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하고 싶지 않은 말

길윤형 기자 2024. 1. 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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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0월10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충돌 사태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뉴스룸에서] 길윤형│국제부장

“우리는 갈 데가 없어요. 갈 데가 없습니다.”

하마스의 선제공격으로 가자 전쟁이 시작되고 사흘이 지난 지난해 10월10일 오후 2시24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하마스를 ‘순전한 악’이라 저주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강력한 지원 의사를 밝힌 짧은 연설에 나섰다. 이 연설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스라엘의 ‘철의 여인’이라 불리던 골다 메이어(1898~1978) 전 총리와 나눈 대화 한 토막이었다.

4차 중동전쟁인 욤키푸르 전쟁(1973)이 시작되기 직전 갓 상원의원이 된 젊은 바이든이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메이어 총리는 자신을 찾아온 전도유망해 보이는 미국의 젊은 상원의원에게 이스라엘이 직면해 있는 엄중한 안보 현실을 설명한 모양이다. 바이든의 얼굴에 실망감이 드러나자 메이어 총리는 ‘함께 사진을 찍겠냐’고 제안했다.

기자들을 마주 보며 잠시 말없이 서 있던 메이어 총리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바이든 상원의원. 우리는 여기에 비밀 무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갈 데가 없어요. 우리는 갈 데가 없습니다.” 옛 유대 왕국이 로마 제국에 망한 뒤 2000년에 걸친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겪은 이스라엘은 갈 데가 없으니 절박하게 싸울 수밖에 없다는 각오를 밝힌 것이었다.

이 일화를 전해 듣고 ‘이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겠구나’라는 공포가 엄습해 왔다.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뿐 아니라 땅을 빼앗긴 민족은 모두 갈 데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갈 데가 없으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한탄하며 독립운동에 나섰고, 팔레스타인 사람들 역시 갈 데가 없으니 가자와 서안 지구에서 버티며 70년 넘게 투쟁을 이어가는 중이다. 세상 모든 불행은 ‘강자’가 ‘약자’의 절박한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폐적인 피해의식에 절어 있을 때 생기는데,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대통령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에 동조하게 되면 점점 더 커지는 불행을 막기 힘들어진다.

미국은 목하 유럽과 중동에서 ‘두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진심으로 우려되는 것은 미국의 장기적 ‘국력 쇠퇴’가 아닌 ‘지도력 상실’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선 중국과 ‘글로벌 사우스’의 인도 등이 미국 등 주요 7개국(G7)의 대러 제재에 동조하지 않으며 러시아 경제를 질식시키려던 바이든 대통령의 구상을 좌초시켰다. 그로 인해 장기 지원 피로감이 커지면서 미국은 우크라이나에서 ‘정돈된 후퇴’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미국 매체 폴리티코는 12월27일 미국과 유럽의 목표가 ‘러시아에 대한 완전한 승리’에서 ‘종전 협상에서 나은 상황을 만드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고 날카롭게 짚었다.

가자 전쟁을 둘러싼 상황은 더 처참하다. 미국은 2만명 넘는 이들이 무참히 희생된 비극을 하루속히 멈춰야 한다는 국제 사회의 여론에 사실상 홀로 맞서고 있다. 193개 유엔 회원국 가운데 153개 국가가 ‘인도적 휴전’을 요구하는 총회 결의(12월12일)에 찬성(반대 미국 등 10개국)하는데, 미국 홀로 고집을 피워 12월22일 채택된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서 “적대행위 중단”이라는 문구를 빼냈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11월 대선 판도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12월21일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가자 전쟁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대응에 지지한다는 응답은 33%에 머물렀다. 바이든의 주요 지지층이어야 할 18~29살의 지지 의견은 20%(72% 반대)에 불과했다.

만약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에서 패한다면 결정적 변곡점은 가자 전쟁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로 인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돌아온다면 지난 70여년간 한-미 동맹에 기대 번영해온 한국은 심각한 충격을 각오해야 한다. 핵보유국이 된 북은 ‘선제 핵사용’ 독트린을 입법화한 데 이어 핵을 사용해 “남조선 전 영토 평정”이란 위협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대화의 가능성은 크게 줄고, 증오가 한반도를 내리누르고 있다. 하고 싶지 않은 얘기지만 돌아온 트럼프가 바이든 대통령이 워싱턴 선언 등을 통해 내놓은 확장억지에 대한 공약을 약화시킬 수 있다. 한국은 그동안 유지해온 안보 정책의 큰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고민을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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