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여정

서울문화사 2024. 1. 2.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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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의 세계> 를 통해 보는 지적 여정 논픽션이라는 장르.

측정의 세계

제임스 빈센트, 까치

이 책은 측정을 키워드 삼아 역사와 지역을 오가는 논픽션이다. 측정은 어떤 단위를 만드는 일, 그 단위로 세상을 파악하는 일이다. 그 측정 단위가 무엇이고 그것이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인지에 따라 많은 사람의 삶이 결정된다. 저자 제임스 빈센트는 개념적인 이야기를 실제로 보여주고 자신이 쌓은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 고대 이집트부터 오늘날의 ‘좋아요’ 시스템까지 분석한다. 이 분석은 재미도 의미도 있어서, 이 책이 제임스 빈센트의 첫 저작임에도 <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이 되는 등의 영광을 누렸다.

보통 개념적인 소재를 개념적으로만 이야기하면 질린다. 수식으로만 이루어진 페이지처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근거가 모자라면 어쩔 수 없이 지루하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재미를 줄 만한 생동감을 불어넣으려면 실제의 세상과 실제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임스 빈센트도 전 세계를 무대로 삼았다. 이집트의 유적부터 파리의 국가기록원까지 찾았고, 미터로 쓰인 거리 표시를 지우고 영국의 옛 단위인 야드를 굳이 적는 영국 미터법 반대자들을 만났다. 이 모든 이야기가 ‘측정’이라는 주제에서 오케스트라 연주자처럼 각자 역할을 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묶은 작가의 솜씨로 <측정의 세계>라는 교향곡 같은 논픽션이 만들어진다.

<측정의 세계>는 훌륭한 책이지만 독창적인 구조는 아니다. 영미권이나 선진국의 장편 논픽션에서 이러한 구조의 책은 흔하다. 주제가 제2차 세계 대전이든 측정이든 아니면 스마트폰이든, 한 가지 세부적인 주제를 렌즈 삼아 거시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크리에이티브 논픽션이 이미 선진국에는 무척 많다. 이러한 각 분야의 지적 여정을 따라 읽는 걸 좋아하는 논픽션 독자 시장층도 있다. 이런 논픽션을 원작 삼아 만들어지는 영상 콘텐츠 다큐멘터리도 있다. 원작을 토대 삼아 콘텐츠 종류가 다양해지는 건 소설이나 논픽션이나 다르지 않다.

이런 논픽션의 큰 가치는 지식의 대중화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그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면 알기 어렵다. 우리는 결국 우리 분야가 아니면 모두 문외한이다. 이야기를 잘 만드는 것도 별도의 기술과 노하우가 필요한 일이므로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를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선진국에는 <측정의 세계> 같은 논픽션이 있다. 개념적으로 전문가와 일반 독자 사이에 위치하는 책이다. 전문가가 봐도 틀린 말이 없고, 문외한이 봐도 어렵지 않은 책은 언제든 사회에 긍정적인 가치가 있다. <측정의 세계>처럼 왕성한 지적 욕구와 충실한 지적 여정이 포함된 책이 소중한 이유다.

<측정의 세계> 같은 책에 흠뻑 빠져 읽다가 책장 밖 세상을 보면 흥미로운 일이 생긴다. 책을 읽기 전에는 아무 의미도 없던 세상 요소가, 갑자기 게임 아이템의 효과처럼 의미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렇기 떄문에 좋은 논픽션을 접하고 나면 세상을 보는 렌즈를 하나 더 얻는 기분이 든다. 어쩌다 전 세계가 미터를 쓰게 되었는지, 어쩌다 ‘물은 100℃에서 끓는다’는 섭씨 체계가 쓰이게 되었는지, 이런 게 궁금한 사람이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쓰마와 시마즈 히사미쓰

손일, 푸른길

사쓰마는 오늘날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현 일대다. 메이지 유신의 핵심 세력인 사쓰마번이 이곳이다. 메이지 유신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도 시마즈 히사미쓰는 낯설 텐데, 이 책은 왜 그 사람이 중요한지를 말한다. 제목은 낯설지만 구성은 친절해서 시마즈 히사미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본 역사를 미리 상세히 설명하니 긴 겨울밤의 교양 서적으로 손색없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은 여러모로 재미와 교훈이 있는 이야기이므로 충분히 시간을 내어 읽을 가치가 있고, 교양서임에도 특이하게 저자의 개인적 술회가 많아 의외로 읽는 재미가 좋다.

미국이 만든 가난

매슈 데즈먼드, 아르테

매슈 데즈먼드는 미국의 강제 퇴거민을 다룬 <쫓겨난 사람들>로 자신의 역량과 재능을 증명했다. 그는 간결한 문장으로 확실한 상황을 묘사해 자신이 말하고픈 문제를 제기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귀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의 최신작 <미국이 만든 가난>에서도 그 재능은 여전하다. 그에 따르면 빈곤을 만드는 건 불평등을 극대화하는 사회적 체계고, 미국은 그 불평등이 극에 달한 나라다. 사회구조의 문제를 강조하는 책 특유의 선동성이 있으나, ‘우리 삶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서로 맞물려 있다는 뼈아픈 진실’ 같은 말은 오래 생각해볼 만하다.

Editor : 박찬용 | Photography : 송태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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