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기름집 - 기명진[2024 신춘문예]

2024. 1. 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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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신춘문예 - 소설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기름집은 문을 연 지 삼십 년이 넘었다. 경기도 동쪽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몇 년 전 그 앞에 지하철역까지 생겼다. 안 그래도 잘되는 집인데 더 대박이 터지고 말았다. 해수는 내게 그곳에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찌꺼기가 하나도 없이 깨끗하다는 참기름, 들기름을 산 다음 근처의 민물매운탕집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참깨, 들깨를 한 말씩 짜면 각각 큰 페트로 한 병이 나왔다. 참기름은 삼만 원, 들기름은 칠만 원으로 두 병을 다 하면 십만 원이다. 왕복 네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기름 십만 원어치를 사려고 간다? 내키지 않아 하는 내게 해수는 국산으로 짤 경우에만 비싸다고 강조했다.

중국산은 안 비싸.

그 말을 들으니 더더욱 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기름집 가는 약속을 잡고 말았다. 십오 년 만의 만남이었다. 참기름 한 통을 국산으로 사주겠다고 해수가 제안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근처에 절이 있었다. 해수는 가는 김에 그 절에도 들르자고 했다.

매운탕도 먹고 기름도 짜고 절에도 가 보자.

나는 밥이나 기름보다 절이 제일 당겼다. 대학 다닐 때 해수가 해 준 이야기가 있다. 암에 걸린 외할아버지가 그 절에서 새벽마다 예불을 드렸다. 그리고 일 년 만에 암이 완치되었다.

작년과 재작년에 나는 혼자 동해에 가서 몇 달씩 지냈다. 해변 근처의 여관에 머물면서 매일 절에 갔다. 그곳에서 새벽마다 예불을 드렸다. 사람들이 물어보면 물려받은 강릉의 아파트를 돌보러 내려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예불이든 바닷바람이든 자연식이든 내게 정성을 들이다 보면 나을 것 같았다. 내 병은 관절이 굳고 온몸에 통증이 이는 증상을 가졌다. 병의 진행은 조금 늦출 수 있지만 완치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동해안에서 병은 낫지 못했지만 아픈 몸에는 조금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해수와는 십오 년 동안 만나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다. 나는 칠 년 동안 카타르와 두바이에서 근무했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결혼을 했다. 이듬해 이혼했다. 가게를 하나 차렸고 권리금도 받지 못한 채 접었다. 그 뒤로도 바빴다. 돌이켜보면 기억도 나지 않는 일로 무진 바빴다. 해수에게 많은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주영을 만나서 들었다. 주영은 해수의 죽은 아이에 대해 얘기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주영이 우는 모습은 그때 처음 보았다. 주영은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울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늘 그랬던 것처럼 나와 함께 만화방에 갔다. 밤늦게까지 우리는 일본만화의 해적판을 보며 낄낄거렸다. 주영이 울다 말고 왜 그렇게 이상하게 쳐다보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내가 짓는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말을 하고 말았다.

주영이 너 좀 변한 것 같다.

주영은 내 말에 느닷없이 얼굴을 붉혔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희경아, 너야말로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니?

주영은 내가 슬퍼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나도 슬펐다. 눈물이 쏟아지지 않았을 뿐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나는 울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는 울 겨를이 없어 눈물이 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울음은 터지지 않았다.

주영의 눈물을 보며 정말 변했다고 생각한 건 따로 있었다. 내가 주영이나 해수 무리와 함께하지 못한 동안, 결혼하고 이혼하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장례를 차례로 치르면서도 아무도 부르지 않고 홀로 정신없던 그동안 그들 사이에는 끈끈한 무언가가 생긴 것 같았다.

따돌림을 당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주영과 해수, 그 둘은 나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 주영은 나와 초중고를 같이 나왔고 해수는 나와 같은 대학을 다녔다.

주영과 해수는 내가 없는 사이 더 얽혔다. 둘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주영과 해수를 통해 연결된 친구들이 취미와 결혼과 일로 엮였다. 단톡방도 여러 개라고 했다. 주영은 해수의 결혼식과 딸의 장례식에도 갔다. 해수의 아내와는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주영이 내게 해수의 바뀐 번호를 건넸을 때 나는 따로 연락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해수한테 연락하려면 밤에 해.

주영이 당부하듯 말했을 때에도 흘려들었다. 하지만 어느 잠이 오지 않는 밤,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또 억누르다가 해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수는 잔뜩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우리는 반년 정도 통화만 하고 만나지는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늦은 밤 가끔 전화를 걸면 통화는 오래 이어졌다. 톡이나 문자는 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의 관성이었다. 예전에는 할 말이 있으면 한밤중에라도 만났다. 만나지 못하면 전화통을 붙들고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다. 그 시절을 다 보낸 후의 해수와 나는 예전보다 낮아지고 느려진 목소리로 다시 통화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동안 해수에게 생긴 일들을 주영이 아닌 그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알게 되었다. 아이가 죽고 바다에 뿌렸다, 아내와 자주 다퉜다,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조카 서준과 함께 살고 있다. 주영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다른 것도 있었다.

너희는 선산도 있다면서 애를 왜 바다에 뿌렸어?

해수가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물었다. 선산에 아이를 묻으려 했지만 친척들이 반대했다고 들었다. 그를 대신해 그의 피붙이들 욕을 실컷 해주려 했다. 누군가를 험담하고 싶은 밤이었다. 해수의 대답은 주영이 해 준 말과 달랐다.

자유롭게 해 주고 싶더라. 우리 래준이가 원래 갇혀있는 거 싫어했거든.

래준이는 유모차에 타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업히는 것도 싫어했다. 맨바닥에서도 제 몸으로 기려고 했다. 나중에 걸음마를 배운 다음부터는 어디든 뛰었다.

두 살 때 처음 수영장에 데려갔는데 그 깊은 물속에서도 애가 겁을 안 먹는 거야.

살아있었다면 수영선수를 시킬 생각이었다고 해수가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해수가 왜, 무엇에 대해 사과를 하는 거냐고 물으면 나는 그 무엇이 뭔지 말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 모든 무엇 대신에 미안하다는 말을 해수에게 하고 싶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해수가 먼저 해버렸다. 내 침묵이 너무 길었다.

미안. 내가 너를 불편하게 만들었네.

아니야.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라고 했다.

내가, 다 들어줄게.

진심이었다. 해수가 들릴락 말락 나직하게 답했다.

고맙다.

고맙다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약속 전날이나 당일에 전화를 걸어 기름집에는 가지 못하겠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디지털미디어시티역 안의 첫 번째 플랫폼에서 만나기로 했다. 경의중앙선을 타면 기름집 있는 역까지 한 번에 간다고 해수가 말했다.

해수는 사람도 별로 없는 역 안에서 나를 찾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나는 노선도를 보느라 첫 번째 플랫폼에서 조금 벗어나 서 있었다. 노선도 앞이라고 말했는데도 해수는 한참이 지나서야 나를 찾았다.

하나도 안 변했네.

해수가 내게 말했다. 나는 해수의 등 뒤에 설치된 투명 아크릴에 비친 나를 보았다. 내 모습 위로 하얀 시 구절이 주름처럼 박혀있었다. 얼굴은 시의 제목이 가렸다. 해수의 얼굴에는 야구모자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해수에게도 같은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모자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했다. 해수는 우연히 만나면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해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약속 없이 마주쳤다면 서로를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배낭을 갖고 왔어야지.

나는 에코백 하나만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해수는 등을 돌려 자신이 멘 커다란 배낭을 보여주었다. 든 게 별로 없는지 배낭이 납작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 해수는 기름이 무겁다고 말했다.

어깨가 상할 거야.

고작 참기름 몇 병에 어깨가 부서지겠냐고 말하려는데 주영이 떠올랐다. 주영이 해수에게 내 몸 상태에 대해 뭐라고 말한 게 분명했다. 내게 해수의 온갖 얘기를 하는 주영이 해수에게는 설마 나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했을까. 내게도, 주영에게도, 내 앞에 선 해수에게도 넌더리가 났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주영에게 당부했었다. 열차가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나는 해수를 붙들고 주영을 욕하거나 내 몸에 대해 고백했을지도 모른다. 마침 열차가 도착했다.

평일 한낮에 텅텅 빈 열차를 탈 수 있다니. 백수라 좋네.

해수가 열차 안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옆에 앉은 나는 주영에게서 들은 얘기를 건넸다.

호두과자는?

맞은편 끝자리에 승객이 한 명 있었다. 내 목소리가 그에게 닿았는지 고개를 들어 우리가 앉은 쪽을 쳐다보았다.

접은 지 좀 됐어.

주영은 해수가 인터넷을 통해 호두과자를 구워서 판다는 얘기는 했지만 관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해수를 만나면 어디로 주문하면 되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내 얼굴을 보며 얘기하던 해수가 앞을 보았다. 맞은편 차창을 통해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얼굴에 잔뜩 실주름을 띄운 해수가 모자 바깥으로 튀어나온 머리칼을 집어넣으려 애썼다.

반년 동안 몇 번이나 해수와 통화를 했다. 하지만 해수는 일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주영이 해수와 통화를 하려면 늦은 시간에 하라고 해서 나는 그가 낮에는 과자를 굽느라 바쁘려니 했다. 평일 오전에 기름집 가는 약속을 잡으면서도 그가 왜 바쁘지 않은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일을 하지 않으니 누군가에게 무슨 일을 하고 사냐고 묻는 게 내키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게 더 많았는데도 나와 해수 사이에는 할 말이 넘쳤다. 통화는 늘 길었다.

주영이가 말을 하다 말았나 보네. 하긴 그 자식은 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니까.

비죽이는 해수의 입 모양이 차창에 비쳤다.

친구놈들 중에 주영이 그 자식만 주문을 안 해줬어. 다들 인사로라도 두어 상자는 주문해주는데.

불현듯 웃음이 터졌다. 해수도, 주영이도 참 변하지 않았다. 내가 웃자 해수는 잠깐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곧 따라 웃었다. 예전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 웃으면 바로 따라 웃었다. 이유 따윈 상관없었다. 맞은편 끄트머리에 앉은 사람은 이제 대놓고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해수는 호두과자를 구워 팔던 일을 얘기했다.

우리집 이층이 비어있거든. 거기에다 기계랑 냉장고 같은 걸 들여놓고 시작을 했었지.

나는 돈은 좀 벌었냐고 물었다. 해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리 많이 팔아도 본사에 떼어주고 나면 우리한테는 남는 게 없더라.

우리. 나는 해수가 말하는 우리를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우리? 그 조카, 서준이?

해수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왜 웃냐? 하고 물었더니 해수는 급하게 웃음을 거두었다. 씁쓸한 표정만 남았다.

주영이가 서준이 얘기도 했지?

나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수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 있었고 서준은 형의 막내아들이었다. 주영이는 서준을 가리켜 해수의 등골을 파먹는 놈이라고 했다. 얼마 남지도 않은 해수의 돈을 노리고 집에 들어와 앉았다. 아무래도 해수가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것 같다고 주영은 말했다. 그때 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에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가 함께 자란 시절에는 좀처럼 쓰지 않던 단어였다.

래준엄마가 집을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서준이 짐을 싸들고 해수의 집으로 들어갔다. 주영은 돈 때문에 도망 다니다 죽은 형의 아들을 거둔 해수가 너무 등신 같다고 했다. 서준은 해수와 열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서준을 해수가 불러들였다. 죽으려는 애를 구해냈다고 해수는 주영에게 말했다. 주영은 제 일도 아니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해수와 서준의 다른 피붙이들은 다들 나 몰라라 하며 힘든 일은 전부 해수에게 떠넘긴다고 했다.

우리를 대놓고 흘끔거리던 승객은 공덕역에서 내렸다. 해수는 내게 공덕역에 가봤냐고 물었다. 나는 졸업한 이후로는 갈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이십 년 정도 공덕역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진짜 많이 변했어.

어떻게 변했냐고 묻자 해수는 했던 말을 또 했다. 진짜, 많이 변했어. 입을 꾹 다물더니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열차 안에는 우리 둘밖에 없었다. 승객을, 낯선 사람을 보고 싶었다.

객차 안이 무섭다는 생각이 밑도 끝도 없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간신히 손을 움직여 해수의 무릎 위에 놓인 배낭을 움켜쥐었다. 배낭 안으로 딱딱한 막대기 같은 게 만져졌다. 해수는 그런 나를 보면서도 이촌역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두 명의 승객이 열차에 올랐다. 사람들은 이쪽과 저쪽으로 흩어져 앉았다. 나는 해수야,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았다. 내가 병에 걸렸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내 입으로. 이 병은 이상한 병이라 대개는 발병하고 십 년 안에 죽는데 열 명 중 한 명은 삼사십 년을 넘게 살기도 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희경아 너는 열 명 중 그 한 명이 될 거야, 하고 해수가 말해주길 바랐다. 주영은 야, 너처럼 독한 애는 금방 안 죽어, 내가 장담해, 이렇게 말했다. 실실 웃기까지 하면서, 망할 자식.

왕십리역에서 해수는 나도 아는 그의 지인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걔가 왕십리에 건물을 샀대.

사업이 흥해서 차도 벤틀리를 뽑았다고, 해수는 자기 차라도 되는 양 자랑스레 말했다.

나는 그 친구도 호두과자를 사주더냐고 물었다.

작년 추석에 서른 상자나 주문해 줬어.

고작 서른 상자만?

해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무려 서른 상자지. 야, 주영이를 생각해 봐.

지난 설에는 또 얼마나 주문을 해 주더냐고 물었다. 해수는 모자챙을 아래로 잡아당기며 대답했다. 눈이 가려졌다.

설 전에 장사를 접었으니 주문했더라도 못 만들어줬지.

우리는 잠시 동안 서로 다른 데를 쳐다보며 입을 닫았다. 회기역에 이르자 해수가 말했다.

걔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냐.

나는 정말 그렇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음속으로 이런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냐? 해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뭐가? 하고 묻는 그에게

호두과자, 하고 답했다. 팔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나, 호두과자 진짜 좋아하는데.

해수는 다시 모자챙을 추켜올리며 다정하게 웃었다. 아직 기계가 집에 있다고 했다.

냉동 재료가 좀 남았거든. 서너 판 정도는 구울 수 있어.

당장 내일 보내주겠다고 주소를 말하라는 해수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밀가루를 먹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

절에는 가지 못했다. 기름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너무 길었다. 절에 다녀오면 오늘 안으로 기름 사기는 글러질 것 같았다. 번호표도 나눠주지 않았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줄을 살피는 해수를 보며 내가 말했다.

절은 다음에 가자.

해수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나를 보았다. 햇빛 때문에 찌푸리는 것인지 아니면 속상해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환한 데 서자 모자챙이 그늘을 드리워도 해수의 얼굴은 훤히 보였다. 햇빛이 닿으면 훌쩍 나이 들어 보였다. 그런 얼굴로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거미줄 같은 주름을 잔뜩 잡은 채로.

야, 자꾸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해수는 배낭을 내리더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등받이가 없는 접이식 캠핑 의자였다. 척 소리 내어 펴더니 나보고 앉으라고 했다. 안 그래도 무릎이 뻣뻣하던 참이었다. 차라리 걸으면 덜 아픈데 서 있기만 하면 통증이 더 심해졌다. 주영이 나에 대해 뭐라고 했건 간에 아무튼 의자는 반가웠다. 끙 소리를 내며 의자에 앉는 나를 해수 앞에 선 노란 원피스를 입은 노인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줄이 줄어들 때마다 의자를 앞으로 옮겼다. 한 발짝 보폭만큼 질질 끌어당겼다. 시간이 점점 정오에 가까워졌다. 해수는 내게 배가 고프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해수는 내게 조금만 참자고 말했다.

매운탕도 내가 쏠게. 간만에 영양 좀 보충하자.

해수는 양산을 꺼내 내게 씌워주었다. 자신은 모자를 써서 괜찮다며 양산의 그늘을 내게만 드리웠다. 남색 바탕에 하늘색 꽃무늬가 새겨진 양산은 래준엄마가 놔두고 간 것일지도 몰랐다.

입안이 점점 말라왔다. 나는 물을 챙겨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싱크대 위에 텀블러를 꺼내두고 그만 잊고 나왔다. 해수가 나의 마른입 다시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시선을 느껴 올려다보니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갑자기 이 모든 걸 견딜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다리가 잘 펴지질 않았다. 주저앉듯 도로 몸을 내렸다.

아이 엄마가 몸이 안 좋은가 보네.

해수 앞에 선 노인이 다가와 내 이마를 짚었다. 차갑고 주름진 손이 이마를 식혀주었다.

노인은 등에 멘 배낭을 내리더니 조그만 컵과 생수병을 꺼냈다. 물을 따라 내게 내밀었다. 스테인리스 컵 표면에 번진 하얀 얼룩을 보았다. 나는 마지못해 입술을 갖다 대었다. 미지근한 물이 입안을 적시고 식도를 따라 위 속으로 스며들었다. 옆에서 해수가 무슨 말인가를 했다.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기름집 안은 무척 넓었다. 벽을 따라 기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직원은 모두 세 사람이었다. 그중 나이 든 여자가 손님들의 주문을 받았다. 물어보는 게 많았다. 참깨와 들깨 중 무엇으로 고를 건지, 국산으로 할 건지 중국산으로 할 건지, 몇 말을 볶을 거며 볶는 정도는 어떻게? 병은 페트 아니면 유리? 여자는 들은 것들을 전표에 길게 메모했다. 줄이 쉽사리 줄지 않는 게 당연했다. 체크 리스트처럼 간단하게 작성할 수도 있는 것들을 직원은 일일이 물어보고 받아 적었다. 해수는 내게 자신이 알아서 주문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라고 했다.

어차피 기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국산만 고집하게 되었으면서도 마트에서나 비싸게 살 줄 알았지 이렇게 시간과 품을 들여서 사러 다닐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참기름은 국산 두 말과 중국산 한 말, 들기름은 국산과 중국산을 각 한 말씩 주문했다. 볶기의 정도는 국산 참기름은 전부 물기만 날리듯 가볍게 볶아 짜달라고 했다. 중국산 참기름은 달달 볶아달라고 했다. 들기름도 국산은 가볍게, 중국산은 달달. 짠 기름은 모두 페트병에 담아 달라고 했다.

유리병으로 하면 안 될까?

나는 기름집 안에서도 여전히 캠핑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이 든 여자는 몸을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사모님, 집이 어딘데?

여자의 뒤로 다른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기계와 기계 사이를 바삐 오갔다. 한 명은 호리호리한 젊은 여자이고 다른 한 명은 예순쯤 되어 보이는 남자로 몸이 다부지고 머리가 새까맸다. 내가 아무런 대꾸도 않자 해수가 대신 답했다.

우리, 집 멀어요. 마포 근처요.

아유, 멀리서 오셨네. 유리병은 무거우니까 멀리 사시면 그냥 페트병에 넣어가요. 댁에 가서 옮겨 담으시면 되지.

병을 몇 개 사 온 다음 그걸 끓는 물에 소독하고 식힌 후에 기름을 옮겨 담는 과정을 떠올렸다. 집에는 깔때기도 없었다. 그냥 유리병에 넣어 들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괜찮으니까 유리병으로 할게요.

아유, 사모님. 안색도 안 좋은데 무겁다니까 그러네. 사장님 혼자서 다 짊어지고 가게 하려고?

옆에서 해수가 말을 잘랐다.

아닙니다. 참기름, 들기름 국산으로만 한 병씩 유리병에 넣어 주세요. 배낭이 커서 괜찮습니다.

나는 어깨에 멘 에코백을 당기며 해수를 보았다. 해수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나이 든 여자에게 사장님이냐고 물었다. 사장이 맞았다. 그런데 여자는 다른 직원들을 가리켜 보이며 저 둘도 다 사장이에요 하고 말했다. 깨를 씻고 털고 짜는 동안 해수는 틈틈이 이것저것을 물었다. 여자는 메모를 전달하고 포장을 하면서도 물어보는 것들에 일일이 답을 다 해주었다. 해수는 휴일이 언제인지 기계들 관리는 힘들지 않은지도 물었다. 깨농사와 근처 오일장에 대해서도 물었다. 사장은 빠짐없이 답을 해 주었고 묻지 않은 것들까지 말해 주었다. 공동사장이라는 직원 둘을 가리켜 보였다.

애아빠랑 저희 딸이에요.

해수가 그 말을 듣고 구부정한 어깨를 활짝 폈다. 그들을 찬찬히 살폈다. 아, 하는 감탄사도 내뱉었다. 그러더니 웃었다. 얼굴을 뒤덮은 주름을 타고 웃음이 거미처럼 기어올랐다.

우리는 기름집 근처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민물 매운탕은 먹고 싶지 않다고 내가 잘라 말했다. 해장국집도 있고 곰탕집도 있었지만 내가 한정식을 고집했다.

기름도 다 네가 사주고, 짐도 다 네가 들고. 점심은 내가 사 줄 거니까 암말 마라.

해수는 페트병과 유리병으로 잔뜩 부른 배낭을 짊어지고서 앞장을 섰다가 마지못한 듯 뒤로 물러섰다. 내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따라왔다. 미리 검색을 해두었다. 기름집 근처에 산에서 직접 캔 나물만 상에 올린다는 한정식집이 있었다.

처음에는 똑바로 걸으려 애썼다. 뒤에는 해수가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곧 한쪽 다리를 질질 끌듯이 걸어야 했다. 다른 날보다 유독 힘들었다. 고촌에 있는 집에서 대학로에 있는 병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하루 종일 검사를 받을 때에도 이렇게까지 피곤하진 않았다. 나는 아직 한낮인데도 하루를 다 보내버린 것처럼 비틀거리고 절룩거렸다.

진짜 잘 먹었다!

식당을 나와 역으로 가는 길에 해수는 몇 번이나 잘 먹었다고 말했다. 고맙다는 말도 여러 번 했다. 일일이 대꾸는 하지 않았다. 내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모자 좀 벗어라였다. 귀 옆으로 땀이 맺히는 게 보이는데도 해수는 모자를 계속 쓰고 있었다.

밥 먹는 동안에도 벗지 않았다. 벗겨버리고 싶었지만 그냥 놔두었다. 참기름과 들기름과 캠핑 의자까지 혼자 다 들겠다는 해수에게 성질대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밥을 먹고 나와 역을 향해 걸으면서 앞으로 그와 나누게 될 통화에 대해 생각했다. 오늘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몰랐다. 주영의 험담을 할지도 모르고. 당분간은 통화를 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득 해수와 함께 또 두 시간이나 더 차를 타고 가야 한다는 게 버거워졌다. 안녕, 하고 돌아서서 바로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수는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앞만 보고 걸었다. 역에 다다라 계단이 나오자 무거운 짐을 지고도 성큼성큼 올랐다. 먼저 올라가 나를 기다렸다. 그는 비어있는 손을 자꾸 바지에 문질렀다. 다른 쪽 손으로는 캠핑 의자를 꼭 붙들고 있었다. 나는 해수의 손을 잡고 싶었다. 걸음이 힘들어서 무어라도 좋으니 잡고 기대고 싶었다. 해수가 계단을 도로 내려오길 바랐다. 하지만 해수는 움직이지 않았고 내게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점심을 먹는 동안 나는 그에게 환경호르몬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그게 내 병의 원인일 수도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 병의 원인은 의사도 몰랐다. 미세플라스틱과 기후변화와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식재료에 대해 내가 두서없이 떠드는 동안 해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상에 오른 음식들이 하나같이 다 신선하고 맛있다는 말만 두어 마디 했을 뿐이다. 나는 내 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면서 밥 먹는 내내 환경오염과 인류의 미래에 대해 떠들었다.

해수는 신중하게 젓가락을 움직이며 반찬을 집었다. 오랫동안 씹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골고루 다 먹었다.

한정식집 방 안에서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바닥에 앉은 내가 일어서려고 할 때 도와주려고 했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휘청거리는 상을 붙잡고 혼자 일어서려고 애썼다. 그때 해수의 얼굴이 어땠는지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상 앞에서는 손을 뿌리쳐놓고 계단 아래에서는 그 손을 잡고 싶어 하는 나를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하철 안에서 해수는 페트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지 않았는데도 고소한 냄새는 열차 안으로 가득 퍼져나갔다.

봐 봐.

해수는 내 눈앞에 페트병을 바짝 들이밀었다. 맑은 기름이 느리게 흔들렸다.

찌꺼기가, 아니 침전물이 하나도 없지?

과연 병 안에는 가라앉은 게 하나도 없었다. 차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노란 기름을 투명하게 비추었다. 나도 해수도 한참 동안 페트병 안을 들여다보았다. 해수가 병을 흔들어 보였다.

추울렁 추울렁 느리게 흔들리는 기름이 참 맑았다.

우리도 저런 기름집 하나 차려 보려고.

고개를 들어 해수를 보았다. 그도 나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비밀이라도 말해주는 듯한 얼굴이었다. 해수는 그 기름집이 문을 연 해에 서준이 태어났다고 했다.

찾아보니 신문 기사도 있더라.

부부는 젊은 시절 부지런히 일해서 시장 근처 목 좋은 자리에 가게를 얻었다. 딸 하나를 얻었고 어느덧 큰딸은 자신이 기름집을 물려받겠다고 했단다.

아까 본 그 딸이 물리학과를 나왔대.

별걸 다 조사했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게 다였다. 내 대답이 아무리 짧고 퉁명스러워도 해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렸다.

서준이도 물리학과를 나왔어.

해수는 눈을 앞으로 한 채 말을 이었다. 그가 앉은 앞으로 차창이 보였다. 차창 너머에는 풍경이 있었다. 나는 멀미가 났다. 눕고 싶었다.

걔가 호두과자 일은 도저히 못 하겠대. 걔 심정이 나도 이해는 가. 나랑 둘이 방에 틀어박혀서 무거운 기계를 돌려가며 과자만 구워대는 거, 젊은 애가 할 일은 아니지. 게다가 걔는 단 걸 좋아하지도 않거든.

혼잣말 같은 그 말을 듣자 방금 갔던 기름집의 풍경이 오래된 기억처럼 바랜 빛깔로 떠올랐다. 유리창에는 기름집의 이름이 하얀색 스티커로 크고 반듯하게 붙어있었다. 스티커에는 흠 하나 없었다. 기계들은 오래되었지만 기름때 눌어붙은 자국 하나 없었다. 반질거리고 반짝거렸다. 햇빛을 받은 기계는 가게 안으로 은색의 빛을 퍼뜨렸다. 앞치마를 두른 나이 든 부부와 데님셔츠의 소매를 단정히 걷어 올린 딸은 한 몸처럼 움직이며 손님을 응대했다.

서준이 그 자식은 호두과자를 백 상자, 천 상자를 팔아도 남는 게 없다는 말만 하고 입출금 내역도 해수한테 안 보여준대.

주영은 흥분해서 말했다.

해수 걔가 기계를 돌리다가 디스크가 터졌거든. 병원엘 가야 해서 하는 수 없이 몇 번 자리를 비웠나 봐. 그랬더니 서준이 그 자식이 어떻게 한 줄 알아?

주영은 마치 자기 일인 양 화를 내었다.

래준엄마한테 전화를 해서는 오라고 했대. 와서 호두과자 좀 구우라고. 래준엄마가 기가 막혀서, 래준아빠랑은 진작에 헤어진 사이예요라고 했더니 서준이 그 새끼가 하는 말이, 말을 멈춘 주영은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었다.

아직, 법적으로 정리된 거는 아니잖아요라고 했대.

해수는 기름 짜는 기술을 익힐 거라고 말했다.

한 번 익히면 대를 이어서도 할 수 있어. 정직하게만 한다면, 맛이랑 향은 문제없을 거래.

페트병 속에서 출렁이던 기름은 해수의 무릎 위에서 잔잔하게 잦아들었다.

아까 봤지? 기름 짜기 전에 볶은 깨를 한 번 더 터는 거. 그러니까 침전물이 하나도 안 생기는 거야.

서준에게 일을 제대로 가르쳐 보겠다고 했다. 그의 입가에 배어나는 미소가 점점 커졌다.

해수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일하는 자신과 서준을 그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 머릿속에도 그들이 그려졌다. 곧 지워졌다. 볼품없이 낡은 야구 모자를 쓴 해수는 내가 아닌 차창을 향해 활짝 웃었다. 그의 얼굴 옆에서 나의 몸은 점점 허물어지듯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가게 이름은 서준기름으로 해주려고. 그러면 걔도 책임감을 갖고 더 열심히 하지 않겠어?

해수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입속으로 래, 준, 하고 소리 없이 발음했다.

해수와는 역 밖으로 나와 지상에서 헤어졌다. 상암에 사는 해수는 고촌에 사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우겼다. 택시를 타겠다는데도 자꾸 고집을 부리며 참기름을 건네려고 하지 않았다. 주영이 대체 뭐라고 했길래 그러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도 나를 향해 몸도 아픈 애가 왜 그러냐 따위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

너, 지금 안 가면 다시는 안 볼 거야.

그 말을 해서야 해수를 겨우 보낼 수 있었다. 그가 등을 보이기 전에 나는 하루 종일 묻고 싶었던 걸 겨우 입 밖으로 꺼냈다.

왜 나한테 기름집을 보여줬어?

나의 오랜 친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친구들 중에 너만 한 눈썰미를 가진 애가 또 어딨냐?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해수는 태연한 얼굴로 잘도 했다. 쑥스러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해수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기에. 나는 오랫동안 해수가 참 많이 보고 싶었다.

해수는 가고 나는 반대쪽으로 걸었다. 곧 멈춰 섰다. 다리가 아팠다. 마침 어느 건물 앞 그늘진 곳에 앉을 만한 데가 있어서 거기에 허리를 내렸다. 높다란 건물의 그림자는 도로의 이차선까지 어둡게 뻗어있었다. 해수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돌아선 해수는 횡단보도를 건너 멀지 않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다. 터덜터덜 신발을 털 듯이 걸었다. 모자를 벗었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긁다가 탈탈 털었다. 다시 모자를 쓰더니 곧 다시 벗었다. 모자 밖으로 비죽이 튀어나온 머리칼의 색깔은 이미 보았다. 하지만 백발은 상상하지 않았다.

해수의 옆머리는 희끗희끗했지만 정수리는 하얗게 세어있었다. 만으로 아직 쉰이 되지 않은 나의 친구는 손가락 끝으로 백발을 탈탈 털고 손빗으로 빗어 넘기고는 모자를 도로 썼다.

빈손을 털었다. 모자 속에서 묵어버린 하루를 털어내려는 것 같았다. 손끝에 달라붙는 삶을 떨치려는 것 같았다. 주영이 보고 싶었다. 만나서 잔뜩 수다를 떨고 싶었다. 해수를 다시 보게 될 것 같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새치 많은 머리를 까맣게 물들인 주영을 만나 아무라도 좋으니 한 놈을 찍어서 실컷 험담을 하고 잔뜩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나는 가방을 고쳐 메고 일어났다. 마침 택시가 보였고 팔을 들었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가방에 든 유리병 두 개가 꺾이는 관절처럼 덜그럭거렸다. 고소한 향은 아른아른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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