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 구하기 대작전/강보경 [서울신문 2024 신춘문예 - 동화]
“이제 다 왔어. 여기가 앞으로 우리가 살 아파트야.”
보조석에 앉은 엄마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좋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아빠의 발령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슬펐다. 매일같이 놀던 친구들과 더 이상 만날 수 없으니까. 그런데 막상 서울에 와서 보니 앞으로 살 아파트가 마음에 들었다. 특히 으리으리한 정글놀이터가 좋았다. 이전에 살던 곳에도 놀이터가 있었지만 친구들 5명만 모여도 비좁게 느껴질 만큼 작았다. 그런데 이 정글놀이터는 반 친구들 모두 있어도 거뜬할 것 같았다.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 반에 새로운 친구가 전학을 왔어요. 구한이 인사해볼까?”
선생님이 내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안녕? 나는 김구한이야. 만나서 반가워.”
나는 선생님이 가리키는 빈자리에 앉았다. 내 짝꿍은 하얗고 둥근 얼굴에 잠자리 눈 같은 안경을 쓴 친구였다.
“안녕? 이름이 뭐야?”
“이윤호.”
윤호는 멍하니 앞만 바라보며 무심하게 이름을 말했다.
선생님의 하교 인사를 듣고, 짐을 챙겨 나왔다. 저 앞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윤호가 보였다. 나는 서둘러 윤호 옆에 바짝 붙었다.
“윤호야, 너도 이 아파트에 살아?”
“어.”
전학 온 학교는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그래서 학생의 대부분이 우리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정글놀이터에서 같이 놀래?”
“피아노학원 가야해.”
“피아노 끝나고는 뭐해?”
“영어학원, 수학학원 가야해.”
윤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앞만 보며 걸어갔다. 윤호는 걸음이 느려진 나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이사 오기 전에 피아노 학원만 다녔다. 내 친구들 중에는 윤호처럼 여러 학원을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윤호 같진 않았다. 학원과 학원 사이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으면 어떻게든 같이 놀기 위해 시간을 맞췄다. 단 30분이라도 놀이터에서 만나 놀았다. 그 30분은 쏜살 같이 흐르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놀고 나면 숨이 헐떡헐떡 차고 머리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윤호는 나와 놀기 싫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멀어져 가는 윤호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잘 다녀왔어?”
“네. 엄마! 나 숙제 끝내놓고 나가서 놀아도 돼요?”
“그래. 대신 단지 밖으로 나가면 안 돼. 아직 이 동네에 서투니까.”
나는 숙제를 재빨리 끝냈다. 그리고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단지를 둘러 있는 산책로를 걸었다. 두 갈래의 길이 나왔다. 왼쪽은 아파트 정문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정글놀이터로 가는 길이었다. 평소 같으면 당연히 오른쪽 길로 갔겠지만, 오늘은 달콤한 꽃향기가 나는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호다!’
윤호가 정문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학원 차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내가 다가가 앉는데도 모르는 것 같았다.
윤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스마트폰을 양 손에 쥐고 엄지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핏 보니 요즘 유행하는 ‘티끌모아 태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 게임은 차근차근 아이템을 모아가야 해서 많이 하는 만큼 레벨이 올라가는데, 윤호는 나보다 5배는 높은 15레벨이었다. 나와 놀 시간은 없다더니 게임할 시간은 많나보다. 내가 옆에서 보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윤호는 학원 차의 빵 소리에 부리나케 일어나 달려갔다.
나는 토요일이 게임하는 날이다. 평일에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냈을 때 2시간의 게임시간이 생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평일에는 게임도 안하고,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척척 끝내는 아이 같겠지만, 그건 아니다. 나도 매일 ‘티끌모아 태산’ 게임을 하고 싶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없다. 토요일에도 아빠 스마트폰을 빌려서 게임을 하는 거다.
작년에 잠깐, 내게도 반짝반짝 빛나는 멋진 스마트폰이 있었다. 스마트폰은 나의 보물 1호였다. 그래서 한시도 손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 숙제할 때, 화장실갈 때도 들고 다녔다. 보다 못한 엄마는 내 스마트폰을 없애버렸다. ‘스스로 절제할 수 있을 때까지 절대로 사주지 않을 거야!’ 호랑이 같은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 며칠은 눈물이 날만큼 속상했다. 그리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불안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밖에 나가면 같이 놀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멍한 눈빛과 손놀림으로 게임을 하는 윤호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재미있는 게임을 하고 있으면서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갑갑하고 쓸쓸해 보였다. 옛날 내 모습 같았다. 아무래도 윤호를 스마트폰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내야겠다. 나는 윤호구하기 작전을 계획했다.
「1단계, ‘티끌모아 태산’을 주제로 대화를 튼다.
2단계, 쉬는 시간에 스마트폰 대신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리도록 한다.
3단계, 최대한 재미있게 논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생각나지 않게 한다.」
내 생각대로라면 3단계를 거치고 났을 때 윤호는 나와 나의 옛 친구들이 그랬듯 틈만 나면 뛰어 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같이 놀 친구가 생길 것이다. 나는 윤호와 땀을 흘리며 신나게 뛰어 놀고 싶다.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딩동댕.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운동장에서 놀아도 좋아. 그런데 쉬는 시간이 끝나기 전에는 들어와야 해.”
선생님의 말씀에도 윤호는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윤호구하기 작전 1단계에 돌입했다.
“윤호야, 너 ‘티끌모아 태산’ 게임해?”
윤호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응. 너도 해?”
“나도 하지. 난 20레벨 이야.”
“우와. 너 정말 높다. 난 15레벨인데. 게임 정말 많이 했나보다.”
나는 사실 3레벨이다.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이건 하얀 거짓말이다. 윤호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짓말. 어찌됐든 대화를 시작하게 됐으니 1단계 성공!
“15레벨까지는 시간을 많이 투자하면 할 수 있지.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게임을 많이 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고난도의 훈련이 필요해.”
“고난도의 훈련? 그게 뭔데?”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큰 비밀이라도 되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알고 싶어?”
“응.”
윤호는 침을 꼴딱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학교 끝나고 시간돼?”
“오늘은 4시부터 6시까지 시간 있어.”
내 생각이 맞았다. 시간이 있었으면서 나와 노는 것보다 스마트폰이 더 좋았던 거다.
학교가 끝나고 윤호와 나는 서둘러 나왔다.
“고난도 훈련이 뭐야? 어떤 기술을 써야 하는데?”
윤호가 다그치며 물었다.
“오늘은 체력훈련이야.”
“체력훈련?”
윤호는 멈춰 서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뜨끔했지만 확신을 주기 위해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다.
“너 ‘티끌모아 태산’ 할 때 손가락 안 아파? 목, 어깨, 등 뻐근하지 않아? 그런 상태로 어떻게 게임에 집중 하겠어. 그래서 체력훈련이 필요한 거야. 딱 1주일만 해도 변화가 느껴질걸.”
윤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4시에 정글놀이터에서 만나.”
나는 10분 먼저 정글놀이터에 도착했다.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좋은 놀이터가 있는데 왜 다들 놀지 않는 걸까? 나는 텅 빈 놀이터를 둘러보며 어떻게 놀면 훈련처럼 보일지 고민했다. 그때 윤호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손의 힘만 가지고 이 구름다리를 통과해야해. 나 하는 것 잘 봐.”
나는 손에 힘을 줘 밧줄로 만들어진 구름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그리고 한손, 한손 옮기며 건너갔다.
그 다음은 윤호였다. 윤호는 나처럼 손에 힘을 줘 밧줄을 잡았다. 하지만 옮겨 건너려 한손을 놓는 순간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 손을 옮길 때 한손으로 자기 체중을 버티고 재빠르게 옮겨야 하는데, 힘도 부족했고 재빠른 기술도 부족한 듯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훈련에 열중했다.
“하하하. 됐다. 나 봤지?”
마침내 윤호는 구름다리를 건너고 환하게 웃었다. 윤호의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2단계 성공!
우리는 그 날 이후 틈만 나면 훈련을 했다.
“오늘은 순발력을 기르는 훈련을 할 거야. 내가 잡을 테니까. 너는 도망가. 이 놀이터를 벗어나면 안 돼.”
“이거 술래잡기 아냐?”
“맞아. 술래잡기만큼 순발력을 기를 수 있는 훈련이 어디 있냐? 어느 방향으로 도망갈지 순식간에 판단해야 하잖아.”
둘이 하는 술래잡기는 잠시도 쉴 틈 없이 뛰어야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윤호야, 개미들 좀 봐. 꼭 게임에서 아이템을 모으는 것 같지 않아?”
“그러네. 이거는 무거워 보이니까 같이 옮기려나 봐.”
개미들이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과자 부스러기위에 모여들어 있었다.
“게임에서도 팀원 모두 열심히 해야 이기잖아. 한 명이라도 한눈을 팔거나 자기 멋대로 해버리면 이길 수 없지.”
우리는 한참 동안 개미를 관찰하며 게임 전략을 짰다. 그리고 개미들처럼 멋진 나뭇잎과 가지를 모았다. 쌓인 나뭇잎 더미를 바라보던 윤호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구한아! 우리 이제 슬슬 실전에 들어가 볼까?”
심장이 덜컹하고 배꼽까지 내려앉았다. 윤호 구하기 작전 3단계는 실패하고 말았다.
내가 고백하면 윤호가 뭐라고 할까? 이제는 나와 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속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윤호야…….”
“응?”
윤호는 스마트폰 화면 가운데에 자리 잡은 ‘티끌모아 태산’ 게임 앱을 누르며 대답했다.
“나…….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뭔데?”
가슴이 쿵쿵 뛰다 못해 온몸이 쿵쿵 뛰었다. 입에 침도 말랐다.
“사실 나……. ‘티끌모아 태산’ 3레벨이야.”
“뭐?”
윤호의 동그란 눈이 왕사탕만큼 커졌다.
“미안해. 나는 너랑 같이 놀고 싶어서 그랬어.”
윤호는 말없이 땅바닥을 쳐다봤다. 나는 애꿎은 손톱 끝만 긁었다. 째깍째깍 1초가 10분처럼 느껴졌다. 한참 후 윤호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어쩐지 이상했어. 체력훈련하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윤호가 억울하다는 듯 나를 노려봤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때 윤호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나 조금 달라진 것 같지 않냐? 사실 예전에는 학교 갔다, 학원 갔다 피곤해도 밤에 빨리 잠들지 않았거든. 눈을 감아도 ‘티끌모아 태산’이 둥둥 떠다녔어. 그런데 너랑 논 이후로 밤에 눕자마자 잠들어.”
나는 와락 윤호를 끌어안았다.
오늘도 우리는 머릿속에 땀이 줄줄 흐르도록 뛰어 놀았다.
“너 영어학원차 올 시간이야. 오늘은 내가 정문까지 데려다 줄게. 인심 썼다.”
우리는 티격태격 장난치며 정문으로 걸어갔다.
정문 앞 벤치에 현진이가 앉아있었다. 현진이는 우리 반 친구다. 맨 뒤쪽에 앉아서 별로 얘기를 해보지는 않았다. 현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양손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엄지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윤호를 쳐다보며 옆구리를 찔렀다.
“윤호야, 현진이구하기 작전 어때?”
“좋지!”
윤호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손을 쫙 펴 내 앞에 갖다 댔다. 나는 윤호의 손바닥에 내 손바닥을 부딪쳤다. 찰싹! 소리가 내 마음처럼 경쾌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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