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떠러지 피란처가 ‘핫플’로…영도가 내뿜는 혼종의 에너지
- 바다·전쟁·골목·영화·경계
- 부산 대표하는 5가지 키워드
- 이 모든게 다 해당되는 ‘영도’
- 아찔한 해안가 다닥다닥 모인 집
- 흰여울마을에 모여드는 관광객
- 쇠퇴한 조선업 잔재가 멋이 된
- 깡깡이마을·봉래동 물양장까지
- 켜켜이 쌓인 부산史 정체성 되다
휴일 아침 일찍, 영도에 들렀다가 집으로 향한다. 360도 회전하며 오르는 부산항대교는 매번 롤러코스터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수평선 새벽 구름 위로 붉은 얼굴을 반쯤 내민 태양이 오늘따라 더욱 신비롭게 느껴진다. 어둠에 묻혀 있던 바다가, 땅이, 공기가, 기운이 저 여명으로 인해 되살아나고 있다.
대교를 가로지르며 스쳐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마치 영화 씬과 같이 겹겹이 이어진다.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산의 능선은 하루 중 가장 선명한 실루엣으로 보인다. 경사지 집들과 삐죽삐죽 솟은 아파트 창들에 드문드문 불이 밝혀지고, 부두의 거대한 크레인들은 층층이 쌓은 컨테이너를 옮기기 시작한다. 검은 기운이 가시지 않은 바다에는 팬스타크루즈 한 척이 떠 있고, 그를 비켜 지나는 작은 고깃배의 분주함도 보인다. 어스름에서 깨어나는 도시 곳곳에 생기가 스민다.
그 순간 문득 혼잣말을 뱉는다. ‘이것이 부산아이가.’ 달리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이 새벽녘 해 뜰 시간에 부산항대교-광안대교를 건너며 겹쳐 보이는 여러 장면 자체가 도시 부산의 본캐(본모습)가 아니겠는가 싶었다.
▮이 도시, ‘레이어’가 많고 다채
어느 도시가 뭐 안 그런 곳이 있겠냐 만은, 특히 부산이라는 도시는 다종다양한 결이 혼재돼 있다. 세계의 메트로폴리스(대규모의 광역권 大都市) 중에서도 거의 유일무이하다. 인구 350만 대도시에 산과 바다, 강이 엉켜있는 지형적인 특징도 그렇지만, 짧은 기간 겪은 근현대사의 드라마틱한 여러 사건도 한몫했다.
시계추를 되감아 당장 100년의 시간을 돌아보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근대화 과정을 온몸으로, 정통으로 맞았다. 그로 인해 과거 역사가 남긴 충돌의 흔적들과 산업화를 이룩하기 위한 억척같은 노동의 잔재들, 그리고 첨단 미래도시로의 열망들이 도시 곳곳에 뒤섞여 있다. 지정학적 특징으로 보면, 대륙 끝단이면서 동시에 대양을 향하는 시작 지점이다. 그렇기에 중앙정치에 대한 외면 또는 견제 역할을 감당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외세에 대한 끝없는 갈등과 융화의 역사적 현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도시를 무 자르듯 수직으로 잘라 볼 수 있다면, 무수한 켜들이 누적되고 상호 충돌하는 복잡다단한 단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뒤섞여 있는 혼재 자체가 당장에는 무질서로 보일 수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이질적인 것이 상호 겹쳐지면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색다른 생성의 발화점이 되기도 한다. 아시다시피, 어떤 새로운 문화가 발아하기 위해서는 분명 기존 문화와 문화들 사이의 그 애매모호한 경계지점에서의 숱한 갈등과 충돌이 동반되어야 한다. 문화와 문화가 서로 겹치고 겹쳐서 층을 이루는 그 흐릿함의 구역이 있어야 창발의 에너지는 서서히 농축되고 나아가 생성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태생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무수한 켜가 누적되어 경계의 속성을 배태(胚胎)한 부산이야말로 바로 이 레이어드(layered, 겹쳐짐)의 혼종(混種)으로부터 오히려 도시 정체성을 모색하고, 변화의 기류를 찾아야 한다.
▮혼종의 에너지, 예컨대 영도
겹쳐짐의 혼종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가는 부산의 대표적 스팟을 꼽자면 ‘영도’를 최우선으로 들 수 있겠다. 영화 ‘변호인’ 촬영장소로도 잘 알려진 영도의 ‘흰여울마을’은 한국전쟁의 아픔이 그대로 새겨진 곳이다. 거주할 장소가 다급했던 피란민들은 산허리춤으로 오르거나, 30여m 낭떠러지가 있는 해안 벼랑 끝에 위험을 무릅쓰고 손바닥만 한 집을 다닥다닥 지었었다.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마을 골목골목에서, 혹은 각 주호(住戶·주거 단위)에서 보는 바다 뷰가 너무나도 낭만적이어서 많은 젊은 관광객이 인생샷을 찍으려 찾고 있다.
골목 사이 계단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푸르디푸른 수평선과 묘박한 선박들의 장관은 정말 유니크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 곳에서 건진 사진과 경험담은 인스타그램을 장식하기에 안성맞춤인지라, 부산의 대표적인 ‘인싸들의 핫플’이라 부를 만하다. 장소의 매력을 귀신같이 포착하는 영화·방송에 노출 빈도가 점점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마을이 특별한 이유는 아픔의 역사와 광활한 바다와 사이사이 골목과 감성적 스토리가 버무러져 도시 부산의 몽타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수리조선업의 메카인 영도 ‘깡깡이마을’도 부산의 또 다른 표정을 담은 장소다. 지금도 이 지역의 산업으로 유지되는 수리조선업의 명맥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에는 예술인들과 문화기획가의 노력으로 마을 곳곳에 그래피티, 예술 오브제 등이 설치되어 색다르게 변신하고 있다. 쇳소리와 매캐한 산업재 냄새가 나는 근대화의 자국 위에 탈현실적 예술의 기운이 덧입혀져 SF영화 한 장면 속을 거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인근에 있는 봉래동 물양장(소형 선박이 접안해 계류하는 안벽 구조물) 역시 시공간을 초월한 저세상 텐션을 뿜어낸다. 하역한 물류들을 임시 보관하던 창고 군(群)과 그 앞에 계류한 선박들의 선수(船首)는 투박한 부산싸나이 이미지를 물씬 풍긴다. 바다 건너 북항과 그 너머 중첩되어 보이는 도시 조망이 꽤나 매력적이라, 최근 여기 창고건물 중 몇몇은 개성 충만한 카페, 레스토랑으로 손바뀜이 일어나고 있다.
이 미장센 조망의 뷰포인트를 조금 더 높은 지점에서 즐기려 한다면, 영도 청학동 산복도로 카페(신기산업, 카린, 220V 등)에 방문하는 것이 탁월한 선택이다. 사방팔방 트인 조망은 도시 부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데, 특히 신기한 것은 부산의 왼쪽 끝(송도)에서 오른쪽 끝(오륙도)이 한눈에 포착된다는 사실이다. 슬로우 무빙을 따라 보이는 파노라마 뷰파인더 안에는 부산의 바다가 있고, 부산의 산이 있고, 부산의 산업이 있고, 부산의 일터와 집이 빈 곳 없이 차곡차곡 겹쳐 있다. 마치 시어(詩語)의 행간과 같이 부산 사람들의 숱한 일상이, 질곡의 역사가, 그리고 온갖 희노애락이 그 사이사이로 언뜻언뜻 보인다.
▮다섯 가지 요소에 주목한다
레이어드 도시, 부산의 특징을 단적으로 영도의 현상(現像)에 빗대어 설명했다. 서사적 수사(修辭)를 통해 사실은 침잠(沈潛)되어 있는 도시의 켜들을 들추어내려 했다. 부산의 고유한 매력을 자아내는 요소로 여러 가지를 손꼽을 수 있겠으나, 필자는 특히 다섯 가지에 주목한다. 도시 부산의 풍경을 자아내는 대표적인 인자(因子)로 [바다]를 꼽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간직하고, 기억하고, 되새기며, 새롭게 재해석해야 하는 아픈 기억, [전쟁]의 흔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부산의 한 일부이다.
또한 산이 많은 지형적인 특징과 더불어 피란 시절의 애환이 만들어 낸 도시의 실핏줄 [골목] 역시 부산의 주요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짙은 감성이 [영화]라는 콘텐츠와 절묘하게 만나 ‘영화의 도시’가 된 것은 부산의 숙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부산에는 실험적 문화현상들이 심심찮게 튀어나오는데, 이는 부산의 뿌리 깊은 [경계]적 속성에 기인한다.
이 다섯 가지 켜의 기반 위에 우리 도시만의 표정과 우리 도시만의 문화가 만들어져 왔고, 지금도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부산에서 이루어지는 다방면의 창작 활동이나 사회운동, 정책 역시 이 켜들과의 관계에서 인터위빙(inter-weaving, 상호직조)하며 새로운 도시의 얼굴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 잇대어-짓기의 촘촘함으로 부산다움은 더욱 윤곽이 선명해질 것이다. 그러니 레이어드의 혼종은 우리 도시만의 고유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밑그림(rough sketch)이요, 그림판인 셈이다.
※ 공동기획 : 국제신문, 상지건축
*‘오! 부산’ 강연 일정 blog.naver.com/osangji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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