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바이오 투자' 전망…"혹한기 지속, 경쟁력 갖춘 기업엔 기회"
“벤처 투자 늘어나야 바이오 생태계 선순환 가능”
(서울=뉴스1) 황진중 기자 =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팬데믹)을 거치며 메신저리보핵산(mRNA) 등 새로운 치료접근법(새 모달리티)에 대한 높은 관심과 풍부한 현금유동성 등으로 몸집을 불리던 글로벌 제약바이오 업계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코로나19가 풍토병 시대(엔데믹)로 접어들고 세계 경기침체의 장기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인상 기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위기 등 불확실성이 커지면서다. 투자자들은 빠르게 신규투자를 중단했다.
국내 바이오 벤처 업계에 대한 투자 심리 또한 빠르게 위축됐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앞다퉈 코로나19 백신‧치료제 개발에 나섰던 제약 바이오 기업들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점도 투자 심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으로 분석된다.
많은 전문가들이 2024년 전망도 낙관적이지만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상당수의 바이오기업이 핵심 인력만 남기고 사업을 중단하는 ‘홀딩’(Holding) 상태로 유지될 것이라는 참담한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다만 위기가 곧 기회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소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는 전문가들은 자금조달시장이 위축된 상황에서 기회를 잡으려면 기업마다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내면서 내실과 경쟁력 강화에 나서야할 것이라고 조언한다. 또한 정부가 바이오헬스 산업을 신성장동력의 하나로 꼽으며 긴급 자금조달에 나서고 있는 점도 긍정적 신호로 봐야한다는 주장을 편다.
◇2023년 바이오 신규 투자 1조에도 못미쳐…오픈이노베이션‧CDMO 생태계 위기
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바이오‧의료 분야 신규투자 금액은 2019년부터 2021년까지 1조원 이상을 기록하면서 급증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에는 1조6000억원 규모로 정점을 찍기도 했다. 2022년 5000억원가량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1조원이 넘는 자금이 바이오‧의료 분야에 신규 투자됐다.
2023년 바이오‧의료 분야 신규 투자는 그야말로 ‘혹한기’라는 말이 어울렸다. 2023년 3분기 누적 바이오‧의료 분야 신규 투자액은 6264억원이다. 전년 동기 8787억원에 비해 29% 감소한 규모다. 이대로라면 2023년 연간 바이오‧의료 분야 신규 투자액이 1조원을 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자금조달 동맥경화로 바이오기업의 사업이 중단되는 것은 바이오기업, 제약사, 글로벌 제약사,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 등으로 이어지는 바이오 생태계가 뿌리째 흔들리는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모범적인 오픈이노베이션으로 꼽히는 유한양행의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 같은 개발 성공 사례가 앞으로 나타나기 어려워질 수 있다.
렉라자는 폐암 세포 성장에 관여하는 EGFR의 신호전달을 방해해 폐암 세포 증식과 성장을 억제하는 표적항암제다. 지난 2021년 1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이전에 EGFR 티로신 인산화효소 억제제(TKI)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 T790M 돌연변이 양성 비소세포폐암 2차 치료제로 조건부허가를 받아 국내 31번째 신약으로 등록됐다.
렉라자의 원 개발사는 바이오기업 오스코텍의 자회사 제노스코다. 제약사 유한양행은 지난 2015년 7월 오스코텍‧제노스코로부터 렉라자를 기술도입해 비임상과 국내 임상 1상과 2상을 진행했다.
유한양행은 2018년 11월 글로벌 제약사 존슨앤드존슨(J&J) 이노베이티브 메디신(얀센)에 우리나라를 제외한 렉라자의 개발‧상업화 권리를 최대 계약금 1조4000억원 규모로 이전했다. J&J 이노베이티브 메디신은 렉라자의 글로벌 임상 3상시험을 마무리하고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신약으로 허가를 받기 위한 작업을 개시했다. 허가와 처방이 순항할 시 오픈이노베이션 방식을 통해 국산 글로벌 블록버스터 약물이 탄생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바이오기업에 대한 투자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로는 CDMO 업계와의 연관성이 꼽힌다. 대규모 위탁생산(CMO)은 글로벌 제약사 등이 대부분 고객사지만 위탁개발(CDO)의 주 고객사는 바이오기업이다.
신약 개발은 크게 타깃 질병에 대한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는 ‘발굴’(Discovery) 단계와 전임상, 임상시험을 실시하는 ‘연구’(Research) 단계, 신약 허가신청을 하는 ‘개발’(Development) 단계로 구분된다. CDO 사업은 신약 개발 중 연구와 개발 단계에 필요한 서비스인 세포주 개발~임상 1상 물질 생산 등을 제공하는 사업이다.
의약품 생산시설이 없거나 부족한 바이오기업 등 소규모 인력으로 R&D 역량에 집중하고 있는 기업들은 대부분의 개발 활동을 위탁사에 맡긴다. 이는 바이오기업 사업이 어려워지면 CDO 사업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실제로 CDO 사업에 강점을 보유하고 있는 해외 CDMO 기업 론자는 2023년 매출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 론자의 2023년 상반기 매출은 전년 동기(16.8%) 대비 6.5% 성장에 그쳤다. 론자는 매출 급감의 원인으로 바이오기업의 초기 약물 개발과 세포유전자 치료제(CGT) 분야에서의 CDO 프로젝트 수주가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2024년에도 바이오 혹한기 이어질 듯…“자금조달 끊겼다”
국내 바이오기업들은 2023년 진행한 기업공개(IPO)에서도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다. 대부분 공모가희망밴드를 밑도는 금액으로 공모가가 정해졌다. 기업 인수합병(M&A)이 활발하지 않은 국내에서 IPO는 국내 벤처투자사들의 대표적인 자금회수 방안이다. IPO 기업들의 기업가치가 낮은 평가를 받으면 비상장사들에 대한 투자는 더 어려워진다. 바이오기업 IPO가 다시 흥행하기 전까지 바이오벤처들의 자금조달에 한파가 불 것이라는 진단이 나오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비상장 바이오기업의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상장을 추진 중인 기업들의 가치가 높은 평가를 받아야 비상장사도 마찬가지로 높게 평가받아 자금조달이 수월할 수 있다”면서 “벤처투자사들은 바이오 분야에 투자해도 자금 회수가 안될 것으로 보고 투자를 줄이고 있다. 줄이는 수준이 아니라 딱 끊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이어 “벤처캐피탈(VC) 사이에서도 각사의 입장이 있어 선뜻 바이오기업에 투자를 단행하기 어렵다. 앵커 VC가 다른 VC에게 신뢰를 주면서 전반적인 자금유치를 이끄는 것이 필요하지만 아무도 앵커 VC 역할을 맡으려고 하지 않는 상황”이라면서 “좋은 기업에 비교적 초기 투자에 성공한 VC에게 ‘당신들이 자금회수할 확률이 더 높으니 조금 희생해서 더 투자했으면 좋겠다’는 식의 말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 중심 바이오기업은 조달한 자금을 대부분 신약 후보물질 개발을 위한 임상시험 등에 사용한다. 임상시험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후보물질 발굴부터 신약 허가까지 1조원 가량의 자금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진다. 바이오기업 입장에서는 기업가치를 낮게 평가받아 많은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면 연구에 대한 투자는 커녕 석‧박사급 연구 인력 유지 등 운영자금을 충당하기에도 빠듯할 수 있다.
비상장 바이오기업 CFO는 “신약 개발사를 중심으로 보면 시리즈A, B, C 등의 단계에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해 신약 후보물질 임상시험에 활용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졌다”면서 “자금조달이 어려워지면 연구 진행에 한계가 생긴다. 연구에 진전이 없으면 자금을 유치할 때 기업이 갖고 있는 강점을 보여주기 힘들다.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VC는 2024년 바이오 분야 투자 상황을 더 혹독하게 내다봤다. 과장해서 신약 개발 바이오기업의 태반이 사업을 중단한 채로 버티거나 정부 연구보조금을 받아 연명하는 ‘좀비 바이오’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수천억원 규모 자금을 운용 중인 한 VC 관계자는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바이오 산업에 관심이 몰리면서 대형 벤처투자 등이 이뤄졌다. 엔데믹이 시작되면서 이차전지 등 다른 분야에 대한 투자 수요가 높아졌고, 바이오기업 IPO가 흥행하지 못해 VC들의 관심이 시들해졌다”면서 “과장을 보태서 신약개발사의 절반은 사업을 중단할 가능성이 있다. 정부 보조금으로 이름만 유지하는 바이오기업도 여럿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존 투자사에 대한 추가 투자 등이 필요해 투자 여력이 다소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투자금은 수익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몰리는 성향이 있다”면서 “VC 입장에서 바이오 분야에 대한 투자 매력이 다소 반감된 것이 자금조달 혹한기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긴급 자금수혈 나선 정부…"내부 역량·경쟁력 갖춘 기업엔 기회"
바이오 분야는 우리나라 신성장동력 중 하나다. 투자 한파 위기에 맞서 정부가 나섰다. 보건복지부는 2023년 ‘K-바이오‧백신 1호 펀드’를 결성해 투자를 진행할 방침이다. K-바이오·백신 1호 펀드 주관 운용사인 유안타 인베스트먼트는 정부와 국책은행 출자금 600억원과 민간 출자금 900억원을 더해 총 1500억원 규모로 우선 결성을 추진했다. 출자 주체는 정부 300억원, 한국산업은행 135억원, 한국수출입은행 90억원, 한국중소기업은행 75억원 등이다.
정부는 K-바이오·백신 2호 펀드 주관 운용사로 프리미어 파트너스를 선정하고 조성된 1116억원에 대해 우선 결정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1호와 2호 펀드의 우선 결성 절차를 마무리하고, 신속하게 투자를 개시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복지부는 1호와 2호 펀드 운용사와 공동으로 투자설명회를 개최해 투자 규모와 대상, 투자 심사 절차 등을 알릴 방침이다.
바이오 업계에 절실한 자금조달에 있어 숨통이 트이면 바이오기업들은 신약 후보물질 공급처로 꾸준히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 모달리티뿐만 아니라 혁신적인 모달리티 R&D에도 힘쓸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곳곳의 바이오기업들은 mRNA에 더해 기존 치료제 대비 항암효과를 높인 약물항체접합체(ADC), 표적 단백질 저해제(프로탁) 신약 개발에 나서고 있다.
국내에서도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ADC), 피노바이오(ADC), 인투셀(ADC), 업테라(프로탁), 이노큐어테라퓨틱스(프로탁), 유빅스테라퓨틱스(프로탁) 등이 활발하게 새 모달리티를 연구 중이다. 바이오기업들이 혁신적인 기술을 연구하면 상대적으로 자금 여력이 있는 제약사 등이 이를 도입하거나 공동연구를 통해 후속 연구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신약 개발이 진행될 수 있다.
조헌제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상무이사는 “국내외 불확실성 등에 따라 바이오 분야 투자가 어렵다고 하지만 투자를 받는 기업들은 여전히 투자를 받고 있다. 다만 시장 자체가 과거보다 평가 잣대 등이 엄격해진 부분이 있다”면서 “바이오기업들이 신약 후보물질 공급처로서 담당하고 있는 역할이 있으므로 투자 시장에서도 집중적으로 바이오를 다룰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바이오벤처 투자 분야의 바닥을 본 것 같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기류가 나타나고 있으므로 2024년 하반기부터는 금리 등 시장 상황이 안정화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서 “어려운 시기지만 내부 역량과 경쟁력 등을 강화해둬야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ji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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