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는 풍경, 분유하는 공동체(이기리론) - 정원[2024 신춘문예]

2024. 1. 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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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신춘문예 - 평론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에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과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잊어버려도 상관없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들1이다. 나 혹은 우리에게 구원의 순간을 마련해준 사람들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들까지. 그리고 한편에는 폭력과 무관심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나의 운명일 수도 있었을 그들은 우리에게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공동체는 ‘그들’을 최소한으로 삭감하기 위해, 최대한 재현할 필요가 있다. 시는 공동체의 상처를 재현하고 폭력을 형상화하면서 사회의 ‘앓는 마음’을 공표하고, 독자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며 분노와 비극의 정념을 분유하고 폭압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었다. 시인은 자기 상처를 시에 기입하면서 그 상처의 자리로부터 멀어지고 슬픔을 경감시킨다. 그리고 독자는 그 시적 화자와 더불어 그 ‘거리’와 함께 치유한다.

그러나 상처를 기입하는 일이 시작(詩作)의 전부는 아니다. 상처의 과잉은 하이네가 낭만파 시인들에게 했던 비난처럼 문학을 “거대한 병원(ein großes Lazarett)”2으로 전락시킨다. 감상적 요설로, 배설로 분출되기 쉬운 시인의 사적 생채기는 독자들에게는 심드렁하고, 극단적으로 지겹다. 시가 공동체의 정념을 분유하게 한다면3, ‘거대한 병원’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기왕의 관습적 재현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물론 이제까지 시가 치유를 담보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연을 통한 서정적 치유는 독자의 마음을 위로한다. 그러나 대개 그것은 찰나적 위안에 불과했다. 위안 ‘그 이상’, 폭력 ‘그다음’ 행위를 바라는 독자는 정처 없다. 객관적으로 자기 상처를 진단하고 피학의 주체가 폭력 ‘그다음’ 하는 일을 기입하는 항구적 시는 드물다. 폭력이 발생한 ‘그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다음’ 다음에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폭력을 최소한으로 삭감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상처적 재현으로서 시의 뉴웨이브는 없는 걸까.

여기, 이기리가 있다. 그의 시는 폭력을 긴축할 힘이 있다. 그것의 질료는 재현과 풍경이다. 첫 시집에서 그의 시는 폭력을 구체적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이제까지 해왔던 방식대로 모종의 상처나 가학의 주체, 피학의 주체‘만’을 재현하지 않는다. 이기리는 피학의 주체가 폭력이 발생한 ‘그다음’ 무엇을 하는지 자기-행위를 겨냥한다. 두 번째 시집에서는 무상한 사물과 객체들의 풍경이 아니라 인물로서 풍경을 기워낸다. 실로 풍경을 구성하는 것은 ‘일면식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풍경 구성원 가운데 관찰자로서, 동시에 관찰 대상으로서 시적 화자가 포함된다는 사실은 이기리가 기워내는 풍경의 강력한 매혹을 견인한다. 마치 독자를 관찰자로 만들어 버리는 이 관계론적 사유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기워내고자 한다. 공동체의 물음이 부재하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에 이기리가 “우리”를 연습하는 모습은 증상적이다. 너 나 할 거 없이 부리나케 자기 전시에 몰두한 현대 사회, 어쩌면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너와 나 모두 “우리”에 연루되지 않은 채, 폭력에 연루된 것은 아닐까. 그가, 그리고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폭력은 “우리”에 대한 경솔함으로 발생한 것이니까.

1. 풍경의 공동체

“그때 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떠오른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아니, 이 사람들을 보았을 때의 주변 풍경 속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화자 ‘오쓰’의 머릿속을 수십 년간 굴러다닌 사람들은 죽어버린 첫사랑도, 기구한 운명을 지닌 친구도 아니다. 그들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화자는 그들을 가리켜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 중 첫 번째는 10년 전 오사카에서 세토를 오가는 증기선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던 가운데 만난 사람이다. 만났다기보다는 목격했다는 말이 온당하다. 증기선으로부터 수십 미터 떨어진 섬에서 목격했다. 그러나 오쓰는 말한다. ‘그 사람’을 잊을 수 없는 게 아니라, ‘풍경 속에 있는 사람’을 잊을 수 없는 거라고. ‘풍경으로서의 인물’의 의미다. 그렇다면 오쓰는 왜 그것을 잊을 수 없었을까. 곧, 당장 만날 수 없겠거니와,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를 풍경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때때로 가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하고 미련을 품는다. 소유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갈망하고 미치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풍경이란 바로 이러한 도착(倒錯) 속에서 발견되는 것”4이라고.

그렇다면 인물조차 풍경으로 보는 이기리의 시는 도착적인 것일까? 아니, 그의 시는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오쓰의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어쩌다’ 보게 된 풍경이다. 우리는 어쩌다 본 것들을 마치 운명인 양 취급한다. 남들 ‘몰래’ 본 그것은 나‘만’ 볼 수 있다는 관음증적인 쾌감을 도출한다. 그러나 이기리는 풍경으로의 진입에 거리낌 없다. 그는 ‘의식적’으로 사람들을 보면서 ‘잊지 않기 위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창출한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먼저고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은 나중이다. 인물을 특정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경향적이지 않다. 그게 누구든 ‘사람’이라면 잊지 않겠다는 말이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아니며, 특정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인물에 대한 이기리의 시선은 근본적으로 도착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쓰처럼 풍경을 관망하기‘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인이 말하는 풍경의 근본은 ‘동화’에 있다. ‘성질, 양식, 사상 따위가 다르던 것이 서로 같게 되는 것’. 두 번째 시집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의 표제작 「극세사」와 같은 시는 풍경에 동화하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골프입니다” 하면서 전단지를 내미는 할머니들

아직 비가 내리는 줄 알고 우산을 쓰며 걷는 사람들

“비 안 와요. 우산 더 안 써도 돼요” 하면서 전단지를 계속 내밀고

누굴 기다리느라 옆에서 10분 넘도록 책을 읽는 사내에게는 전단지를 내밀지 않는다

(……)

역사 미화원은 출구 앞에 파란 우산털이통 하나를 놓으며

“아이고, 사람들이 많아도 많아도 너무 많다. 정신없어 죽겠다. 미치겠다” 하면서 계단을 오르는데

지하철에서 방금 내렸는지 수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계단을 내려온다

(……)

그리고 잠깐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사이에

사내가 어디론가 가고 없다

시집을 덮고 반가운 얼굴로 기다렸던 사람을 만난

사내의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을 놓친 자에게 영원이란 행방불명일 것

손에 쥔 전단지를 다 돌린 할머니들이

검은 봉지 속에서 잡히는 대로 한 묶음을 새로 꺼낸다

━「극세사」 부분

“비 안 와요. 우산 더 안 써도 돼요.” 시인이 보는 풍경에는 비가 그쳤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전단지를 내미는 할머니들”과 “우산을 쓰며 걷는 사람들” “역사 미화원”과 계단을 내려오는 “수많은 인파”, 그리고 “책을 읽는 사내”가 있다. 역전의 풍경을 이루는 것은 모두 사람이다. 일면식 없는 이 무량한 사람이 한 사람의 시선에 의해 ‘역전의 풍경’을 이루는 풍경 공동체로 포섭되었다. 시인이 관찰하는 풍경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닐뿐더러 ‘그 사람’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다. 두 번째 시집의 풍경에는 ‘오직 한 사람’이랄 게 없다. 시종 2인 이상의 사람이 등장하여 풍경을 이룬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물을 특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시의 불특정 화법은 풍경에 동화하는 시적 화자를 감지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풍경 말미에 남은 인물이 누구인지 살피면 숨은 화자 찾기는 한결 쉽다. “잠깐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사이에” 사내가 사라졌고, 할머니들은 “손에 쥔 전단지를 다 돌”렸다. 풍경 하나가 기워진 것이다. 사내가 사라진 순간 화자는 순간을 놓쳤고, 그렇게 풍경이 종국으로 치닫는 점을 미루어 볼 때, 화자는 ‘사내’일 것이다. 잇따라 전단지 “한 묶음을” 새로 꺼내는 할머니들에 의해 풍경은 새로이 재생된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질문이 놓일 수 있다. 첫째, 풍경을 기워내는 방법론으로써 관망이 아닌 ‘우리로의 동화’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풍경에 오류는 없었는가? 전자의 질문에 먼저 답하자면, 관망은 풍경 따위를 멀리서 바라보는 행위이기 때문에 관찰자와 대상과의 거리감이 있다.

반면 동화는 풍경에 깊숙이 들어가 타인과 ‘서로-같음’을 연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화는 「극세사」 속 이기리의 풍경을 크게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 볼 때 두드러진다. 곧 ‘지박하는 풍경’과 ‘이동하는 풍경’이다. 전자에는 “전단지를 내미는 할머니”와 “역사 미화원” 그리고 시적 화자 “책을 읽는 사내”가 있고, 후자에는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망원역 풍경에 ‘지박하는’ 할머니들은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내민다. 그러나 옆에서 책을 읽는 사내에게는 전단지를 내밀지 않는다. 동일한 종류의 풍경이기 때문이다. 좁은 공간, 이를테면 작은 카페에 ‘나’와 모르는 사람 A가 (각자 다른 테이블에) 단둘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둘은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 그것은 무지에서 오는 경계심이다. 10분이 지나면, 어느새 둘의 심리적 경계는 허물어진다. 그때, 모르는 사람 B가 입장하면, 같은 시간을 지낸 ‘나’와 A의 동질한 시선은 긴장감 있게 B를 경계-응시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사내’이고, A는 ‘할머니들’이다. 10분 내내 같은 거리에 지박한 채 시간을 보낸 사내와 할머니들은 서로 동질감을 느낄 것이다. 기실 할머니는 사내에게 전단지를 내밀 생각이 없고, 사내는 할머니가 전단지를 내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은연중 알고 있다. 이렇듯 시적 화자는 풍경에서 인물과 동질감을 느끼면서 ‘서로-같음’을 연습한다. 그런 점에서 동화는 타인과 ‘서로-같음’을 연습하고 모종의 문밖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과정이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날들”(「상쇄」)을 뒤로 하고 마침내 너-나를 서로 얽히고설키게 섬유 조직처럼 짜내다 보면 어느 날에는 분명 극세사 이불이 되어 겨울을 “좀 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통하여 펼쳐 든 문학적 공간 속에서 그의 풍경은 사람과 사람을 봉제한다. 그렇다면 이제 일차적으로 중요해진 것은 ‘풍경-하기’라는 치유책에 종착하기까지 ‘풍경에 오류는 없었는가?’이다.

2. 풍경의 오류

오류는 풍경으로의 교량을 건너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그 다리 위에서 이기리는 크게 두 번의 시행착오를 겪는다. 두 번의 오류는 모두 이야기에서 인물을 없애는 작업이다.

아무도 없는 테니스장을 몰래 훔쳐본다 철망은 일정한 모양과 규격으로 짜여져 있다 손가락을 끼워 넣으면 분리된 신체처럼 낯설다 테니스장 안에 있는 손가락이 허공에 떠 있다

잠겨 있는 은색 자물쇠의 표면은 광택을 잃고 녹이 슬었다 햇빛이 반사되어 자물쇠의 그림자가 손목에 새겨진다 하지만 내겐 열쇠가 없는데

안에서 네트가 멍청하게 흔들린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뼈대가 고요에 균열을 내며 균형을 맞춘다 네트의 그물망은 절반쯤 찢어졌고

오래전부터 누구도 꺼내 주지 않아 구정물을 머금고 가라앉은 먼지와 함께 썩어 가는 공이 배수구에 처박혀 있다 천 년쯤 지나야 영영 사라지겠지

나는 문 앞에 엉거주춤 서 있고

━「러브게임」 부분

테니스장을 배경으로 하는 「러브게임」에는 ‘나’ 말고 인물은 “아무도 없”다. 테니스장은 자물쇠로 잠겨 있고, “내겐 열쇠가 없”기 때문에 ‘나’는 “잠겨 있는” “문 앞에 엉거주춤 서 있”다. 테니스장을 시인의 마음이라고 해보자. 그의 마음에는 아무도 없으며, 자물쇠로 잠겨 있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가, 그래서 사람을 의심하는 태도는 마음의 문에 자물쇠를 걸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찢어진 그물망과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먼지와 함께 썩어 가는 공이 배수구에 처박혀 있”는 풍경의 서늘함이 감돌 뿐이다.

「유리온실」에도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수많은 등장인물을 없애고 나 혼자 숲에 남겼다”. 그는 ‘나’가 만든 (가상의) 이야기 숲에서 수많은 타인을 삭제하고 일반적으로 배경이라 불리는 ‘낙엽, 연꽃, 나비, 나무…’만을 풍경으로 설정했다. 상상적 낙원에는 어쩐지 대부분이 “정지된 화면처럼 다시 재생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뭇가지들은 깨진 하늘에 생긴 실금처럼 보였다 어떤 나무는 나보다 작았다 잘려 나간 몸은 찾을 수 없었다”. 사람한테 상처받은 마음이 마침내 인물을 삭제한 것이다. 바야흐로 유토피아의 풍경이 펼쳐질 것이라던 기대와 달리 그곳의 균열은 섬뜩하다. 그 균열 안에서 시적 자아는 분열을 딛고 끝내 속엣것을 토해낸다. “숲이 더 많아졌으면” “인물이 더 있었더라면” 좋겠다고.

자전거도 없고 종종 죽은 뱀을 보기 일쑤였다 나는 이 이야기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발길이 닿는 곳마다 숲에 있는 식물들을 모두 꺾어 버렸다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 연못에 빠져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연못을 향해 달려가다가 어떤 벽에 부딪혀 넘어졌다

━「유리온실」 부분

게티이미지뱅크

오직 할 수 있는 일이 숲을 ‘걷거나’ 이야기의 종말을 생각하는 일뿐이었던 내가, (벽 밖에 있는) 누군가 연못에 빠져 가라앉을 때는 주저 없이 달려간다. 넘어지기도 한다. 시적 화자의 달음박질은 넘어질 만큼, 물리적 육체를 능가하려는 마음은 절박하다. 연못에 빠져 죽고 있는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본능도 있겠거니와, ‘내가’ 얼마나 사람을 원하는지에 대한 간절한 심정이 실려있다. 끝내 시인을 단념시키는 보이지 않는 벽은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 된다.

이렇듯 ‘풍경 만들기’에 실패한 이기리는 더 이상 시적 자아를 혼자 두지 않는다. 풍경의 오류가 내일의 풍경에는 범람하지 않게끔 ‘인물’을 호출한다.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허구적 사태에서 벗어나 ‘지금-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적 사태와 관계하려고 한다. 이 관계론적 사유는 마침내 ‘풍경-하기’를 창안해 내었다.

‘우리’를 기워내는 것이 ‘그’만의 치유책이라면, 치유할 상처는 어디에 있으며 실체는 무엇인가. 첫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는 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더듬는다. 거기에는 시적 화자의 지난한 경험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는 ‘학교폭력’에서 피학의 주체였고, 그가 경험한 폭력은 “우리”의 부재에서 출발한다.

3. 재현으로서의 애(愛), 도(悼)

두 번째 시집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에서 그가 ‘풍경-하기’라는 치유책을 사유한 이유는 누구보다 학교폭력의 형상을 직접 마주했기 때문이다. 피학의 주체가 된 시적 화자에게는 그렇게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생긴다. 그것은 지난날 그에게 ‘폭력을 기입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난날 폭력의 장(場) 한가운데 놓인 ‘나’이다. 상처 치유책으로서 재현은 나를 ‘돌아보는’ 작업이다. 그것은 단순한 회고와 발견의 작업이 아니다. 상처의 순간뿐만 아니라 ‘그날’의 분위기, 감정, 생각 따위를 객관적으로 (재)진술하면서 모호하게 느끼고 있던 감정들을 구체화하고 정확하게 인지하여 적극적인 자기-행위로 재구성하려는 심심한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재현은 애도의 힘을 가진다. 이기리 시에서 재현은 ‘반복강박’을 경유하고 마침내 자기-행위에 종착한다. 따라서 시인은 폭력의 형상들로부터 멀어지기보다는, “다시 눈을 뜨고 끝까지 다 보기로 한다”(「일시 정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을 찾는 「명당을 찾아라」와 같은 시는 학교 폭력의 정황을 꾸밈없이 진술한다. 시인은 “쟤 똥 싸러 간다!”고 외치며 우르르 몰려오는 반 아이들 때문에 “배가 살살 아프면 곤란해”진다. “수업 도중에 손을 들고 나갔다 들어오면 놀림감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누군가 위에서 물을 한 바가지 뿌리기 때문이다. ‘같은 반 친구’라는 평범한 명목으로부터 소외된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그는 언제나 폭력에서━물리적으로━멀어지기 위해 “가뿐히 소외될 수 있는 곳으로”(「명당을 찾아라」) 내달렸다. “절대적으로 혼자이기 위해 혼자인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고 유일하게 혼자여야만”5 했다.

다른 곳을 찾아보자

모두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나갔을 때 나가지 않고

일 층 복도 끝으로 가면 왼쪽으로 꺾을 수 있는데

바로 거기에 처음 보는 창고가 있었어요

━「명당을 찾아라」 부분

화장실에서의 비극이 잠시 중단되었음에도 여전히 ‘혼자’일 수 있는 곳, 아니 ‘소외’될 수 있는 공간을 찾는다. 소외당한 경험은 언제든 소외당할 수 있다는 불안을 창출하고 주체는 그 불안에 대한 방어 전략으로 차라리 또 한 번 소외를 자처한다. 소위 ‘왕따’당한 경험으로부터 촉발된 정신적 외상의 고통을 축소하려는 ‘반복강박’적 전략인 것이다.

청소도 제대로 안 하는지 바닥엔 검은 땟국물이 흘렀고

방충망은 찢어져 있고 천장에는 거미줄들이 득실거렸지만

그래, 여기라면 괜찮아 어쩌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어

등에 거대한 나방이 앉습니다

무서워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부디 나한테 관심을 그만 가져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많은 눈들을 피해 왔는지

아 따라오지 마 좀

제발

━「명당을 찾아라」 부분

존재-없음을 말미암아 불안을 회피하려는 것일까. 명당을 ‘좋은 묏자리’라는 의미로 읽으면 그럴 수 있겠다. 그러나 ‘썩 좋은 자리’라는 의미의 명당이라면 그것은 사람들의 ‘관심-없음’을 염원하는 것이다. 시인은 죽고 싶지 않다. “바닥엔 검은 땟국물이” 흐르는 그곳에서도 “지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쨌든 살고 싶다. 지낸다는 말은 산다(live)는 말이다. 살아야지 지낼 수 있다. 3행 이상을 가진 연과 연 사이에 단 한 문장이 쓰인 까닭은 그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테다. ‘나’라는 존재가 관심과 죽음이 부재한 공간에서 ‘살아서’ ‘지낼 수 있는’,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창고는 그런 점에서 소외되기 ‘썩 좋은 자리’다. 하지만 “등에 거대한 나방이 앉”으면서 창고는 더 이상 명당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관심이다. 더는 숨을 공간이 없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묻는다. ‘이제 어쩔 작정인가요?’ 시인은 말한다. “마침내 친구 뒤통수를 샤프로 찍었다.”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내가 네 손가락 하나 못 자를 것 같아?

커터 칼을 검지 마디에 대고 책상에 바짝 붙였다

친구는 나의 손가락을 자르지 못했다

검지에는 칼을 댄 자국이 붉게 남았다

내 불알을 잡고 흔들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유리문에 비쳤다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부분

심상한 시제와 달리, 내용은 심상치 않다.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네가 짓는 그 웃음이 “내 불알을 잡고 흔들며 웃는” ‘너의 것’이어서 좋은 거라는 동조 식의 해석은 인식론적으로 불가해하다. 그것은 선망도 동조도 아니다. ‘나도 웃을 수 있다’는 의미를 넘어 ‘나도 누군가의 불알을 잡고 흔들며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로서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진실을 주지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너도 상처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누구나 상처받는다’는 참인 명제를 포함한다. 곧 시인이 말하는 상처의 본질이다. 이 사실을 가학의 주체들이 미리 알았더라면, 폭력은 발생하지 않았으리라. 이를테면, 그 손가락을 너만의 손가락이 아니라 같은 “우리”━같은 사람으로서, 같은 반 학생으로서━의 손가락이라고 생각했다면 폭력은 없었다. ‘네 손가락’ 즉 ‘너만의’ 손가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폭력이다.

이기리의 시적 화자가 시 속에서 각인하고 있는 것은 비단 학교폭력만은 아니다. 정신적·신체적으로 미숙한 시절, 조금 일찌감치 정체성을 인지한 시적 화자는 젠더 감수성 관련한 모종의 폭력성을 예감한다. 여기에는 학대당한 주체가 폭력 ‘그다음’ 하는 자기-행위가 드러난다. 즉 적극적으로 자기를 마주하고자 한다.

빨래 건조대에 걸려 있는 허공에서

뒤집어진 무덤처럼 나란히 흔들리고 있는

갈색 브래지어를 옷 속에 숨기고 화장실로 가져온다

까치집인 머리를 털고 옷을 홀딱 벗은 채

거울을 바라보며 후크를 잠근다

평평한 가슴을 지나 허리까지 내려오지만

끈 조절은 할 줄 몰라 두 손을 포개고

고무 동력기보다 글라이더를 만드는 게 더 좋았다

바람에만 의지할 수 있어서

가장 오래 날 수 있는 비행기의 비밀이 궁금해

(……)

손을 잡고 싶었을 뿐인데 우린 같은 성별이라고 한다

더 다가가면 예고된 절교가 기다리고 있다

(……)

숨겨야 할 표정이 생길 때마다

서랍을 열면

이미 숨겨 두었던 정체들과 마주치게 된다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았어

겨드랑이털 하나 없이 매끈하지

물웅덩이에 비친 얼굴이

다른 얼굴들과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싱크로율」 부분

막 잠에서 깬 화자는 “까치집인 머리를 털고” ‘거울’을 바라보며 “갈색 브래지어”를 신체에 이식한다. 변성기도 오지 않은, 겨드랑이가 매끈한 화자는 아직 이차 성징을 경험하지 않은 남자아이다. 젠더적으로 브래지어는 ‘여성의’ 속옷이다. 사회적으로 남성인 시적 화자가 그것을 입고 자기 모습을 주시하는 일은 단순히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타인으로 볼 때, 화자는 젠더와 다른 자기 성 정체성을 ‘거울’을 통해서라도 인정받고 싶다. 곧 성 정체성의 확인 작업이다.

3연의 3행은 그것을 치밀하게 암시한다. “가장 오래 날 수 있는 비행기의 비밀이 궁금해”. ‘비행기의 비밀’에 주안을 두면 이 문장은 ‘날다(fly)’의 의미만으로 읽힌다. 그러나 앞에 ‘날 수 있는’에 방점을 찍고 주름을 펴면 가장 오래 ‘나’일 수 있는 비밀이 된다. 따라서 화자가 본질적으로 궁금한 것은 비행기가 아니라, 성 정체성을 인정받을 방법이다. 그러나 성별이 같다는 이유가 손잡을 수 없는 이유가 된다는 사실과 마주쳤을 때, 화자는 서랍 속에 ‘이미 숨겨 두었던 정체’━그것은 명백히 여성의 옷이다━들과 마주한다.

숨겼다는 말은 ‘어디에’ ‘무엇을’ 숨겼는지 주체가 알고 있다는 말이다. ‘일부러’ 폭력에 침식당하는 이미지를 반추한다. 마주친 것은 미숙한 젠더 감수성이지만 마주하고자 한 것은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과 물웅덩이에 비친 자기 얼굴, 서랍 속 자기의 성 정체성이다. ‘폭력을 기입한’ 사람들이 아니라, 폭력의 장에 놓인 ‘나’의 상흔을 적극적으로 돌아보려는 자기-행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기리 시에서 재현은 자신을 위한 애도 작업이다. 중요한 점은 그의 애도가 일반적인 애도(哀悼)와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기리의 애도(愛悼)는 두 글자 모두 ‘슬픔’의 의미를 가지지 않고, 하나는 사랑을 의미한다. 곧 자신에 대한 사랑이면서 ‘사람’ 자체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나는 타인을 사랑하고 믿으려는 맹목적 태도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나를 맘껏 부려 먹기를. 누군가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웃을 수 있다면.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겠습니다」 부분

상처받은 사람에게 ‘사랑’은 가볍지 않은 단어라서 쉽게 꺼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게 소중한 일인 줄 누구보다 잘 알아서 감히 사랑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랑’(「사랑」)이란 단어를 시제(詩題)로 쓰는 사람이 이기리다. 시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시가 당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은 기어코 당도할 수밖에 없는 게 시다. 위의 시는 이 사실을 방증한다. 두 번째 시집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는 풍경으로서 그 사실을 또한 증명하였다. 사물과 자연으로 풍경을 깁지 않고 인물로서 풍경을 기워내는 시인을 우리는 목격하지 않았는가.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도 그곳에 동화되었다. 그가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풍경의 오류를 오류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4. 상관없는 ‘우리’들과

이기리는 철저히 혼자였던 과거의 상흔이 현재와 미래를 침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과거를 시에 기입하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돌아보면서 재현으로서 지난날을 애도한다. ‘우리’의 부재로 출발했던 처절한 과거는 그렇게 “오직 과거의 시간으로만 남겨 두”(「유실」)기로 하고 현재를 살고 있는 그는 이제 ‘우리’를 꿈꾼다. 거리로 뛰쳐나와 ‘우리’를 사유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그는 ‘풍경-하기’라는 전략을 택한다. 그것은 자연과 객체의 풍경이 아닌 인물로서 풍경을 기워내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이기리의 그것은 인물‘만’으로 이루어진 풍경을 겨냥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인물로서 풍경을 깁는 행위는 인물‘조차’ 풍경으로 본다는 것일 뿐, 풍경에서 자연을 배제하지 않는다.

자연물과 객체, 그리고 비인간을 풍경에서 배제, 혹은 소외할 경우 풍경은 차라리 인간을 소외한다. 인간중심주의,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비인간으로 구별되는 것은 이제 비단 사물과 자연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량화, 규격화, 획일화, 익명화로 ‘비인간화’되어 가는 인간들, 그리고 퀑탱 메이야수의 비판처럼 상관주의(correlationism)6에 의해 추방된 숱한 객체들과 타자들이 있다. 코로나를 통해 우리는 바이러스와 생태 위기가 비단 국지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것을 경험했다. 이들 비인간 타자들이 전 지구적 반란을 통해 경고하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이들의 반란은 인간이 끝내 “우리”를 기워내지 못하면 우리는 또다시 폭력에 연루되는 필연적 비극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신유물론자들의 객체 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브르노 라튀르 행위자연결망이론(actor-network theory) 등은 당면한 지구 위기를 향한 사이렌과도 같다.

이기리는 객체들과 연루되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를 암묵적으로 힐난하면서 “우리”에 연루될 것을 거듭 강조한다.

풍경이 우리를 가두었다.

나아갈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한번 살기로 했으면.

무심코 멈춰버릴 수도 비탈이나 수풀 쪽으로 이탈할 수도 없다.

가족과 친구와 연인이 앉아 있다.

자리가 부족해 가족 중 큰아들은 서 있고 친구는 다리를 꼰다.

연인은 유리창 밖으로 나가 사진을 찍는다.

우리가 보이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언제까지 숨을 수 있을까.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나 연인에 속해 있지 않다.

(……)

가족과 친구와 연인이 정상 부근에서 내린다.

지금부터 걸을 생각인 것이다. 우리는 또 갇힌다.

야생의 초원으로 질주하지 못한다.

우리는 빛의 속도로 사라지거나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서.

우리는 목격되지 않았는데 안내받고 있다.

곧 내릴 지점에 도착하게 됩니다. 잠시 덜컹거릴 수도 있으니 놀라지 마세요.

어쩌면 좋지? 시작이었는데 끝이라니. 우리는 갇힌 풍경을 목도하며 정직하게 앞날의 투명성을 흘려보냈다.

우리를 보거든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를.

━「모노레일」 부분

이 시에서는 풍경에서조차 좌초되어 생존자의 난경에 처한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족’ ‘친구’ ‘연인’은 인공도시를 벗어나 자연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곳은 모노레일처럼 안전하고 인공화된 자연이다. 여기서 모노레일은 세계를 자연(풍경)과 인간으로 구획한다. 그야말로 우리는 풍경에서 뿌리뽑히고 풍경에 의해 갇힌다. 이때 자연은 인간에게 길들여진 풍광이 아닌, 인간을 위협하는 야만과 위험이 된다. 그러나 시가 전개될수록 갇힌 것은 우리가 아닌 ‘풍경’임이 드러난다. 갇힌 우리와 갇힌 풍경은, 곧 이상의 「오감도」의 ‘무서워하는 아해’와 ‘무서운 아해’의 변주와 유사하다. 인간을 위협하는 것이 야만의 자연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정복함으로써 이들을 가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변전이 다시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은 ‘목격되어야’ 하는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그것은 인간끼리의 인간이 아닌, 인간중심주의에서 밀려난 풍경 속 자연과 객체들과의 연루됨이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의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이란 인간의 욕구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도구적 이성의 입장을 취한다. 거기에는 기본적으로 가장자리로 향하는 자연의 편위가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섞이지 못하고 소외당하는 피학의 대상들은 인간중심주의에서의 ‘자연’ 혹은 비인간과 동등한 자리에 위치한다. 우리가 첫 시집에서 맞닥뜨린 이기리의 피학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 객체로서의 인물이었다. 이 시에서 말하는 자연과 객체들과의 연루는, 곧 소외당한 주체들과의 연루이기도 한 셈이다. 이기리가 말하는 풍경은 인간만으로 이루어진 풍경이 아니다. 자연과 연루된, 비인간 타자들과 공생하는 공-산(共-産)7으로서의 풍경이다.

“우리를 보거든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를” 하라는 이기리의 언명은 비인간으로서의 인간으로 풍경에 은폐된 인간을, 타자를, 객체를, “우리”에 빠뜨리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둔다.

따라서 이기리가 기워내는 풍경은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자기 앞에 놓인 길만 보느라 옆을 까먹은”(「일상적 배치」) 모든 생존자에게 내리는 처방이다. 이 처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서로,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손을 풀자 연주를 하자」)이다. 인류세와 기후위기와 핵개인주의, 정체성 갈등과 인공지능(AI)의 진격을 목격하고 있는 현재 이기리가 말하는 “우리”의 패러다임은 기술 문명의 또 다른 위협과 섹트주의와 단절과 고립을 제거하는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각자 과거의 상처는 과거로 고정시키고 ‘지금-여기’에 인간에 대한 일말의 믿음을 꺼내 놓고 각자 기워낸 “우리”라는 풍경을 서로 봉제하자. 연즉 그것은 이기리만 덮는 극세사 이불이 아니라, “우리”의 겨울을 따듯하게 덮는 “거대한 이불”이 될 것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데 세상이 금방 하얘지지는 않”(「우리가 아직일 때」)는 것처럼 쉽지 않겠지만 부단한 “우리”의 연습은 “이 사람과 나는 정말 아무것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놀라울 정도로 닮은 생김새를 보게 되는”(「다른 모습」)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1 ‘잊을 수 없는’ 사람과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의 구분은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박유하 옮김, b, 2010, 34쪽 참조.

2 한상희, 『문학치유적 관점에서 하이네 읽기』, 2017, 129쪽.

3 장-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박준상 옮김, 그린비, 2022.

4 가라타니 고진, 앞의 책, 36쪽.

5 장-뤽 낭시, 앞의 책, 24쪽.

6 퀑탱 메이야수,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이학사, 2017.

7 최유미,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b,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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