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다스리는 신비로운 수호신” … 비·풍요 빌며 ‘왕권의 상징’ 등극
과거 水神·雨神 상징했던 존재
기우제 등 국가적 의식의 대상
절대적 능력=왕같은 존재 인식
용안 등 관련 단어에 ‘용’붙여
푸른 용 기운 받는 갑진년 출생
“과묵·강직하고 재물 잘 모아”
옛 백제의 한 여인이 못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지룡(池龍)이 나타나고 지룡의 아들을 잉태한 여인은 아이를 낳아 기른다. 유달리 총명했던 그 아이는 마를 캐어 내다 팔아 서동(薯童)이라 불렸다. ‘삼국유사’에 적힌 백제의 제30대 왕, 무왕의 탄생 설화다.
이처럼 우리 역사 속 왕들은 신비로운 동물 용(龍)의 상징을 빌려 권위를 내세웠다. 백제 무왕뿐만 아니라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 역시 용의 후손이라 전해진다.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인 용은 어떻게 왕권의 상징이 되었을까. 2024년 ‘갑진년(甲辰年)’을 맞아 ‘용’의 의미를 살펴본다.
오늘날 용은 서구 문화와 게임 등의 영향으로 불을 상징하거나 세상을 위협하는 악의 화신으로 그려지지만, 우리 민속에서 용은 권위의 상징이자 수호신이었다. 용의 권위는 ‘물’, 즉 ‘치수(治水)’ 능력에서 나왔다. 물을 관장하는 능력을 지닌 신비로운 동물이 바로 용이다. 용 그림을 보면 대개 구름 속에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구름 속에 비가 숨어 있고 용은 구름 속에 숨은 비를 부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용의 순우리말인 ‘미르’ 역시 물과 관련된 단어다.
그 때문에 우리 민속에서 용은 수신(水神), 우신(雨神) 등을 상징했다. 조상들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 용에게 비를 빌었고, 바다에서 안전하게 물고기를 잡기 위해 용에게 풍어와 안녕을 빌었다. 각종 용신제(龍神祭)와 기우제(祈雨祭) 등이 모두 용을 대상으로 한 의식이었다.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용왕굿과 용신제, 용왕제 등이 전승되고 있다. 조상들은 용이 잠들면 가뭄이 온다고 생각해 그 적수인 호랑이나, 고양이처럼 호랑이를 대신할 만한 짐승을 연못에 집어넣어 용을 깨우기도 했다.
생업에 필수인 물을 다스리는 능력으로 인해 용은 위대하고 훌륭하며 신비로운 존재에 비유됐고, 이는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왕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으로 이어져 용이 왕권, 왕위의 상징이 됐다. 왕이 입는 곤룡포엔 용의 그림이 그려졌고 임금의 얼굴을 뜻하는 용안(龍顔), 임금이 정무를 볼 때 앉던 평상인 용상(龍牀) 등 왕과 관련한 단어에는 ‘용’이라는 접두어가 포함됐다.
상상 속 동물이기에 정확한 생김새도, 뚜렷한 기원도 알 길이 없다. 중국 위나라의 장읍이 편찬한 자전(字典) ‘광아(廣雅)’는 용의 모습에 관해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묘사한다. 뱀에서 용이 출현했다는 설, 악어가 기원이라는 설, 기상학적인 현상에서 비롯됐다는 설 등만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럼에도 용은 물을 관장하는 신이기에 삼면이 바다인 우리 민족에게 매우 친숙한 존재였다. 널리 알려진 민속놀이 중 하나인 줄다리기도 용과 관련된 놀이다. 줄 자체가 ‘용’을 상징한다. 양편이 서로 줄을 잡아당기며 풍농을 기원했다. 이른 새벽에 정화수 한 그릇을 길어오는 ‘용알뜨기’라는 풍습도 있었다. 대보름 전날 밤 닭이 울기를 기다렸다가 집집마다 표주박을 가지고 앞다투어 정화수를 길어오는데, 먼저 긷는 사람은 농사가 잘될 것으로 예측했다. 용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했다. 상여를 장식한 용수판(위 작은 사진)은 망자를 인도하고 보호하는 안내자 역할을 했다.
용은 물을 관장하기에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바다나 강, 큰 호수뿐만 아니라 작은 연못에도 존재했다. 용소(龍沼), 용연(龍淵), 용담(龍潭) 등 용 관련 지명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2021년 국토지리정보원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국 고시 지명 약 10만 개 중 열두 띠 동물 관련 지명은 4109개, 이 중 용 관련 지명은 1261개로 가장 많다.
최근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한국민속상징사전’에 따르면 용에 해당하는 진(辰)은 오전 7시부터 오전 9시까지, 방향으로는 동남동(東南東), 달로는 음력 3월을 의미한다. 올해는 용의 해 중에서도 갑진년으로 청룡, 즉 푸른 용의 기운이 가득한 해다. 한국민속상징사전은 띠 동물의 특성과 그해 출생자의 성격과 능력을 점치는 풍속을 언급하며 “갑진생은 과묵하고 강직하며 재물을 모으는 능력이 좋다”고 설명한다.
갑진년을 맞아 국립민속박물관은 우리 문화 속 용에 얽힌 상징과 의미를 소개하는 특별전 ‘용(龍), 날아오르다’를 오는 3월 3일까지 선보인다. 용왕과 용궁부인을 그린 ‘무신도(巫神圖)’, 기우제 제문(祈雨祭祭文) 등을 통해 용에게 비와 물을 빌던 우리 옛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용과 관련된 전시품 15건을 소개하는 전시 ‘용을 찾아라’를 4월 7일까지 개최한다. 평안남도 대동군 석암리 9호 무덤에서 출토된 용무늬 허리띠 고리, 고구려 고분인 강서대묘의 ‘청룡도’ 등을 볼 수 있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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