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석 대장을 묻은 히말라야 자취 화폭에 담다

노형석 기자 2024. 1. 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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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덮인 히말라야의 큰 산을 줄곧 화폭에 그렸다.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수백명의 산악인이 등반하다 숨지거나 실종된 마의 산이자 현지인들에게는 성산으로 숭배되는 안나푸르나 산과 그 언저리의 풍경이다.

지난 2011년 안나푸르나 남서벽에 새로운 등반로를 개척하러 나섰다가 눈사태에 실종된 그의 주검을 찾기 위해 산악전문가인 정영목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를 대장으로 3차 수색대가 지난해 3월 꾸려져 보름 이상 안나푸르나 남벽의 실종 지점을 수색했지만 성과는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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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표 개인전 ‘안나푸르나’
지난 10월 서울시산악문화센터 전시장에서 만난 김남표 작가. 고 박영석 대장을 떠올리며 그린 근작 ‘등반가 #1’ 앞에서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눈으로 덮인 히말라야의 큰 산을 줄곧 화폭에 그렸다.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수백명의 산악인이 등반하다 숨지거나 실종된 마의 산이자 현지인들에게는 성산으로 숭배되는 안나푸르나 산과 그 언저리의 풍경이다. 소장 화가 김남표씨가 지난 2년간 무수히 붓질한 유화 그림들이다.

히말라야의 설산하면 일반인들은 장엄한 산세가 돋보이는, 하늘 아래 대자연의 위엄이 돋보이는 그림을 당연히 연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특별한 이유로 안나푸르나를 다른 등반대원들과 다녀온 뒤 그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산의 풍경과 당시 등반의 기억들을 화폭에 독특한 방식으로 부려놓았다. 삼베 천을 구겨 산악 지형처럼 돌출된 화폭 위에 물감의 덩어리진 물질적 형상 그 자체로 펼쳐놓은 것이다. 이 독특한 그림들이 지금 서울 난지도의 서울시 산악문화체험센터의 벽 기울어진 전시공간에서 관객들을 맞고 있다. 18일까지 열리는 김남표 작가의 이색 개인전 ‘안나푸르나’다.

기존 화단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오브제 같은 독특한 방식의 산악그림을 시도하게 된 특별한 이유는 한국 산악사에 길이 남을 산악인 고 박영석 대장의 존재를 찾으려는 집요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박영석은 2005년 히말라야의 8000m급 14좌 봉우리와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고 세계 삼극점의 횡단까지 ‘산악 그랜드슬램’의 대기록을 세운 철인.

지난 2011년 안나푸르나 남서벽에 새로운 등반로를 개척하러 나섰다가 눈사태에 실종된 그의 주검을 찾기 위해 산악전문가인 정영목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를 대장으로 3차 수색대가 지난해 3월 꾸려져 보름 이상 안나푸르나 남벽의 실종 지점을 수색했지만 성과는 내지 못했다. 고산병을 감수해가며 지원팀에 배속돼 급박한 수색작전을 지켜본 그는 애초 주검 수습이란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의 리얼리즘 회화를 더욱 심도 있게 갱신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게 된다.

김남표 작가의 유화 작품 ‘안나푸르나 #1’(2023). 2023년 고 박영석 대장의 주검을 찾으러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산을 다녀온 수색대 활동에 참여했던 여러 기억이 당시 산을 조망한 풍경 속에 복잡하게 녹아든 그림이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저는 지난 봄 여정에 동참하기 전까지 사실 박영석이란 등반가를 잘 알지 못했어요. 정 교수님의 권유로 수색대에 합류해 고인과 산악계, 문화계 인사들과의 관계를 알게 됐지요. 히말라야 설산의 풍광은 경이롭지요. 그런데 거기에 한국 산악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 같이 있는 거잖아요. 그분이 산이 되어버린 것이죠. 산이 됐고 우리는 산에 올라가는 거죠. 박영석을 올라가는 겁니다. 그런 부분들이 중의적으로 겹치다 보니까 그림을 보고 그리는 방식을 달리 생각하게 됐어요. 박영석과 평생을 나눴던 수색팀원들의 관계를 저는 바라볼 수밖에 없죠. 그들이 수색하는 마음들, 못 찾았을 때의 감정들, 내려올 때의 심경 그런 것들이 산의 풍광에 복잡하게 다 얽혀있는데, 이런 것들을 산과 박영석의 그림 속에 풀어내려 한 것이죠. ”

기후에 따라 산의 형상과 색조는 달랐고, 사람들의 마음과 움직임도 수색 상황과 날씨에 따라 다르게 흘러갔다. 마티에르를 상당히 거칠게 하고, 화폭 천의 올이 풀리는 부분까지 조형적 요소로 끌어들이면서 안나푸르나의 눈 덮인 표면과 반추상화한 물감 덩어리로 얽힌 박영석의 얼굴이 생생한 피부처럼 육박해오는 화면 효과를 일궈냈다. 거꾸로 경사진 센터 특유의 기울어진 벽면이 작가의 산 그림과 어울려 더욱 긴박한 현장감을 낳는 것도 인상적이다.

김 작가는 상업화랑에 전속하면서 일하다가 관계를 정리하고 제주도에서 새 화풍을 모색하던 중 뜻밖의 히말라야 체험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현장성의 감각을 얻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번 전시의 그림들은 박영석에 대한 추모나 추앙의 의미를 담았다기보다라 기실은 산이 된 산악인이 저의 작업에 던진 새로운 울림에 대한 것들입니다. 일정이 너무 촉박해 아직 안나푸르나에서 눈에 깊이 담지 못한 현장들이 적지 않아요. 올해 다시 가서 눈에 아로새기려 합니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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