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리파운더인가?…애플·MS·삼성·현대차의 공통점[세계의 리파운더①]
[스페셜 리포트 : 세계의 리파운더①]
애플이 망할 거라고 했다. 2011년 10월 스티브 잡스가 사망하자 시장은 애플의 앞날을 우려했다. 주가는 보름 넘게 하락했다. ‘파괴적 혁신가’가 사라지고 ‘따분한 살림꾼’ 팀 쿡이 두 번째 일인자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 쿡은 잡스 없는 애플을 10배 넘게 키워냈다. 잡스가 살아 있던 2011년 8월 애플의 시가총액은 3410억 달러였다. 2020년 8월 시총 2조 달러를 돌파했다. 그리고 2023년 6월 사상 처음으로 시총 3조 달러를 돌파한 기업이 됐다.
빌 게이츠가 떠난 이후 마이크로소프트(MS)는 주저앉았다. 모바일 시대를 준비하지 못한 MS는 2011년 시가총액이 세계 3위에서 10위까지 곤두박질쳤다. 2014년 MS CEO 자리에 오른 사티아 나델라는 회사를 정비한 후 새 전성기를 열었다.
나델라의 지휘 아래 ‘늙은 공룡’ 취급을 받던 MS는 세계 최대의 클라우드 컴퓨팅 기업이 됐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픈AI와의 발 빠른 협업으로 MS를 ‘AI 퍼스트무버’로 이끌고 있다. 회사 가치는 급등했다. MS는 현재 시총 3조 달러를 바라보며 애플에 도전하고 있다.
리사 수 AMD CEO도 회사의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그는 2014년 CEO 자리에 올라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며 회사를 폐업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후 CPU 시장에서 인텔을, GPU 시장에서 엔비디아를 위협하는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이들은 모두 창업자가 일군 성공의 제국을 물려받았다. 또 다른 혁신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새로운 문법을 적용했고 창업자를 뛰어넘는 결과를 냈다. 링크드인 공동창업자인 리드 호프먼은 이 같은 유형의 CEO를 ‘리파운더(Refounder·재창업자)’라고 정의한다.
왜 지금 리파운더인가?
빌 게이츠는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 한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았다. “가장 두려운 경쟁자가 누구냐?” 그는 답했다. “어느 차고에서 무언가를 개발하고 있는 젊은 기업가들이다.” 이 답을 할 때쯤 미국의 한적한 차고에서는 구글 창업자들이 자신이 인터넷 세계의 지배자가 될 줄도 모르고 무언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파괴적 혁신으로 새로운 시장을 열고 선두를 달렸던 기업도 정체기를 맞는다. 혁신의 결과물은 일상이 되고, 경쟁자들은 더욱 새로운 제품으로 그 자리를 위협한다. 모바일로의 급속한 이동 등 기술과 제품의 진화는 기존 강자들을 오래된 기업으로 퇴색시킨다.
시장의 레거시가 된 기업에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한 이유다. 리파운더는 창업자가 창조해낸 ‘파괴적 혁신’보다는 변화에 대응하고 내부를 통합하는 ‘점진적 혁신’으로 회사의 성장을 이어간다.
빌 게이츠가 나델라 CEO를 두고 “사티아는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지만 새롭고 대담한 도전을 이끌었다”고 평가한 이유다.
호프먼 역시 “회사가 커질수록 리파운더는 기업의 문화와 사명을 유지하고 변화하는 세계에 대응한다”며 “창업자는 회사를 그 사회에서 강력한 위치로 성장시킨다면, 리파운더는 어떻게 그걸 지속할 수 있는지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리파운더의 역할이 창업자와 다른 이유는 이들에게 주어진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물려받은 기업은 관료제에 찌든 거함이다. 1등의 기억은 있지만 열정과 활력, 민첩성은 떨어져 있다. 고위 경영진은 혁신보다 타성에 젖어 있을 확률이 높다.
성공의 경험은 시효를 다하면 실패의 싹이 되기도 한다. 2024년 한국 경제를 이끌어 온 기업들이 맞닥뜨린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음은 변화의 속도다. 2년 전만 해도 꽤나 괜찮아 보였던 국내 대기업들의 포트폴리오는 갑자기 퇴색해 미래지향성을 발견하기 힘들게 됐다. 기술과 취향의 발전 속도 때문이다.
올해는 더 예측이 어렵다. AI가 어떤 산업을 파괴하고, 어떤 승자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지 예측하기 힘들다. 기술이 진화하는 속도는 이제 인간의 예상을 넘어섰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자유무역이라는 말은 고어가 된 지 오래다. 세계 각국은 새로운 진영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새판을 짜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실패도 기회로 삼을 수 있던 고성장 시기는 끝났고, 추격자 전략도 그 시효를 다했다.
경영 조건은 더 복잡해졌다. CEO의 상상력이 기술이나 숫자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2024년 새로운 리파운더의 탄생을 기다리는 이유다.
리파운더의 조건
리파운더는 기업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체질개선을 지휘하며 새롭게 도약시킨다. 리파운더가 가업을 승계받은 오너인지 전문경영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시대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속도와 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다.
후계자를 경영자 반열에 오를 수 있게 키워내는 시스템과 후계자를 알아보는 창업자의 안목은 리파운더를 발굴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이다.
창업가는 화산 같은 열정과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사람이다. 창업가는 대부분 회사의 성장을 위해 직원과 자기 자신을 한없이 몰아붙이는 카리스마를 지녔다.
리파운더는 다르다. 분열된 내부를 통합하고 떨어진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경쟁과 배척보다는 공감과 동기부여를 우선으로 했다. ‘혼자 빨리’ 가는 것보다 ‘함께 멀리’ 가는 것을 강조한다. 조직을 이끌던 한 명의 천재는 사라졌지만 다수의 협업으로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경비즈니스는 신년호에서 글로벌 기업과 한국의 리파운더를 조명했다. 1세대 창업가가 쓴 경영신화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간 경영자들이다.
미국은 애플, MS, AMD 등 경제와 산업을 주도하는 빅테크 기업에서 성공적인 리파운더를 배출했다.
한국은 리파운더는 모두 오너 경영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아버지가 일군 회사에 새로운 성장동력을 심고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며 기업가치를 끌어올렸다.
일본에서는 망한 줄 알았던 소니를 부활시킨 히라이 가즈오의 리파운딩 전략을 살펴봤다. 또 ‘후계자 리스크’가 경제 문제로까지 번진 일본의 현실을 통해 한국의 미래를 고민했다.
이남우 연세대 교수는 “스타벅스가 하워드 슐츠를 3번이나 경영 일선에 소환한 것을 보면 리파운더를 발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 수 있다”며 “한국 기업이 리파운더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삼성, 현대 등 글로벌 기업에서 훌륭한 성취와 경영 노하우를 쌓은 사장단이 다른 기업 사외이사로 가서 경험의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도록 개방적인 이사회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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