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81살에 제대로 빛을 본 화가 이건용 [김기자의 문화이야기]
안기부 조사받고는 10년간 고생…이건용에 세계가 뒤늦게 찬사 보내
"늘 실망 않고 기분 좋게 생각해요…지금도 8살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뉴욕의 사람들이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나를 쳐다보는 거예요. 감동 받았다는 거예요. 참 이상하다. 이게 1970년대에 한 행위이고 식어 빠진 행위인데…. 큰 오해다."
44년 만에 자신의 전설적인 퍼포먼스 '달팽이 걸음'을 현대 미술의 심장부인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선보인 이건용 화백이 지난해 11월 MBN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1979년 대전 남계화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인 뒤, 같은 해 제15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도 행한 작가의 대표 퍼포먼스를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관람한 이들은 이 작가에게 말 그대로 빠져 들었습니다.
만 81살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한없이 밝은 얼굴이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과 예술 세계를 놓지 않고 살아온 이건용 화백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국내 실험 미술의 거장이자 대가로서 한국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풍미한 이건용 화백이 본 세계 현대 미술의 흐름을 먼저 물어 보았습니다.
이 작가는 과거가 교조적이었다면 현재는 더 개방적이고 소통이 가능한 세계를 지향하는 것 같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렇지만 50여 년 전의 한국의 실험 미술을 세계가 이제 와서 주목을 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현실은 안타깝다고 밝혔습니다.
한류 열풍이 미술계에도 영향을 주면서 세계적인 아트 페어인 '프리즈'가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린 지난 2022년에 이건용 화백도 갤러리현대와 리안갤러리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갤러리인 페이스 갤러리의 전속 작가가 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고무판에 백묵으로 선을 긋고 발바닥으로 선을 지우고 흔적을 내면서 전진하는 달팽이 걸음. 50여 년 전도 지금도 똑같습니다. 그리는 동시에 지우는 행위로 회화의 가장 본질적인 현상을 보여주겠다는 일념을 갖고 이 화백이 50여 년 전 기획한 것입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최근 이 화백이 산업화 이후 인간이 자연과 우주를 모두 소외시키고 한 방향으로 개발에 집중해온 현상을 비판하는 의미를 더했다는 점입니다. 빠름보다 느림을 함께 생각할 줄 아는 '통합 세대'를 만들자는 뜻을 담았습니다.
마침내 지난해 하반기 세계적인 뉴욕 페이스갤러리와 구겐하임 미술관의 초청을 받은 전시에서 "여러분, 저는 생명의 느린 속도를 보여줄 것입니다"라고 말한 이 화백.
그의 예상과 달리, 관람객들이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단 한 명도 중도에 나가지 않고 그를 지켜보았고 일부는 감동을 받아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평론가와 큐레이터 등도 "어떻게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메시지를 주느냐"고 물었는데, 이 화백은 "모르셔서 그렇지, 저는 파리와 상파울루 등 세계적인 전시에 참여했고 이 방법을 실현해 왔습니다"라며 웃었다고 합니다.
이 화백은 "이미 50년 전에 나온 사람한테 '너는 어디에 숨어 있었니'라고 이야기한다면 말이 됩니까?"라며 인터뷰 도중에 당황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에구, 왜 이제 와서'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 구겐하임 전시도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구겐하임 측이 작가와 함께 기획하는 단계에서 나무 뿌리가 있는 지층을 떠온 듯한 작품은 전시장에 옮겨 오면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작은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구겐하임 큐레이터 10여 명이 뉴욕 페이스갤러리에서의 이 화백의 전시를 보고난 뒤에야 이 화백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됐고, 해당 전시를 구현하는 것은 물론 퍼포먼스를 하루에서 이틀로 연장하기로 한 것으로 MBN 취재 결과 밝혀졌습니다.
특유의 낙천성을 갖고 있는 이건용 화백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좌절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의 아방가르드 그룹을 표방한 'AG' 그룹에서 활동하는가 하면, 눈을 가리거나 팔의 가동 범위를 제한하는 등의 신체 드로잉 연작 등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대해 의문을 표했던 이 화백은 1970년대에는 안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미술을 탐구하면서 퍼포먼스를 했던 것이지만, 정권의 의심을 사면서 각목을 두 종아리에 끼우고 무릎 꿇은 채 허벅지를 구둣발로 험하게 짓밟히는 등의 고통을 겪었고 이후 무려 10년을 절뚝거리며 지내야 했습니다.
도화지에 선을 그릴 때에도 "왜 곧은 선을 긋느냐"고 따지는 감시를 겪었습니다. 당시 제도의 틀에서 벗어난 이들은 모두 '건전한 틀'을 파괴한다고 규정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화백은 이에 대해 "저는 하나도 실망을 안 했던 사람"이라며 "'내가 너무 앞서가니까 속도를 줄이려고 두드려 팬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에 두 자녀를 향해서도 "아빠가 맞고 들어온 것은 아빠가 너무 빨리 나가서 그런 거야"라며 "아빠의 작품이 대중에게 받아 들여지지 않고 팔리지 않는 것도 그러니까 꼭 참아야 해"라고 말했다고 이 화백은 담담하게 전했습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네 살이 된 아들이 길을 걸어가다가 돌을 발견하면 "아빠 작품"이라고 외쳤는데, 아이가 쓰지 않을 법한 '작품'이라는 단어를 들은 주변 사람들이 놀라곤 했다고 이 화백은 회상하며 잔잔한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이 화백은 대학생들조차 방문하지 않았던 당대의(1950년대~1960년대) 미국과 프랑스, 독일의 문화원을 찾아 다녔습니다. 당시 이 화백에게 직원들은 일제히 "형이랑 누나들이 와야 하는 곳인데 오지를 않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관심 영역인 미술과 철학을 깊숙하게 파고 들었던 이 화백에게 입시 공부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인이 된 뒤로도 철학과 신학 학회 자리에 목사인 아버지의 옷과 베레모를 빌려 쓰고 참석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습니다.
이 화백의 아버지는 간호사로서 일한 아내가 희망한 것처럼 이 화백이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이 화백이 "네, 아버지 말씀이 이해됩니다. 그렇지만 그때 가봐야 알지요. 제가 하고 싶을지"라고 찬찬히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혀를 내둘러야 했습니다.
손자와 손녀를 향해서도 이 화백은 "쓸데없는 입시 경쟁에 빠지지 말고 모두가 '자기 지향성'을 갖고 공부하고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애정 어린 조언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만 81살에 '커리어 정점'을 맞이한 이건용 화백은 지금도 새로운 일과 새로운 방식에 늘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지난 2022년 디지털 아트인 NFT '디지털 바디스케이프 76-3' 작품 1,976개 발매에 동참하기도 한 이 화백은 새로운 기술과 예술의 접목과 관련해 "어려서부터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보거나 새로운 방법으로 바라보는 일이 그에게는 부담스럽거나 짜내야 하는 부분이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열정적인 80대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몰입형 전시(~5월 31일, 서울 라이트룸)도 최근 관람한 이 화백은 "동시대에 살면서 꿈꿀 부분이 많다고 느낀다"며 "이런 좋은 물결에 참여시키면 풍덩 빠지고 싶다고 생각한다"며 소년처럼 눈을 반짝였습니다.
[ 김문영 기자 kim.moonyoung@mb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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