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트럼프로 시작해, 트럼프로 끝난다
‘트럼프로 시작해, 트럼프로 끝날 한 해.’
2024년은 세계 76개국에서 전국 규모의 선거가 치러지는 ‘슈퍼 선거의 해’이다. 양안 관계뿐 아니라 미-중 관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1월13일 대만 총통 선거로 시작해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리턴 매치’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11월5일 미국 대선으로 마무리된다.
미국 대선은 새해 벽두인 1월15일 아이오와주 공화당 당원대회(코커스)로 시작된다. 이 선거의 핵심 관심사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4년 만에 귀환할지 여부로 모아진다. 이 문제를 놓고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가 1년 내내 미국 대선 과정을 지켜보며 씨름하게 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 여부는 말 그대로 미국이 지탱하는 현존 국제질서의 향방을 가르는 ‘중대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국내외 정책을 꿰뚫는 핵심 코드는 미국이 패권국가로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하며 이익을 취해온 현존 국제질서를 고수하는 데 따르는 의무와 비용을 짊어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4년에 걸친 집권 기간 동안(2017년 1월~2021년 1월) 국제질서의 두 축인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과 ‘자유무역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 기조는 재집권 이후 모든 나라를 상대로 10%포인트에 이르는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공약으로 더 극명해지고 있다. 나아가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구 온난화라는 현상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지구의 기온 상승을 막기 위해 전세계가 힘을 합쳐 협력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지구 온난화를 부정하는 트럼프가 복귀한다는 것은 인류의 장기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공화당 후보 경선에 나선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일단 각종 여론조사에서 60% 이상으로 독주하고 있다. 그러나 후보 선출 가능성이 100%인 것은 아니다. 최근 그에 맞설 유력 후보로 급부상한 이는 공화당 안팎의 중도와 온건 보수세력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한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다. 그가 첫 경선주인 아이오와에서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를 누르고 2위를 하면, 두번째 경선주인 뉴햄프셔에선 트럼프와 1위를 놓고 맞서는 ‘대항마’가 될 수도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1년 1월6일 의사당 폭력사태 등과 관련한 내란선동 혐의, 기밀문서 유출, 자산가격 조작 등의 혐의로 형사 기소됐고, 여러 건의 민사 재판도 진행되는 등 심각한 ‘사법 리스크’에 노출돼 있다. 헤일리 전 대사가 경쟁력을 확보하면, 공화당 주류가 그를 진지한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다. 물론, 현재로선 트럼프가 당내 도전과 사법 리스크로 인해 낙마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미 대선의 1차 분수령으로 꼽히는 것은 13개 주가 동시 경선을 치르는 3월5일 ‘슈퍼 화요일’이다. 바로 그 전날 1·6 의사당 폭력사태와 관련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첫 재판이 시작된다. 트럼프는 이를 ‘대선에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좌파의 음모’라 비난하고 대통령의 면책특권을 주장하며 재판을 지연시키려 하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한 잭 스미스 특별검사는 지난달 11일 1·6 의사당 폭력사태에 대한 공모 혐의가 대통령 면책특권 대상인지 신속히 판단해달라고 연방대법원에 요청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최종 판결 결과가 대선 투표일 전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민주당 후보로 나서는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2023년 가을께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역전된 상태다. 현직 대통령인 바이든이 스스로 물러난다고 결단하지 않는 한 후보가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 대선은 초경합주로 꼽히는 애리조나·조지아·미시간·네바다·펜실베이니아·위스콘신 등 6개 주에서 1~3%포인트 차이로 승부가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 6개 주의 약 5천만명 유권자 가운데 3% 안팎인 150만명이 향후 국제사회를 좌우하게 된다.
미국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미국 사회의 양극화·분열·혼란은 심해질 것이 분명하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의 낙마나 낙선은 2020년 11월 대선 패배 때처럼 1·6 의사당 폭력사태 같은 지지세력의 극단적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인지 트럼프의 당선보다 낙선이 미국에 더 큰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대선을 둘러싼 미국의 혼란은 선거가 치러지는 다른 국가의 극우 민족주의 세력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7일 방글라데시 총선, 2월14일 인도네시아 총선, 3월15~17일 러시아 대선, 4~5월의 인도 총선 등에선 권위주의적이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기존 집권 세력의 재집권이 유력하다. 10~11월 영국 총선에선 야당인 노동당의 승리가 예상되지만, 유럽 다른 나라에서 치러지는 지방선거에선 극우 포퓰리즘 세력의 약진이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는 결국 유럽연합(EU)의 균열을 심화시킬 것이다.
미국 대선 다음으로 중요한 선거는 13일 치러지는 대만 총통 선거다. 이 선거 결과는 향후 전개될 미-중 대결에 중요 변수가 될 수밖에 없다. 줄곧 선두를 지켜온 집권 민진당의 라이칭더 후보가 당선되면 지금처럼 양안 관계와 미-중 관계의 긴장이 지속되거나 더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견줘 대륙과 관계를 중시하는 허우유이 국민당 후보가 역전승을 거두면 양안 관계는 상대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이 경우 중국을 포위·봉쇄하려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현재 진행 중인 ‘두개의 전쟁’은 새해에도 확실한 종착점을 찾지 못한 채, 미국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난해 6월 초 시작된 우크라이나군의 반격 공세가 실패로 끝나면서, 미국·유럽의 ‘지원 피로감’이 커진 상태다. 러시아는 이 상황을 적극 활용해 이번 전쟁으로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남부 4개 주에 대한 굳히기에 들어가고 있다. 미국 매체 폴리티코는 지난달 27일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미국의 전략 역시 ‘완전한 승리’에서 ‘종전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 확보’로 이동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결국 전황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 국토 분단을 전제로 한 ‘한반도식 모델’과 가까운 타협안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를 위해선 우크라이나인들이 전체 영토의 20%를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또 이 타협안은 사실상 ‘미국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11월 미국 대선이 끝난 뒤에나 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역시 영토의 20%를 내주고 러시아와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한 우크라이나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일지 여부를 선택해야 한다.
가자 전쟁에선 이스라엘이 새해에도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를 박멸하겠다는 목표를 위해 당분간 ‘무차별 공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 등 국제사회의 압력이 강해지면, 수개월 안에 휴전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다. 현재 이집트 정부가 군사작전 중단, 양쪽 인질과 수감자 교환(1단계), 하마스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정파들이 참여하는 통합 과도정부 구성(2단계), 이스라엘 인질 전원 석방과 이스라엘 철군(3단계) 등으로 구성된 3단계 평화협상안을 제시한 상태다. 이스라엘이 이 협상안에 동의하려면 ‘하마스 박멸’이라는 목표를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 역대 최악의 극우 연정을 이끄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두개의 전쟁은 패권국인 미국의 의도대로 끝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두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난다 해도, 이미 시작된 ‘세계의 다극화’ 흐름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중·러는 전략적 연대를 강화하면서 중동·아프리카는 물론 중남미에서까지 각국과 경제·군사 협력을 확장하려 할 것이다.
‘디커플링’(관계 단절)에서 디리스킹(위험 완화)으로 이름을 바꾼 미국의 대중 공급망 분리는 새해에도 계속 추진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실제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 미지수이다. 중국은 2022년 이후 본격화된 미국의 기술 봉쇄를 뚫어내고 첨단 7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 반도체를 화웨이 스마트폰에 장착했다. 또 미래의 또다른 산업인 전기자동차 부분에선 이미 세계 수출 1위를 기록했다. 중국을 첨단 기술망에서 배제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장기적으로 중국의 첨단 분야 기술 독립을 재촉할 수 있다. 미국 정부의 갖은 노력에도 지난해 엔비디아·테슬라 등 미국의 빅테크 기업과 월스트리트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차례로 중국을 방문했다. 거대한 중국 시장을 놓칠 수 없다는 뜻을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다.
가자 전쟁으로 반미 정서가 강화된 중동에선 사우디아라비아 등 친미 수니파 아랍 국가들이 미국과 중·러 진영에 ‘양다리 걸치기’를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마스의 배후에 있는 이란은 미국과 핵협정(JCPOA) 복원 협상에서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또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이어지는 한 예멘의 후티 반군, 레바논의 헤즈볼라, 이라크·시리아의 친이란 무장세력 등 대리세력을 통한 저강도 교란전을 이어가며 영향력을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9월 극적인 정상회담을 통해 러시아와 전략적 협력관계를 복원한 북한은 중·러와 협력을 심화하며 미국과 국교 정상화 협상에 연연하지 않고 핵 역량을 고도화하는 길을 걸을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이른바 ‘저항의 축’을 구성하는 이란·북한 등을 제어할 수단과 도구가 마땅치 않다.
지난해 높은 물가 상승으로 경기 침체의 갈림길에 섰던 미국 경제는 연착륙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에 대처하려고 연방준비제도가 급속히 올린 고금리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 확실해 부동산 분야 등에서 후폭풍이 모습을 드러낼 우려가 크다. 중국 경제는 부진을 이어갈 것이 분명하나, 금융위기로까지 번질 가능성은 적다. 중국은 금융불안 속에서도 4~5%의 성장세를 유지할 것이다.
지난해 시작된 인공지능(AI) 혁명은 올해에도 가속화된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몰고 올 위험성에 맞설 규제 논의가 따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난해 11월 생성형 인공지능의 선두주자인 오픈에이아이의 최고경영자 샘 올트먼의 해고·복귀 사태는 위험성에 대한 우려보다 경제성을 중시하는 시장 논리가 일단 이겼음을 보여준다. 인공지능의 상업적 이용에 방점을 두고 규제에 소극적인 것으로 알려진 올트먼이 복귀하며 이미 불붙은 인공지능 개발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다. 이는 중국 등의 인공지능 개발을 자극할 수 있다.
지구촌의 이 모든 사건들은 다시 11월5일 미국 대선의 결과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면서 국제사회는 미지의 세계로 한발 더 나아간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귀환하면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 질서와 자유무역 체제에 결정적인 균열이 나고, 한-미 동맹을 기축으로 지난 70여년 동안 번영을 누려온 한국의 안보 환경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국내 혼란이 이어지며 미국의 국력은 당분간 크게 위축될 것이다. 어떤 결과에도 미국 패권에 맞서려는 중·러의 도전은 커지게 된다. 즉, 2024년 국제사회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가장 심각한 기로에 서게 된다. 양쪽 길 모두 밝은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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