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는 메시지 전달이며, 메시지 그 자체다 [EDITOR's LETTER]
재앙 같은 해였습니다. 물가는 폭등하고 경제는 추락했습니다. 무역 적자로 외환보유고는 급감했습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민주세력에 대한 강경한 탄압이 시작됐지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0년 가까이 지속된 고성장의 시대, 황금자본주의가 막을 내립니다. 미국, 영국, 일본, 독일, 프랑스 선거에서 여당이 일제히 패배했습니다.
오일쇼크가 시작된 1974년 벌어진 일들입니다. 기시감과 미시감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이후 50년은 대한민국이 만든 기적의 시간이었습니다. 식민지, 분단, 전쟁, 독재, 가난 등 현대사에서 겪을 수 있는 고난은 모두 이겨냈지요. 그리고 산업 강국, 문화 강국으로 올라섰습니다.
기적의 시간, 경제는 리더십과 팔로십이 어우려졌습니다. 1세대 창업자(파운더)들이 시작한 모험에 근로자들은 인생 대부분을 공장에서 보내며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폐허에서 제조업에 도전했습니다. 자본도 기술도 자원도 없었습니다. 때로는 미국, 일본 등에 기술을 구걸하고, 때로는 밤을 새우며 무언가를 개발했습니다. 국산화에 성공하자 이내 눈을 해외로 돌렸습니다. 무역 강국의 시작이었습니다. 파운더의 시대에 조선업은 세계 1위에 올랐고 현대 정주영 회장은 신화가 됐습니다.
이어받은 2세대들은 차원이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주요 무대를 한국에서 글로벌로 옮겼습니다. “한국에서 1위를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손에 의해 한국의 기업들은 글로벌 플레이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본의 경쟁자들은 줄줄이 파도에 쓸려 나갔습니다. 빅체인지를 통해 창업자보다 큰 성장을 일궈낸 이들을 ‘한국의 리파운더’라고 부릅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대표적 인물이지요. 3세인 SK 최태원 회장, 현대차 정의선 회장, LG 구광모 회장 등도 성과를 내며 리파운더의 자격 조건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2022년 초 코로나19 이후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고, 주가는 급등했습니다. 반도체, 바이오, 전기차, 배터리, 게임, 콘텐츠, 물류 등 한국 기업들의 포트폴리오는 미래지향적으로 보였습니다. K팝과 드라마, 영화는 세계를 뒤흔들었고, 세계의 시선은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이 비현실적인 순간은 드라마의 클라이맥스였습니다. 기적의 시간이 끝나감을 알리는.
기업들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지난 2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SK그룹에서는 ‘서든데스’라는 말이 나왔고, K콘텐츠의 선구자 CJ의 포트폴리오에서도 미래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삼성전자에서 새로움이란 단어는 찾아본 지 오래됐습니다. AI 시대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한국 기업은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성장의 지원자 역할을 했던 과거의 정치는 추억이 된 지 오래입니다. 정치는 기업인을 병풍으로 삼고, 입법은 성장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됐습니다. 저성장은 일상이 됐고, 젊은 노동자는 찾기 어렵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로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기적의 시간은 끝나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를 감싸고 있는 위기감. 오래된 격언이 생각납니다. “위기는 다양한 이유로 오지만, 극복하는 것은 리더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2024년 뉴 리파운더를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한경비즈니스는 새해 첫호를 리파운더로 시작합니다. 스티브 잡스의 공백을 못 느끼게 만든 애플의 팀 쿡, 마이크로소프트의 암흑기를 끝낸 사티아 나델라, 삼성전자를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이건희 회장과 현재를 책임지고 있는 3세 경영자들을 다뤘습니다. 계승할 경영자가 없어 경영자를 찾아주는 회사의 가치가 급등하고 있는 일본의 현실 등을 담았습니다.
그렇다고 한국 기업의 미래가 비관적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수십 년간 한국은 위기가 아닌 시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위기극복은 DNA처럼 각인돼 있습니다. 때마다 이를 극복할 리더십을 갖춘 기업인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리파운더들이었습니다.
새로운 리파운더의 조건이 뭐냐고 물으면 첫 번째는 커뮤니케이터라고 답하겠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해군이 될 바에는 해적이 되라”고 했습니다.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빼앗으라며 애플 직원들의 영혼을 흔들었습니다. 이건희는 석양이 질 때 운동장에 애써 만든 휴대폰에 불을 질러버림으로써 직원들의 머릿속에 품질이라는 단어를 각인시켰습니다.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는 2008년 복귀 후 2월26일 하루 3시간 7600개 미국 전 매장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최상의 에스프레소를 선사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갖고자 한다”는 안내문을 내걸고 바리스타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CEO는 메시지 전달자이자, 메시지 자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에서 빅체인지를 만들어낼 리파운더의 첫 번째 조건을 갖춘 커뮤니케이터의 등장을 기대해 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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