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이렇게 화창하고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김예지 목원대 관현악·작곡학부 교수 2024. 1. 2. 07: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예지 목원대 관현악·작곡학부 교수

대전예술의전당 홈페이지, 대전 공연과 전시를 안내하는 내용의 블로그나 카페 등에서 지역 연주자들의 개인독주회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나 또한 2012년 귀국 독주회를 가진 후로 거의 해마다 독주회를 하는 플루트 연주자로서, 2024년 새로이 가질 독주회들을 계획하며 지난 10여 년간의 독주회들을 정리해 본다.

기악 연주자에게 독주회가 주는 의미는 생각보다 묵직하다. 내 이름 석 자가 곧 공연의 제목이고, 내 얼굴 사진이 곧 포스터가 돼 동네방네 한두 달간 붙어있는 유명인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공연장 대관 승인이 확정된 순간부터 공연까지 남은 날짜를 세며 다른 중요한 일정들은 차순위로 미루고, 치밀한 연습과 리허설을 계획하고, 심지어 체력단련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한 시간 반 남짓한 시간 동안 오롯이 연주자로서 무대에 서서 관객들을 만날 만반의 준비가 이미 시작된다.

사실 이 단계부터의 준비는 연습실에서 홀로 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피아니스트와의 리허설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실에서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와 싸움을 하며 보낸다. 저마다의 방식이 있겠지만 연주자라면 누구나 자기 객관화의 냉혹함과 소박한 성취감 사이를 오가며 고독하고도 치열하게 그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 철저한 외로움의 시간은 놀랍게도 매우 매력적이어서 연주자인 우리가 음악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상당한 성찰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더 나은 음악인이자 인간이 될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다.

공연이 다가오면 손님을 초대하고, 표를 파는 것도 일이다. 귀국 독주회 때 아버지는 지인들께 자필 편지와 함께 초대권을 동봉해서 보내셨다. '전석 2만 원'이라고 쓰여있는 티켓을 받은 손님들이 기어이 티켓값을 지불할지 걱정이 돼 "본 초대권을 매표소에서 좌석권으로 교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를 같이 적어 넣으셨다. 그 후로도 매년 하는 독주회이건만 여전히 손님을 초대할 때 멋쩍어하시고, 미안해하신다. 내 손님을 초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클래식 공연 무료 초대 근절 운동을 매우 옹호하는 편이어서 무료 초대는 자제하려고 하지만 내 단독 공연에 초대하면서 티켓을 사라고 하기는 왜 이리 미안한 건지, 너무 썰렁한 객석을 마주하게 될까 겁이 나 막판에 다시 퍽 많은 사람을 무료 초대하곤 한다.

공연 당일,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치열하게 외로웠던 시간의 결과물을 목도해 준 관객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어 마이크를 들기로 한다. 기악 연주자로서 무대를 걸어나가 관객에게 목소리를 내어 말을 걸고, 연주에 와주셔서 감사하단 인사를 건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반갑고, 감사하다는 짧은 인사가 왜 그리 어색한지, 어떤 말로 시작을 해야 할지 말끝은 높여야 할지 낮춰야 할지 고민된다. 결국 만만한 날씨 이야기로 운을 떼는 경우가 다반사다. "비바람을 뚫고 자리해 주신", "눈보라가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등등 드라마틱한 날씨일수록 시작이 자연스럽다. 몇 해 전 9월, 공연장에 냉방도 난방도 필요하지 않던 날씨가 참 좋았던 그날 나의 인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렇게 화창하고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제 연주회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까지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말실수 아닌 말실수다. 날씨 좋은 날 내 연주회 오는 게 왜 어디가 어때서….

갖가지 자극적인 요소들로 중무장한 대중문화 콘텐츠가 즐비한 세상이다. 그 사이에서 꿋꿋하게 기초를 다지면서 그 끝도 완성도 성공도 보상도 보장되지 않은 캄캄한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클래식 음악인들에게, 화창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연주회를 찾아주셔서 감사할 만큼의 겸손을 요구하지는 않는 세상을 그려본다. 연주자들이 정성껏 준비해서 무대 위에서 진솔하게 들려주는 자기 이야기에 더 많은 사람이 귀 기울이기를, 폭우와 폭설에도 불구하고 매진 사례가 이어지는 개인독주회 소식을 많이 듣게 되기를 바란다. 김예지 목원대 관현악·작곡학부 교수

Copyright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