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님도 ‘와유’할 때 금강산 직접 여행한 제주 여인·14세 소녀[이기환의 Hi-story](115)
‘와유(臥遊)’라…. 국립춘천박물관이 지난해 12월 초부터 상설전시관 2층 브랜드존에서 <이상향으로의 초대 금강산과 관동팔경> 관련 작품 전시를 시작했습니다. 요즘 국립박물관의 ‘핫템’인 ‘고 이건희 회장 기증품’인 ‘단발령망금강산’(정선·1676~1759) 등 9건이 특별 출품됐답니다. 저는 전시회 설명 중 ‘누워서 노닌다(즐긴다 혹은 감상한다)’는 뜻인 ‘와유(臥遊)’라는 용어에 이른바 꽂혔습니다. ‘와유’는 중국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종병(375~443)과 관련된 성어인데요. 종병은 벼슬길도 마다하고 산수를 유람했던 은사였습니다. 그러다 늙고 병들어 다닐 수 없게 되자 대안을 마련했는데요. “예전에 다녔던 명승지를 모두 그림으로 그려 벽에 걸어놓고 누워 감상하며 노닐었다(臥以游之)”(<송서> ‘열전·종병’)는 겁니다.
■‘눕방’으로 상상여행
조선조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의 ‘와유 찬양론’을 보죠.
“와유란 몸은 누워 있지만 정신은 노니는 것… 직접 보지는 못하기 때문에 상상에 근거해야… 마음과 눈에 도장 찍히듯… 앉은 자리에서 감상해도 마음은 간다.”(<성호전집> ‘와유첩발’)
그림 속 풍경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그림을 통해 마음의 유람을 즐긴다고 한 겁니다.
문신 신정하(1680~1715)는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보고 찬탄했습니다.
“정선의 (금강산) 화첩을 보고 어루만지며 상상하니 깊고 높은 물과 산에서 정신이 노니는 듯하고….”(<서암집>)
또 정선의 ‘금강전도’(국보)에도 재미있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일만이천 봉 드러난 뼈를 뉘라서… 참모습 그려 내리… 설령 내가 발로 직접 밟아 보자 한들 이제 다시 두루 걸어야 할 터, 그 어찌 머리맡에 기대어 실컷 봄만 같으리오(縱令脚踏須今遍 爭似枕邊看不慳).”
정선이 ‘다시 그린들 이보다 잘 그릴 수 있겠느냐, 차라리 이 그림을 머리맡에 두고 보는 게 낫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습니다.
■정조가 누워 감상한 산 그림
꼼짝없이 구중궁궐에 ‘붙잡혀’ 정사를 펼쳐야 했던 임금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예컨대 정조는 1788년 단원 김홍도(1745~1806?)·김응환(1742~1789)에게 “금강산의 풍경을 그려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김홍도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비단 화폭을 가지고 금강산에 들어가 연 50일 머물면서 일만이천 봉과 구룡연 등 여러 경승을 잘 살펴보고 형상을 본떠 수십 장 길이의 두루마리로 만들었다.”(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운지’)
이때 그린 김홍도의 ‘금강산도’는 수십 길, 즉 40~50m 되는 두루마리 대작이었다는 얘기입니다. 현재는 화첩 형식의 초고본(5권 70장)이 남아 있습니다. 소문난 ‘일벌레’, ‘책벌레’였던 정조는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정사를 펼치다가 틈틈이 김홍도의 대작 ‘금강산도’를 보고 마음의 유람, 즉 ‘와유’을 즐겼을 겁니다.
■‘18세기 셀럽’ 여성
이럴 때 사대부·선비는 물론 임금조차 ‘와유’로 대리만족하는 판이었는데요. 그럴 때 “떠나볼까” 하고 길을 나선 여성 두 분이 있었답니다. 그것도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부녀자는 장 100대에 처한다”(<경국대전>)는 규정이 있는데 말입니다.
실화입니다. 먼저 제주 출신인 김만덕(1739~1812)을 소개해보죠.
이분 이야기는 정사인 <정조실록>, 정조의 일기인 <일성록>, 명재상 채제공(1720~1799)의 시문집(<번암집> ‘만덕전’), 유학자·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다산시문집>에 실려 있습니다. 그만큼 당대의 ‘셀럽’이었다는 거죠.
김만덕은 “제주 남자와는 혼인하지 않겠다”고 과감히 선언하며 독신을 고수한 ‘원조 비혼녀’였는데요. 뛰어난 장사수완으로 큰 부자가 됐답니다. 1795년(정조 19) 김만덕 인생에서 큰 전기가 마련됩니다. 제주에 큰 기근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답니다. 이때 김만덕은 천금을 들여 백성을 구휼했습니다.
1796년 제주목사 유사모(1750~?)가 장계를 올려 김만덕의 선행을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정조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김만덕의 대답이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저는 늙고 자식도 없습니다. 신분을 바꿀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육지로 나가 한양 구경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금강산도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정조는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습니다. 대단하죠. 푸짐한 상금도, 신분상승도 원하지 않고 그저 ‘한양 구경, 금강산 유람’을 소원으로 내세웠으니 얼마나 파격적인 발언입니까.
■“만덕에게 ‘갑질’하면 안 된다”
정조는 김만덕의 한양 및 금강산 유람을 위해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답니다.
“마침 한겨울(1796년 음11월)이라 (금강산 여행을) 떠날 수 없었다. …봄이 올 때까지 양식을 주고 곧바로 내의원의 차비대령인 행수 의녀로 충원하라. 그래서 수의(首醫·어의)에 소속시켜 각별하게 돌봐주라.”
정조는 만덕을 임금의 주치의인 어의의 휘하에 두도록 특전을 베풀었습니다. 자칫 김만덕을 질투하는 자들이 ‘갑질’을 하지 않을까 해서 “만덕을 건드리지 말라”고 조치를 취한 거죠. 그뿐이 아닙니다.
<일성록> 1796년 11월 28일자는 “규장각 초계문신을 대상으로 한 시험에 ‘(김)만덕’이라는 시제를 냈고, 그 시험에서 서준보(1770~1856)가 수석을 차지했다”고 했습니다. ‘만덕’을 시제로 시험을 치를 정도였던 겁니다.
정조는 “만덕이 금강산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후히 대접하라. 만덕이 지나가는 각 도의 관찰사는 양식과 경비를 넉넉히 전하라”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김만덕은 정조 임금의 보살핌 속에서 1797년 늦봄 꿈에 그리던 금강산 유람을 떠납니다.
“김만덕은 금강산 만폭동과 중향봉 등 절경을 두루 찾아다녔다. 안문령-유점사를 거쳐 해금강 삼일포에서 뱃놀이를 한 뒤 총석정(통천)까지 두루 구경한 뒤 한양으로 돌아왔다.”
■“눈동자가 두 개래”
김만덕의 일거수일투족은 당시 한양에서 엄청난 화제를 뿌렸습니다.
<만덕전>(김만덕의 전기)을 쓴 채제공은 “만덕을 둘러싼 소문이 장안에 널리 퍼져 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만났다”고 기록했습니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변·중동에 관한 변증’)은 김만덕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소개하면서 실소하는데요. 즉 한양으로 올라온 김만덕이 “내 눈은 중동(重瞳·눈동자가 두 개)”이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김만덕의 눈을 보려는 이들로 ‘줄을 서시오’를 외칠 만큼 길었는데요. 호기심을 참지 못한 정약용 역시 만덕을 초청해 그의 눈을 자세히 살펴보았답니다. 그러나 ‘중동’이 아니었답니다. 김만덕 스스로도 잘못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도 한양 사람들은 김만덕의 말만 철석같이 믿었다는데요. 정약용은 “아무리 내가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만덕의 눈이 중동이 맞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허언을 믿으니…”라며 혀를 찹니다. 우상으로 떠오른 김만덕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김만덕이 금강산·한양 호화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요. 그때가 58세였습니다. 김만덕은 자신을 보살펴준 채제공에게 “이제 이승에서는 볼 수 없겠다”고 눈물을 흘렸는데요. 채제공은 “울지마라”면서 지당한 한마디를 남깁니다.
“너는 제주에서 나고 자랐으니 한라산 백록담 물을 떠 마셨을 것이고, 지금 또 금강산을 두루 답사했다. …천하의 남자 중에 이렇게 유람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그런데 이별하는 자리에서 도리어 아녀자의 수다스러운 태도를 보이다니….”
■14세 소녀의 “떠나볼까?”
또 한 분 ‘떠나볼까?’ 하고 훌쩍 행장을 꾸린 신여성이 있었으니, 불과 14세의 김금원(1817~?)이었습니다. 원주 출신인 김금원의 신분은 기녀였습니다. 부모는 그러나 금원을 마냥 여자아이로만 키우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가사나 바느질 같은 여자아이의 일을 시키지 않고 문자를 가르쳤다. 덕분에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통하고 고금의 문장도 본받게 됐다.”(<호동서락기>)
금원은 보통내기가 아니었습니다. 조선 여성으로서 부녀자의 도리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담장 밖 여행을 추구했습니다.
“여자가 깊숙한 규방에서 살면서 식견을 넓히지 못한 채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냐.”
김금원은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불행이지만 하늘은 나에게 산수를 즐기는 어진 성품과 눈과 귀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글로 쓸 수 있는 능력까지 주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14세 어린 딸의 여행을 선선히 응할 부모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소녀 김금원은 ‘마치 새장에 갇힌 새가 나와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고, 천리마가 굴레를 벗고 천 리를 달리는 기분’이라 했습니다.
■덧없는 인생을 노래한 14세 소녀
김금원의 여행을 두고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김금원이 원주 감영의 기녀 신분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물론 김금원이 사대부들의 유람에 시와 문장을 담당한 기녀로서 동행했을 수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호동서락기>는 분명 금원이 남장을 하고 여행길에 올랐다고 했습니다.
“때(1830)는 춘삼월 내 나이 14세, 머리를 동자처럼 땋고 수레에 앉았다. 충북 제천 의림지를 찾았는데….”
김금원은 이어 단양팔경을 둘러보는데요. 특히 단양팔경 중 하나인 옥순봉을 구경한 뒤의 감동을 시로 남겼습니다.
“시인들은 풍월 읊느라 잠시의 틈도 없고(詩家風月暫無閒) 조물주는 인간을 시기해서 산 밖으로 쫓아냈네(造物猜人送出山). 산새는 산 밖의 일을 알지 못하고(山鳥不知山外事) 봄빛은 숲속에 있다고 지저귀네(謂言春色在林間).”
말이 나온 김에 김금원이 평해(울진)의 월송정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지었다는 시를 좀 보죠.
“덧없는 세상, 사람의 생(生)이 가련할 뿐(浮世人生只堪可憐也哉)”이라 했습니다. 이게 14세 소녀의 시입니다.
■그리운 금강산
김금원은 이후 꿈에 그리던 금강산으로 발길을 돌리는데요. 장안사-옥경대-표훈사-백운대-보덕굴-백천동-만폭동-금강문-감로수 등 내외 금강산 전체를 둘러봅니다.
김금원이 금강산 일만이천 봉을 묘사한 장면을 볼까요.
“눈 쌓인 언덕 같고, 불상 같고, 칼 든 군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도 같고, 연꽃과도 같고, 파초잎과도 같다. 치켜올린 것도 있고 내려뜨린 것도 있고 더러는 가로 갔고 더러는 세로로 섰으며 일어서 있는 것도 쭈그리고 있는 것도 있다.”
봉우리마다 각기 다른 천태만상을 직유법을 사용해 리듬감 있는 필치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후 총석정, 삼일포 등 관동팔경을 두루 거칩니다. “바닷속 언덕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돌(총석정)은 모두 6면으로 깎아 하나의 떨기로 묶어 놓았는데 거의 10여개나 된다. 매 떨기의 돌은 어떤 것은 7~8개, 어떤 것은 10여개의 기둥이다. 그 돌들이 가지런한 치아처럼 벌어졌는데 쇠줄로 갈아낸 듯 하나하나가 6면으로 조금도 굴곡이 없고 넓고 좁은 것도 없이 정밀하고 조밀조밀하다.”
지극히 공감각적인 묘사죠. 김금원은 이후 설악산 일대와 한양을 두루 살피고 여행을 마무리 짓습니다.
■글로 전하지 않으면…
이 대목에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이제 평범한 조선의 여성으로 돌아와야 했으니까요.
“군자는 족한 줄 알고 그칠 수 있기에… 지금 유람으로 숙원을 이뤘으니 멈출 만하다. 이제 본분으로 돌아가… 남장을 벗어버리니 여자가 됐다.”
김금원은 1차 여행을 다녀온 뒤 17세 살 연상인 김덕희(1800~?)의 첩(소실)이 되는데요. 1845년 평안도 의주 부윤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경기 이북-황해도-평안도 지방을 여행하는 행운을 누립니다. 김금원의 2차 여행입니다. 이 1·2차 여행의 경험을 담아 쓴 기행문이 <호동서락기>입니다. 저술 동기도 깜찍합니다.
“지나간 일도 스쳐 지나가면 눈 깜짝할 사이의 꿈에 불과하다. 글로 전하지 않으면 누가 지금의 금원을 알겠는가….”
김금원은 여자로서가 아니라 여행작가로서, 시인으로서 후대에 당당하게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이 순간 한 조각 상념이 떠오릅니다. 예전에 금강의 겨울산(개골산)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요. 이제는 ‘와유’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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