 통해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사태’와 현재 우리사회가 직면한 갖은 혐오와 차별 문제에 대해서도 인권적인 관점에서 다루려고 했습니다.
취재는 쉽지 않았습니다. ‘밀항’이었기 때문에 재일제주인은 일본 사회에서 ‘미등록 외국인’, 속된 말로 불법체류자였습니다. 적발되면 악명 높은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추방됐기 때문에 그동안 쉬쉬했던 겁니다. 재일 4·3유족회 안에서도 북한계인 ‘조총련’과 남한계인 ‘민단’으로 나뉘어 이념 문제도 컸습니다. 특히 4·3 당시 눈앞에서 마을 사람이 죽고 가족이 죽는 것을 봤던 만큼, 4·3은 입 밖으로 쉽게 꺼내기 어려운 주제였습니다. 이 때문에 인터뷰이를 설득하는 데 수개월에 걸친 설득과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밀항’의 성격상 관련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실체화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취재진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과 한국 국제관계 관련 연구자들을 접촉해 4·3밀항인 실체를 드러내려 했습니다. 어렵게 연합국 최고사령부(GHQ/SCAP) 보고서와 강제 추방 조선인 영상 등의 자료를 확보해 그동안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있던 4·3밀항인의 존재를 실체화했습니다.
기자를 시작하면서 매년 4·3 관련 기획보도를 하자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이번 기획보도물은 그중 하나입니다. 여전히 4·3은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비극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4·3 관련 탐사보도를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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