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보부상 서정진의 2024년
오전 8시 캐나다 의료진과 조찬 미팅. 이후 근처 병원 방문 후 오전 미팅. 점심식사 겸 의료진 미팅 후 오후 미팅. 저녁식사 겸 의료진 미팅. 하루 일과가 30분 단위로 촘촘히 짜였다.
매일 이런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하루 15~16명의 의료진을 만났다. 캐나다의 경우 워낙 넓어 일정을 맞추기 위해 경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대도시뿐 아니라 지방 소도시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의사들을 찾아갔다.
얼핏 보면 에너지 넘치는 영업사원의 하루 일과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지난해 여름 캐나다 지역 영업에 나선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이 소화한 일정이다.
최근 만난 서정진 회장은 "하루에 10여명의 의사를 만나 똑같은 내용을 설명하다 보니 나중에는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힘이 들기도 했다"면서도 "오너 회장이 직접 영업현장에 나오는 사례가 없어서인지 의사들의 호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일선에서 물러난 지 2년여 만에 경영에 복귀한 서 회장이 택한 것은 영업현장이었다. 캐나다 전역에서 자가면역질환 분야의 의료진 수백 명과 개별적으로 만났다.
서 회장은 지난해 미국, 캐나다, 유럽, 일본,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에서 영업했다. 그가 복귀하고 해외에 체류하지 않은 날은 거의 없을 정도다.
"제약·바이오사업은 결국 소매사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보따리에 제품을 싸들고 다니면서 파는 보부상과도 같아요."
그는 셀트리온의 미래도 결국 현장에 있다고 봤다. 처방권을 가진 의사가 제품의 매출을 좌우할 것이고 이들 의사를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서 회장은 "회사의 파운더(설립자)이자 오너 회장이 직접 만나러 온다고 하면 만나주지 않는 의사는 거의 없다"며 "영업과 관련된 내용도 바로바로 결정해주니 의사결정이 빠른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그가 현장을 고집하는 이유는 또 있다. 서 회장은 "현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전략회의를 따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우리 회사의 문제가 무엇이고 개선할 것이 무엇이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현장에 답이 있다"면서도 "(다른 경영인들에게) 힘은 들지만 현장을 가까이하란 얘기를 꼭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현장을 돌아다니면서도 서 회장은 셀트리온과 셀트리온헬스케어의 통합을 이뤄냈다. 해묵은 과제를 풀면서 셀트리온은 미래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서 회장은 올해도 안살림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보따리를 들고 다시 해외로 나설 계획이다.
곧 미국에서 열리는 JP모간 콘퍼런스를 시작으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유럽 등으로 출장이 예정돼 있다. 올해도 국내보다 해외에 머무르는 기간이 더 길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오너가 직접 영업하는 제약·바이오회사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며 "보따리상도 해본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울트라 영업사원이 된 만큼 후배들이 세계 1위 제약·바이오사가 되는 기반을 다지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서 회장의 재산은 수조 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1957년생으로 나이도 적잖다. '내가 서 회장이었다면…' 좀 더 편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쯤 그의 말이 이어졌다.
"30만개 정도의 제약·바이오회사 중 셀트리온은 50위권 정도로 평가됩니다. 5년 안에 15위권, 그다음 10위권 회사로 성장시킬 겁니다. 여기까지는 제가 끌고 가야지요."
서 회장은 "살아 있는 동안 후배들이 세계 1위 회사 화이자랑 맞장을 뜰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줘야 한다"며 "그러려면 보따리상을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서 회장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혁신가'에서 '희대의 사기꾼'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다. 오랜 기간 기록해온 기자로서 본 그는 적어도 개인의 영달보단 회사나 산업을 위해 행동한 사람이다.
"회사에 있으면 심심하고, 심심하면 직원들을 귀찮게 할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서 자리 지키고 있지 않고 해외로 영업을 다녀야 해요." 서 회장의 가벼운 농담에선 셀트리온 직원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2024년에도 서 회장은 전 세계를 누비는 보부상이 될 듯하다. 그의 행보가 셀트리온은 물론 우리 바이오산업 발전의 밑거름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김명룡 바이오부장 drago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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