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원조 산수책·D램 반도체·60년대 영사기… 현대사 일군 보물 한자리에
대한민국 현대사의 ‘보물’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전시가 갑진년 새해에 열린다. 서울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오는 9월 개막 예정인 ‘나의 현대사 보물전(展)’이다. 본지 ‘나의 현대사 보물’ 코너에서 소개한 명사들의 소장품에 얽힌 이야기와 그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는 자리다. 지난해 4월부터 33인이 소장품을 공개한 데 이어 새해에도 각계 명사들이 각자의 보물을 통해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증언할 예정이다. 전시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조선일보가 공동 개최한다.
◇해방과 전쟁 거쳐 ‘한강의 기적’까지
‘나의 현대사 보물’에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난다. 원로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지금도 모르는 단어는 반드시 찾아본다”는 국어사전엔 우리말 문법조차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식민지 청년의 고뇌가 서려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1956년 국민학교 산수 교과서엔 ‘유엔의 도움으로 펴냈다’는 문구가 있다. 원조받은 책으로 공부한 반기문 어린이가 훗날 유엔의 수장이 된 장면은 원조받는 나라에서 유일하게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발돋움한 대한민국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의 성조기는 그를 미국으로 데려가 공부시킨 주한미군 칼 파워스 상사의 장례식 때 관을 감쌌던 것이다.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에서 세계적 목회자로 성장한 김 목사의 삶 역시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1960년대 군인들은 베트남으로, 간호사와 광부들은 독일로 떠났다. 광부들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들으며 고된 노동을 견뎠다. 2013년 파독 50주년 기념 독일 공연 때 입은 의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미자는 “1965년 사이공(현 호찌민) 위문 공연에선 ‘동백아가씨’만 앙코르로 일곱 번을 불렀다”고 회고했다. 해병대에 입대해 베트남 파병에 자원한 가수 남진도 전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물로 소장하고 있다.
이런 노력이 모여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이 소장한 256메가 D램은 ‘반도체 코리아’의 신호탄이었다. 미국·일본 기업을 쫓아가는 데 급급했던 삼성 반도체가 IBM을 비롯한 세계적 기업 제품에 탑재됐다. 현재 반도체는 한국 수출의 19.3%(2022년 기준)를 차지한다. 한국 전산학 박사 1호인 문송천 전 KAIST 명예교수가 집필한 최초의 한글 컴퓨터 교재들 역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1970년대에 이미 정보화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레슬링의 양정모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따낸 대한민국 첫 금메달과 홍수환이 1977년 ‘4전5기’끝에 카라스키야를 KO시키고 받은 챔피언 벨트는 ‘우리도 세계 1등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한국인들에게 심어줬다. 발레리나 강수진은 슈튜트가르트 발레단의 군무 무용수에서 주연으로 발탁돼 예술감독에게 ‘줄리엣’ 의상을 물려받았다. 한국인 최초로 발레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도 받아 서양 예술에서도 한국이 최고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고별 공연이 끝난 뒤 단원들이 서명한 강수진의 초상화를 선물했다.
◇문학·미술·가요… 문화사의 보물들도
‘빨간 마후라’, ‘연산군’ 같은 히트작을 상영했던 영화인 신영균의 영사기는 한국 영화의 ‘충무로 시대’를 상징한다. 가수 양희은의 청바지는 1970~80년대 자유분방했던 청년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출판인 열화당 이기웅 대표가 펴낸 이승만 자료집 ‘우남실록’(1976)과 ‘정본 백범일지’(2015)는 우리 역사를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신념의 산물이었다.
문화가 성숙하는 과정은 그러나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작품 ‘천국의 신화’ 일부 장면이 음란하다는 이유로 기소된 만화가 이현세가 2001년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자 일본의 동료 만화인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액자에 넣어 보내왔다. “무죄 승리 축하합니다.” “정의는 이긴다 표현은 자유롭다.” 한글과 일본어로 쓴 메시지는 표현의 자유가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그냥 주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용의 눈물’ ‘태조 왕건’ ‘야인시대’를 비롯한 드라마 작가 이환경의 대본들, ‘킬리만자로의 표범’ ‘타타타’ 같은 히트곡의 가사를 쓴 작사가 양인자의 악보들, 군대를 예능의 장으로 불러낸 ‘우정의 무대’ 진행자 이상용의 군복처럼 한국인들을 열광시켰던 소장품들도 있다. 9000여 권에 이르는 언론학자 정진석의 장서·자료들,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이 50여 년간 써온 일기장,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이 남편인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과 함께 평생에 걸쳐 수집한 문인들의 원고·유품들은 각각 그 분야의 문화사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을 보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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