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cm ‘작은 지구’의 탄생 과정···골프볼 제조현장 가보니
코어 제작 후 로봇이 딤플커버 씌워
꼼꼼한 표면세척과 미세연마 후 인쇄
톱코팅 후 6단계 경화과정 거쳐 완성
골프볼은 종종 지구와 비교된다. 핵-맨틀-지각으로 이뤄진 지구처럼 볼도 비슷한 단면 구조로 만들어져서다. 우리가 거대한 지구에 대해 아직 모르는 부분이 있듯 골프볼의 비행과 관련해서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는 비밀이 존재한다. 볼 관련 특허만 해도 1500개가 넘는다. 직경 4.3cm(엄밀하게 말하면 42.67mm 이상)의 작은 볼에 오묘한 세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화학, 물리학, 재료공학, 유체역학, 컴퓨터공학 등의 다양한 과학이 총동원되는 골프볼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국산 골프볼 제조사인 볼빅의 충북 음성 공장에 다녀왔다.
사실 볼 제조현장 체험을 기획했던 건 2023년 11월이었다. 그런데 그 직후 볼빅 제1공장이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볼빅은 악재에 직면했지만 노후한 기존 시설을 현대화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1년간 제1공장의 재건을 모두 마친 볼빅은 2019년 준공된 제2공장까지 합쳐 최첨단 생산 공장 건립을 완성했다. 음성 공장에서만 연간 200만 더즌의 볼을 생산할 수 있게 됐고, 해외 외주 공장 200만 더즌까지 포함하면 연간 생산량은 총 400만 더즌에 달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돋움했다는 게 볼빅의 설명이다.
아울러 세계적인 브랜드에 전혀 뒤지지 않는 볼 연구소를 보유한 것도 눈에 띈다. 연구소 인력은 데이터 분석 전문 연구원과 엔지니어 등으로 구성됐고 경기 평택에는 국내 골프용품 제조업체 최초로 야외 테스트 필드를 갖췄다. 400m 길이의 테스트 필드에는 스윙 로봇과 볼의 궤적을 추적해 성능을 데이터화하는 분석 장비가 구비돼 있다.
우리는 음성 공장에서 볼의 중심핵인 코어(core)를 전담 생산하는 제1공장부터 둘러봤다. 합성고무를 이용해 반발력이 우수한 코어를 열 성형하는 공정이 제1공장의 핵심 역할이다. 재건을 통해 세계 최대 규모의 듀얼 코어 전문 생산 시설로 거듭났다는 게 안내를 맡은 이 회사 브랜드전략팀 양현우 대리의 설명이었다.
코어 제작을 위한 첫 번째 시설은 흡사 거대한 떡 방앗간과 유사했다. 고무와 안료, 화학약품을 골고루 섞는 배합기가 있고, 그 앞으로는 고무 반죽을 일정한 두께로 가공하는 롤러가 돌아가고 있었다. 고무에 어떤 첨가제를 넣느냐에 따라 물성이 변하고 안료에 따라 다양한 색을 가지게 된다. 코어는 볼의 비거리 성능을 좌우하기에 ‘볼의 엔진’으로도 불리는데, 각 모델에 따라 정확한 혼합 비율로 재료들을 배합해야 원하는 무게와 컴프레션(압축강도), 초기 속도 등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작업장 한쪽에는 노랑, 주황, 녹색, 핑크, 블루 등 다양한 컬러의 고무들이 일정한 두께로 가공돼 작업대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마치 색색의 섬유 원단처럼 보였다.
배합된 재료들은 긴 가래떡 형태로 압출 가공됨과 동시에 3cm 정도 길이로 잘려 나왔다. 작업자는 잘린 배합고무의 무게를 전자저울로 측정해가면서 커팅기의 속도를 조절했다.
일정한 크기와 무게로 잘린 배합고무는 고온 고압의 열 성형 프레스 과정을 통해 둥근 코어 형태로 가공된다. 하지만 이 과정은 공개 불가여서 잠시 눈으로 보는 것까지는 허용됐지만 카메라 촬영은 할 수 없다고 했다. 반원 형태로 나뉜 몰드 안에 배합고무를 하나씩 넣은 뒤 위아래 뚜껑을 결합해 성형하는 방식이었다. 몇 도의 온도로 굽고 냉각하는지 등은 기밀이다. 이중 코어는 이 과정을 한 번 더 거친다. 공장을 재건하면서 전기 전열 방식을 도입한 덕분에 생산성이 30% 이상 향상됐다고 했다.
열 성형 과정을 거쳐 나온 코어는 여러 개가 한 판에 붙어 있었는데 하나씩 떼는 작업을 잠시 체험했다. 처음에는 요령을 몰라 무작정 비틀어가며 뗐는데 곧 엄지손가락으로 볼을 꾹 누르면 쏙 빠진다는 걸 터득했다. 코어에는 여전히 열기가 남아 있어 따끈따끈했다. 하나씩 분리된 코어는 곧바로 일정한 사이즈로 가공하는 연마와 세척, 그리고 건조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렇게 생산된 코어는 제2공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2019년 이미 자동화 설비로 준공된 제2공장은 코어에 딤플 커버를 씌우고 인쇄 후 유광이나 무광 코팅, 검사, 포장 공정을 통한 완제품을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코어에 딤플 커버를 씌우는 과정은 로봇이 담당하고 있었다. 1대의 로봇이 성형된 코어를 틀 안에 넣고, 사출 공정을 통해 커버가 씌워지면 사출선을 자르는 공정까지 척척 해내고 있었다. 사출선이 있는 볼은 마치 띠를 두른 토성을 연상시켰다.
운이 좋게 딤플 커버 금형 교체 작업도 볼 수 있었다. 금형의 위아래를 살펴보니 곰보 자국(딤플)이 있는 틀이 들어가 있었다. 코어를 넣은 뒤 금형이 위아래로 덮이면 사출선에 있는 여러 개의 구멍(gate)을 통해 커버 소재가 주입되게 되는데, 이때 압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거대한 유압프레스로 금형을 누른다고 했다. 작업자는 “사출 압력으로 인해 자칫 2개의 금형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수백 톤의 프레스 압력으로 누른다”며 “이를 통해 소재들이 좀 더 밀도 있고 균일하게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
볼을 빙 둘러싼 띠를 제거한 뒤 볼에 남아 있는 1mm 크기의 작은 사출선 흔적은 ‘버핑 로봇’이 매끈하게 정리했다. 이후에는 작은 세라믹 돌을 이용한 표면 세척과 미세 연마 작업에 들어갔다. 거대한 솥 모양의 표면처리기에 세라믹 돌과 볼을 넣은 후 물을 뿌려가며 빠르게 회전시키면 돌과 볼이 마찰하면서 볼의 표면이 매끈해졌다.
약 3분 후 표면처리기 안에 있던 볼이 배출됐는데 마침 노란색이어서 막 밭에서 따온 수많은 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세라믹으로 연마한 볼은 다시 한 번 깨끗한 물로 세척한 뒤 약품을 이용해 얇은 코팅을 한다. 보다 깊이 있는 색감을 내기 위한 밑 작업이다.
건조된 볼에는 로고와 정렬 라인 등을 인쇄한다. 패드가 위에서 내려와 볼을 살짝 찍을 때마다 볼빅 영문 로고와 라인이 새겨졌다. 여기까지는 여느 볼 공정과 다르지 않았다. 볼빅의 최대 강점은 다양한 컬러와 문양으로 감성을 자극한다는 점이다. 또한 종류가 다양한 캐릭터 볼도 생산한다.
이렇듯 다양한 컬러와 디자인의 볼을 생산할 때 필요한 게 10가지 색을 찍을 수 있는 인쇄기다.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인쇄기에서 볼이 단계별로 이동할 때마다 문양과 색이 추가됐다. 마블 히어로나 디즈니 캐릭터 등의 볼이 이런 방식으로 생산된다. 컬러볼에 그림을 추가할 때는 원하는 색이 제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흰색으로 해당 부분을 밑칠한 뒤 그 위에 이미지를 추가하기도 한다. 신제품인 콘도르 프리즘 360 볼에 사용되는 필름도 볼 수 있었다. 볼을 360도 빙 둘러가며 문양을 넣을 때는 이처럼 필름을 이용하기도 한다고 했다.
인쇄 작업을 마친 볼에는 최종적으로 표면 보호를 위해 ‘톱 코팅’을 하게 된다. 뾰족한 삼발이 위에 볼이 놓이고 자동 이송장치에 의해 빙그르 회전하면서 지나갈 때 스프레이로 코팅액이 미세하게 분사됐다. 볼은 또 다른 이송 장치로 옮겨진 뒤 근적외선을 포함한 6단계 경화라인을 통과하면서 건조된다. 단계별로 온도와 시간이 정해져 있었는데 중간에 공정을 살펴보기 위해 작은 쪽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새어나왔다.
건조까지 마치고 쏟아져 나온 볼은 최종 검수 작업을 거치게 된다. 사출, 연마, 인쇄 등의 과정에서 작은 흠집이라도 발생한 게 있으면 매의 눈으로 골라내야 한다. 기자의 눈에는 모두 이상이 없는 볼이었다. 심지어 작업자들이 골라놓은 불합격 볼에서도 어떤 부분이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작업자가 한 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해준 뒤에야 아주 작은 결함이 보였다. 작업자에게 경력을 물었다. “23년째입니다.”
음성(글·사진)=김세영 서재원 기자 sygolf@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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