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자유에 민감하지 못한 언론, 패배할 수밖에”
올해는 ‘자유언론실천선언’(선언)이 나온 지 50주년 되는 해다.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와 보도지침을 무기로 언론을 옥죄던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 180여명은 선언을 채택함으로써 언론 자유란 스스로 쟁취·실천해야 하는 과제라는 사실을 대내외에 밝혔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먼저 나서자 이틀 사이 전국 31개 신문·방송·통신사 기자들도 일제히 언론 자유를 위한 결의문을 채택하고 나섰다.
한겨레는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명예이사장과 정준희 한양대 겸임교수(언론정보대학원)의 대담을 마련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언론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선언이 갖는 의미 등을 짚어봤다.
이부영 이사장은 1974년 선언 당시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겸 노동조합 간부로 일하며 선언이 나오는 데 깊이 관여했다. 선언 직후인 1975년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기자들이 꾸린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을 2020년부터 맡고 있다.
정준희 교수는 2019년부터 한국방송(KBS) ‘열린토론’ 진행자로 활동했으나, 박민 사장 취임 직후인 지난해 11월17일 방송을 끝으로 하차했다. 당시 그는 “석연치 않은 경영진 교체, 뒤이어 들이닥친 프로그램 폐지와 진행자 교체, 제작진의 전보. 이걸 토론의 의제로 올리지 못하는 열린토론에 더 남아 있을 까닭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유튜브 채널 ‘정준희의 해시티비’를 운영 중이다.
대담은 12월27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진행됐다.
정준희 1974년 10월24일 선언 발표는 한국 언론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이게 어느 날 갑자기 터져나왔다기보다 뭔가 성숙되는 과정이 있었겠지요.
이부영 1969년 3선개헌 이후 많은 언론인이 언론 탄압을 예상하며 언론계를 떠나는 일이 잇따랐고, 1972년 10월17일 박정희의 유신체제 선포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됐습니다. 이런 언론에 대한 억압 속에서 몇 차례 ‘언론 자유 수호선언’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 파장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천관우 주필의 지사적 정신을 이어받은 동아일보 기자들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언론 자유를 지켜내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겁니다.
정준희 선언에 앞서 나왔던 언론 자유 수호선언의 파장이 적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이부영 의분에 못 이긴 몇몇 개인이 주도한 탓에 조직적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다수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먼저 그해 3월 노동조합을 만들었는데, 당시 상위 노조인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없어서 전국출판노조 지부로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신고필증을 내줘야 할 서울시는 신고를 받아주질 않고 회사에서도 노조 간부 10여명을 해임시키는 등 대대적으로 탄압했습니다만, 하루이틀 만에 180여명이 조합에 가입하는 결과로 이어졌지요. 이렇게 노조를 기반으로 조직을 갖춘 뒤 10월24일을 기해서 전격적으로 선언을 한 거죠.
정준희 선언에서 핵심적으로 표방했던 가치를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 이를테면 ‘이 기사가 1면에 실리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기사의 용어가 왜 이렇게 바뀌었느냐’ 이런 것들을 내부에서 세세히 따지며 싸우는 구체적 실천이 이어지면서 나온 결과물이 이듬해 1월10일 ‘자유언론 실천강령’이었습니다. 선언이 구체적 강령, 지침으로 바뀌는 연결 과정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지요.
이부영 선언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사실보도 노력이 이어지자 사주와 회사 쪽에서는 국장과 부·차장을 통해 이를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나섰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각 부서에 ‘자유언론실천특위’라는 기구를 만들어서 맞섰고요. 여기서 매일 저녁 언론 탄압이나 권력과의 부정한 야합 등을 ‘알림’이라는 형식으로 고발하고 나섰더니 국장단이 못 견뎠어요. 그 덕분에 그들의 방해는 점점 줄었는데, 딱 12월20일을 넘어가니 동아에서 광고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암흑 속의 횃불’ 대형 광고 등 민주시민들의 크고 작은 격려광고가 밀려들었습니다. 저는 그 힘이 나중에도 이야기하겠지만, 한겨레 창간 모금을 거쳐 촛불혁명으로도 이어졌다고 봅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5년 1월 수많은 시민의 격려광고에 크게 고무됐다. 이에 같은 달 10일 편집국 긴급총회를 열어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반민족적 반민주적 반문화적 잘못을 색출, 이를 고발 보도한다’ 등의 내용이 담긴 7개 항의 ‘자유언론 실천강령’을 채택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반면 광고탄압 장기화는 혹독한 시련으로도 이어졌다. 회사 쪽은 3월5일 사내 집회와 유인물 배포를 금지한다는 내용의 인사·복무규정 개정을 강행한 데 이어 사흘 뒤에는 ‘기구 축소 해임’이라는 구조조정 카드를 빼들었다. 이는 결국 자유언론 실천운동에 앞장섰던 기자 해고로 일단락되고 말았다. 그렇게 동아일보 밖으로 내몰린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거의 동시에 조선일보에서 해고된 기자들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를 꾸렸다.
정준희 선언 이후 핵심적 역할을 하셨던 분들은 대부분 해직된 채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셨습니다. 그 대신 신군부 체제가 자행한 언론 통폐합 등으로 언론계에 또 다른 암흑기가 펼쳐지는 상황에서 ‘언협’(민주언론운동협의회)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운동을 지속하셨고, 그 과정에서 ‘말’지를 통해 보도지침을 폭로하는 등 언론이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기도 했습니다. 물론 자유언론 실천운동이 그 이후로도 연결되긴 합니다만, 1974년부터 1987년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자유언론 실천운동의 전개 과정은 어땠습니까?
이부영 최종적으로 동아투위 113명, 조선투위 32명의 가시밭길은 말씀하신 것처럼 1980년대까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10·26 사건 이후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면서 ‘아, 이제 우리가 동아나 조선으로 돌아갈 길은 막혔다’ ‘전두환 독재 정권이 타도되지 않는 한 우리가 언론으로 복귀하는 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려면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는 길밖에 없는데 그 길은 두 가지였지요. 하나가 언론 내부로 눈을 돌려 언론 민주화와 새 언론의 좌표를 모색하는 길이라면, 다른 하나는 전면적으로 다른 민주화 운동 세력과 연합하는 것이었지요. 저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부문운동으로 언협을 만들어 활동한 이들은 새 언론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나는 감옥에 있어서 그 논의에는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정준희 그렇게 시작된 한겨레 창간이 선언의 직간접적 소산이었다고 봅니다.
이부영 한겨레 창간이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물이라고 하는데, 연원을 길게 잡자면 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겨레 창간을 위한 국민 모금은 어려움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진행됐는데요, 바로 1974년 말에서 1975년 초까지 동아일보를 격려광고로 채워준 민심이 한겨레 창간 모금으로 되살아난 거라고 봅니다. 지난 10여년간 계속되고 있는 촛불 민심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납니다.
정준희 우리 언론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선언이 강조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적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는 방식으로 계보를 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화 이후 언론 환경이 객관적으로는 자유로워졌다고 하나 정권에 따라 편차가 크고, 여기에 미디어 생태계도 엄청나게 바뀌면서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에 직면해 있는 것 아닙니까?
이부영 1975년 우리가 쫓겨났던 그 시절, 그 상황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봅니다. 조중동을 비롯한 레거시 미디어(전통 언론매체)를 보면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규모가 커지면서 언론 사주의 힘은 그만큼 커진 반면, 거기서 일하는 기자와 피디 등 언론인의 처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습니다. 지난 반세기 많은 희생으로 얻어진 것처럼 보이는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언론사 노동조합이 제대로 된 역할을 못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언론사 노조라면 일반 기업 노조와 달리 종사자들의 처우 문제와 함께 언론 자유를 지켜내는 또 다른 임무를 떠맡아야 합니다. 인권과 민주주의, 언론 자유에 민감하지 못한 언론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에 대한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정준희 저는 1987년 민주화의 과실을 과거 민주주의를 막았던 언론이 가장 많이 차지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렇다 보니 대다수 언론에서 사주의 자유는 확대되는 반면,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언론인의 직업적 자유는 대단히 취약해진 상태입니다. 여기에 미디어 경쟁까지 심해지면서 각자도생의 형태로 사주의 자유에만 복무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게 근본적 문제라고 보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비록 소수일지라도 언론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언론인은 선언 당시 격려광고로 응원을 보내줬던 그런 시민의 힘과 어떻게 만날 수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이부영 이따금 촛불집회에 나가서 시민을 만나보면 1974~75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 모였던 시민들과 너무 흡사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가정주부부터 평범한 소상공인들까지 어떻게 보면 그들이 정 교수께서 말한 각자도생에 내몰리는 피해자들일 수 있는데요, 이들을 연결하는 고리에 시민운동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시민운동을 북돋고 연대하는 일을 노조가 해야 한다는 겁니다. 얼마 전(11월27일) 이동관 전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려 서울 광화문에서 여의도 국회 앞까지 행진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원로 언론인들도 언론 자유가 위협받는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공영방송을 함께 지키자고 나섰는데, 정작 현업 언론인들은 해당 방송사 노조를 비롯해 언론노조 집행부만 나서지 기자와 피디들은 많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길을 걸으며 50년 전의 연대와 2023년의 연대는 다른 것인가, 당시 해직당하고 감옥에 가야 했던 언론 운동과 오늘의 언론 운동은 비교될 수 있는가 등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정준희 1974~75년 당시와 지금의 언론 환경이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보신다면, 또 다른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나와야 할 때가 된 건 아닐까 합니다. 만약 선언을 다시 쓴다면, 어떤 내용으로 채워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부영 가장 먼저 ‘언론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와 독립을 지킨다’, 이게 1번이 됐으면 합니다. 그다음으로는 ‘언론노동조합이 언론 자유와 언론인 생존을 지키는 기본이다’, 이 두 가지는 가장 중요한 항목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언론노동조합은 민주시민언론운동과 굳게 연대해야 된다’ 이것도 하나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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