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네가 살아서 너무 기뻐”… 아빠는 하늘에서 웃을 것이다

정용준 소설가 2024. 1. 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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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구하고 떠난 아빠를 추모하며… ‘딸 셋 아빠’ 정용준 소설가 기고

살기 위해 애쓰는 건 생각과 의지가 아닌 본능이다. 날아오는 공을 순간적으로 피하는 것 같은. 생존에 직결된 방어 행동은 대뇌의 관여 없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본능적으로 삶을 원하는 것이다. 계속 살기를.

/일러스트=이철원

2022년 한 해 4만113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2323명이 다쳤고 317명이 사망했다. 이렇게 많은 화재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상하게 했다는 사실이 두렵고 아득하다. 하지만 실감나진 않는다. 숫자와 통계는 일시적으로 충격을 줄 뿐 사건에 담긴 사연과 사람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12월 25일 도봉구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20명 넘는 사람들이 다치고 2명이 사망했다. 사건은 하나지만 슬픔은 하나가 아니다. 거룩하고 고요한 그 밤에 비극적인 사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중 한 가족의 하루를 상상해본다.

열심히 살아온 젊은 남녀가 있다. 남자는 서른두 살 약사, 여자는 서른세 살 간호사다. 둘은 가족을 이루고 두 딸을 선물로 받았다. 첫째는 두 살, 둘째는 7개월. 정신없이 살아야 했을 것이다. 육아하고 일하고, 집 구하기 위해 대출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저녁 때 한자리에 모이면 함께 밥 먹고 예쁘게 나온 사진을 고르고, 고단한 눈을 감을 땐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딸들이 커가는 모습과 웃는 얼굴을 보면 기이한 힘이 솟았을 것이다. ‘이래서 내가 사는 거지.’ ‘그래서 힘들지만 돈을 버는 거지.’ 애쓰며 사는 보람도 느꼈을 것이다. 마침 크리스마스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부부는 서로 수고의 말을 건네고 사랑의 인사를 나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달콤한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두 딸과 함께 다정하게 사진도 찍는다. 대단한 이벤트나 드라마틱한 하루는 없었지만 부부는 소소하고 충만한 행복감을 느낀다. 두 딸을 품에 안고 이내 잠에 빠져든다.

깊은 새벽 아래층에서 시작된 불이 순식간에 부부의 집을 삼켰다. 현관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갈 수조차 없는 무시무시한 불길이다. 부부는 불을 등지고 두 딸과 함께 창가에 섰다. 맨몸으로 4층에서 뛰어내려 무사할 순 없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본능적으로 뛰어내렸다. 살아야 했다. 경우의 수를 따지고 무사할 확률을 따질 시간이 없었다. 아내는 큰 부상을 입었고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두 딸은 무사했다. 남편은 경비원들이 가져온 재활용 포대 위로 첫째를 던졌고, 둘째 딸은 품에 안고 뛰어내렸다.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딸은 살았지만 아빠는 죽었다는 사실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세상에 슬픈 일은 너무 많이 일어나지 않는가. 지금의 뉴스는 다음의 뉴스로 바뀌고 오늘의 소식은 내일의 소식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하지만 아빠의 죽음은 마음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아빠 품에 안긴 딸은 살았지만 박씨는 바닥에 부딪히며 머리를 크게 다쳐 결국 숨졌다.’

아파트 4층에서 떨어지는 아빠의 모습을 상상했다. 어떤 자세로 떨어져야 품에 안은 딸은 무사하고 아빠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게 되는 걸까. 마음이 저리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실제로 통증을 느껴 손으로 명치를 꾹 눌러야 했다.

4층에서 뛰어내린 이유는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살려야 한다’였다. 불을 피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단순히 생존 본능으로 설명한 것이 부끄럽다. 그보다 더 큰 본능과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숭고하다’, 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행동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도 세 딸을 키우는 아빠. 같은 상황을 가정해본다. 딸을 품에 안고 뛰어내리자. 딸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혹 내가 죽더라도. 나는 깨달았다. 아빠는 대뇌로 판단한 게 아니다. 그건 본능이었다.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를 살려야 한다는 본능.

어려운 날들이다. 미래를 예견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전망을 내놓는다. 결혼과 출생은 점점 줄어든다. 가족이 무너지고 마침내 사회도 무너질 것이다. 취업이 어렵다. 고용은 불안하고 경제 기반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집을 구할 수 없다. 생태계는 파괴되고 기후 위기로 이상한 날씨가 이어진다. 아이를 낳는 것도 어렵고, 낳는다 해도 제대로 키우기도 어렵다. 뉴스만 보면 사회가 곧 무너질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사람은 사람을 만난다. 사랑을 느끼고 가족을 이룬다.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험난한 육아를 온몸으로 이겨낸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가족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시대에서도 어떤 가족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고 아빠는 아이를 살리고 죽음을 택했다.

이 사건은 곧 잊힐 것이다. 이상하고 슬픈 일은 계속 일어나니까. 오늘의 사건이 주는 충격과 자극이 어제의 사건을 희미하게 희석할 것이다. 하지만 아빠가 딸을 구하고 목숨을 잃었다는 이 사실은 그 가족에겐 영원한 이야기로 살아남는다. 그 이야기가 남편을 잃은 아내에게, 아빠를 잃은 두 딸에게, 영원히 기억된다. 나는 확신한다. 이야기의 힘으로 가족들의 미래는 지켜질 것이라고. 아빠는 세상에 없지만 아빠의 희생은 창창하게 열린 딸들의 남은 날을 함께하며 보호할 것이라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두 딸의 안녕을 위해 기도한다.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을 아내의 오늘과 내일을 염려한다. 세상이 진창에 처박힌 폐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온갖 범죄와 비정한 사람들의 소문과 소식에 이 땅에 더는 사랑과 온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살아남은 가족을 위해 문을 두드리고 이름을 불러주고 말 없이 손을 잡아주며 함께 울고 위로해주는 이웃과 친구와 동료들이 있다. 분명히 있다.

정말로 영혼이 있다면,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가족들을 지켜보는 마음과 정신이 있다면, 그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지금 슬프냐고.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만 같다.

‘그건 잘 모르겠고 딸이 살아서 너무 기쁩니다.’

정용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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