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미쪼꼬렛!” 한국전쟁 그 초콜릿, 이 남자가 만들었죠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4. 1. 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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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37][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32] 밀턴 허시

2023년 계묘년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연말연시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친구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선물을 주고받고 계실 텐데요. 케이크와 함께 초콜릿 판매와 소비가 크게 늘어나는 시기도 바로 이쯤입니다. 그래서 준비한 2023년 마지막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의 주인공 역시 달콤함의 대명사 초콜릿 브랜드로 선정했는데요. 미국을 대표하는 초콜릿 브랜드, 허쉬의 창업자 밀턴 허시입니다.

밀턴 허시
2주전 저희는 이탈리아의 초콜릿 제국 페레로 가문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이번엔 미국으로 건너가 보겠습니다. 밀턴 허시는 1857년 펜실베이니아주 데리 타운십에서 헨리 허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들 가족은 스위스와 독일계 혈통으로 기독교 내 온건파로 분류되는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이 공동체에서는 고등교육 대신 제한된 교육을 받은 뒤 사회로 나아가 일자리를 구하고 돈을 버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허쉬 로고
공동체 방침에 따라 1871년 14살의 나이에 학교를 그만둔 그는 독일어와 영어로 신문을 발행하는 지역 인쇄소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이후 그의 어머니 베로니카는 아들을 펜실베니아 주 랭스터에 있는 제과점 조셉 로이어에 견습생으로 보냈습니다. 허시는 이 곳에서 4년간 일을 배우며 제과제빵의 기본기를 쌓아 올렸습니다.

1876년, 20살이 된 허시는 자신의 제과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사업 아이템은 캔디였습니다. 허시는 그의 첫 가게를 필라델피아에 차렸지만 그냥 저냥 장사가 됐고, 1882년 사업을 접은 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또한 더 좋은 기회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도착한 덴버의 현지 제과점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곳에서 허시는 신선한 우유를 이용한 캐러멜 제조법을 습득했습니다. 바로 첫 번째 사업 아이템, 캐러멜입니다. 그는 뉴올리언스와 시카고를 거치며 레시피를 완성했고 그렇게 1883년 2번째 가게를 뉴욕에 차립니다. 하지만 뉴욕 맨하튼에서의 경쟁은 더 치열했고 재정문제에 직면하며 하는수 없이 두 번째 사업도 3년만에 접게 됩니다.

랭캐스터 캐러멜 컴퍼니
그렇게 두번의 실패를 겪은 허시는 결국 자신의 고향, 펜실베이니아로 돌아갑니다. 1886년, 허시는 처음 제과제빵을 배운 곳이자 자신의 부모님이 결혼식을 올렸던 펜실베이니아 랭캐스터로 돌아와 재기를 꿈꿉니다. 그간 쌓아 올린 캐러멜 제조기법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캐러멜 생산을 시작했고 회사 이름을 ‘랭캐스터 캐러멜 컴퍼니’로 짓습니다.

그의 세 번째 창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달콤한 캐러멜은 입소문을 타고 큰 인기를 얻었고 창업 5년만인 1891년 허시는 랭캐스터에 넓은 부지를 구입해 공장을 짓고 부동산을 매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890년대 초반, 허시는 두 개의 공장에서 무려 1300명에 달하는 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습니다. 하지만 허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랭캐스터 캐러멜 컴퍼니 공장에서 찍은 기념사진
항상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 사업거리를 찾아다녔던 그는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콜럼비아 박람회에 참석해 또다시 기회를 포착합니다. 박람회에서 만난 독일제 초콜릿 제조 기계와 한눈에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곧바로 해당 기계를 구입한 그는 곧바로 허시만의 초콜릿을 만들기 위한 연구개발에 돌입합니다. 시제품이 계속해서 나왔고 허시는 좀더 나은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허시는‘허시 초콜릿 컴퍼니’라는 자회사를 설립해 캐러멜 회사 아래 둡니다. 그렇게 그가 초콜릿에 눈을 뜬지 2년 후인 1895년, 허쉬 초콜릿이 처음 판매됐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이제 캐러멜 대신 초콜릿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초콜릿 역시 빠르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1900년, 허시의 첫 밀크 초콜릿 바가 판매되기 시작했고 , 허시는 캐러멜과 초콜릿 중 어디에 집중할지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의 선택은? 다름 아닌 초콜릿이었습니다. 1900년 8월, 허시는 랭캐스터 캐러멜 컴퍼니를 경쟁사 아메리칸 캐러멜 컴퍼니에 100만달러를 받고 매각했습니다. 조건은 초콜릿 제조 기계와 제조 권리는 그대로 지킨다는 것이었습니다.

허쉬 키세스
그만큼 초콜릿에 진심이었던 허시는 사업가로서의 자질도 훌륭했습니다. 캐러멜 사업 부문 매각 직후인 1901년, 허시 초콜릿 컴퍼니는 62만2000달러의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1907년 7월, 키세스라는 대표작이 탄생했습니다. 물방울 같은 귀여운 디자인으로 오랜기간 사랑받은 스테디셀러 초콜릿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어 1908년엔 아몬드 밀크 초콜릿 바를 출시하는 등 대중으로부터 사랑받은 대표제품도 초창기에 만들어냅니다.

매출이 받쳐주자 허시는 다양한 행사와 이벤트를 기획하며 마케팅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허시 동물원, 허시 온실 등을 만들었고 스포츠 경기와 대회 등에 스폰서로 등록해 인지도를 크게 높였습니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이름을 딴 허시 산업학교를 설립하는 등 자선재단 설립과 사회 공헌 활동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자본가들이 그러했듯, 그의 재산 대부분을 밀턴 허시 학교 재단에 내놓았습니다.

허쉬 밀크초콜릿바
원래도 잘나가던 허시에 변곡점이 된 것은 다름아닌 전쟁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중반 전세계가 전쟁의 포화 속에 갇혀있을 때 허시는 군납 초콜릿 제조사로 지정됩니다. 1937년 미군은 군용 비상식량에 초콜릿을 추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군은 군용 비상식량에 맞는 정확한 용량(4온스)과 고열량 초콜릿 제작을 요청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섭취할 수 있도록 상온에서 녹지 않아야한다는 조건과 더불어 마지막으로 너무 맛있지 않게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강조했습니다.

안 그래도 단 초콜릿이 너무 맛있으면 비상시가 아닌 아무때나 섭취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테스트 끝에 감자보다 조금 나은 딱딱한 초콜릿이 1939년부터 생산돼 군에 납품됩니다. 세계 2차세계 대전기간 동안 허시의 군납 초콜릿은 약 30억 개 가량 생산됐고 이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에서도 계속해서 허시의 초콜릿이 담겼습니다. 한국전쟁 당시를 묘사한 영화나 드라마 등지에서 보면 등장하는, 미군 트럭을 졸졸 따라다니던 코흘리개 아이들이 외치는 대사 ‘기브미더 쪼꼬렛’이 사실 허시의 초콜릿이었던 겁니다.

미군에 납품된 허쉬 초콜릿
카카오 비중이 높고 워낙 딱딱해 먹기도 어렵고 맛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나 처음 초콜릿을 접한 아이들에게는 이조차도 새로운 맛이었나 봅니다. 이후 국내에는 1984년부터 해태제과가 라이센스를 취득해 허시 초콜릿이 공식적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허시의 말년 역시 노조와의 갈등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항상 노동자들을 배려하는 경영자로 유명했습니다. 근로자에게 전기가 제공되고 온수가 항상 나오는 집을 제공했고 정리해고도 가능하면 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노조 설립만큼은 반대했던 허시는 노조와의 갈등으로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일을 겪었고 결국 그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 이후 회사에 노조가 설립됐지만 다행히도 직원들에 대한 여러 복지혜택은 그대로 유지됐고 허시는 노조 설립을 축하해주기도 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초콜릿 왕국을 설립한 허시는 1945년 10월 88세의 나이에 허시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밀턴 허시 학교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허시는 고아들이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재단을 설립해 전 재산을 이 곳에 기부합니다. 현재 미국 곳곳에 있는 허시 재단의 병원, 학교 등은 모두 그가 남긴 찬란한 유산입니다. 허시는 떠났지만 그가 가진 따듯한 마음씨는 추운 겨울 연말 연시를 따숩게 보낼 수 있는 초콜릿 선물로 여전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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