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욱의 한국술 탐방 | 쌀 소주 양조장 화심주조 오수민 대표] 구운 쌀 첨가로 피트 향 나는 쌀 소주…구수한 누룽지 맛이 일품
가장 흔한 위스키 재료는 보리다. 옥수수 같은 다른 곡물을 원료로 한 위스키도 있지만, 위스키의 본고장인 스코틀랜드의 스카치위스키는 보리로 만든다. 그냥 보리는 아니고, 싹을 틔운 보리, 맥아, 즉 몰트가 위스키의 주원료다. 우리말로는 엿기름이라고 하는데, 술 외에 식혜 만들 때도 엿기름, 맥아가 있어야 한다. 보리 싹을 틔우는 까닭은 술을 만들 때 필요한 전분을 보리에서 추출하기 위해서다. 이 전분이 당분으로 바뀌고, 다시 당분이 알코올로 바뀌는 과정이 곧 발효다. 거칠게 말하면, 맥아(물과 효모가 필요하다)를 발효하면 맥주가 되고, 맥주를 증류하면 위스키가 된다.
우리 술도 마찬가지다. 쌀(물론 물과 누룩이 필요하다)을 쪄서 발효하면 막걸리가 되고, 막걸리를 증류하면 소주(증류주)가 된다. 흔히 마시는 소주(희석식)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값싼 외국 농산물로 알코올 도수 95% 주정을 만들어 물을 많이 타고 감미료를 첨가해서 만든다.
그럼 보리에서 싹은 어떻게 틔울까. 보리를 물에 담근 뒤 며칠 동안 건조하는 과정이 보리의 싹을 틔우는 과정이다. 보리를 말릴 때 이탄(피트)을 연료로 사용하면, 스모키한 향이 맥아에 배어 증류한 후 위스키에 피트 향이 도드라지는 위스키가 된다. 이 피트 향을 ‘스모키한 탄내’라고 보통 얘기하는데, 일부 위스키 마니아는 피트 향 강한 싱글몰트 위스키를 ‘최고의 위스키’로 친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스모키한 향이 나는 쌀 소주를 만드는 양조장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다. 경기도 구리에 둥지를 튼 증류주 전문 양조장 화심주조. 2023년 8월에 양조를 시작했다고 하니, 정말 신생 양조장이다. 양조장 이름부터 불(화)이 들어가 있다. 이곳 소주 이름은 ‘화심 군쌀’이다. 쌀을 스모키하게 로스팅한 후 누룩이 아닌 위스키 효모를 이용해 발효한 뒤, 2회 증류해 소주를 만든다. 25%, 40% 두 가지가 있는데, 최근 ‘화심 군고구마 40’이 나왔다. 고구마를 오븐에 구운 뒤, 이를 분쇄해 역시 발효를 거쳐 군고구마 소주를 만들었다. 고구마 소주는 일부 업체에서 만들지만, 군고구마 소주는 처음인 듯하다.
바텐더 출신이 운영하는 양조장
흔히 쌀을 원료로 술을 만들 때, 쌀을 불리는 과정을 꼭 거친다. 쌀의 수분 함량을 늘리기 위해서다. 집에서 밥을 지을 때도 그러지 않는가. 쌀을 잘 씻은 뒤, 곧바로 열을 가하지 않고 30분 정도 불린 뒤 밥을 하면 밥알이 살아있듯이 탱글탱글해진다. 술 빚기도 마찬가지다. 쌀이 갖고 있는 수분 함량이 많아야 술 빚기에 좋은 고두밥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술을 만들겠다는 사람이 쌀을 더 불리기는커녕 쌀을 로스팅하다니? 쌀을 구우면, 쌀이 갖고 있는 수분이 날아가 알코올로 바뀌는 효율성(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런 발칙한 생각을 실천에 옮긴 이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군쌀 소주’를 만든 화심주조 오수민 대표는 스코틀랜드 아일라섬의 ‘3대 위스키’ 중 하나인 아드벡 증류소에서 1년간 근무한 바텐더 출신이다. 국내와 해외에서 바텐더 생활을 10년간 했다. 바텐더의 사전적 정의는 바(bar)에서 근무하며 술을 관리하고, 칵테일을 만들어 손님에게 직접 제공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바텐더는 기본적으로 수십, 수백 가지의 칵테일 맛과 레시피를 알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십, 수백 종류의 위스키, 진, 보드카, 데킬라, 브랜디 등 각종 주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고객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그래서 오수민 대표에게 바텐더를 통해 배운 게 무엇인지를 먼저 질문했다.
“처음 바텐더는 멋으로 시작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겉멋 뒤 깊은 술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고 방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10개를 공부하니 몰랐던 100개가 보이고, 100개를 공부하니 다시 몰랐던 1000개가 보였다. 영어 한마디 못 하는 상태에서 무작정 호주로 건너가 수련을 계속했고, 그렇게 하다 보니 스코틀랜드까지 가게 됐다. 세상을 도는 모험을 계속하며 배운 핵심은 무엇이든 하면 할 수 있고 해도 안 되면 될 때까지 해내면 된다는 자신감이다. 업적을 남기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으나 모험을 끝내고 뒤를 돌아보니 업적이 돼 있었다. 바텐더는 직업이 아니라 이렇게 모험하며 사는 삶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바를 떠나 양조장을 운영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바텐더라고 생각한다.
바텐더 업계에 내려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손님이 주문하는 걸, 잘 만들면 삼류 바텐더고, 손님이 주문하지 않아도 취향을 고려해 알아서 만들어주면 이류, 손님조차도 모르는 손님의 술 취향을 찾아주는 게 일류라고들 한다. 이제 나는 고객의 주문을 받아 술을 만드는 바텐더에서 세상에 없는 술을 만드는 양조인으로 변신하고 있다.”
쌀 소주 개발 아이디어 누룽지에서 얻어
오 대표는 누룽지로 스모키한 술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찾은 한국적인 스모키함은 누룽지다. 술 이름 화심도 여기서 나왔다. 스코틀랜드 아일라섬의 스모키함과 한국의 스모키함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이름을 찾다보니 ‘불 화(火)’에 ‘마음 심(心)’을 붙여 화심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바텐더 출신의 오 대표 작품인 화심 군쌀은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군쌀은 구운 쌀의 줄임말로, 술 원료로 쓰는 쌀 일부를 정말 굽는다. 대부분은 굽지 않은 쌀을 쓴다. 구운 쌀은 술에 들어가는 쌀 중 5분의 1 정도다.
“연구개발 단계에서는 커피 로스팅 기계를 이용해 쌀을 볶기도 했다. 그런데 로스팅기보다는 오븐에 구웠을 때 술맛이 더 낫다고 판단해, 지금은 오븐에서 쌀을 굽는다. 200도 정도에서 1시간 30분 정도 굽는다. 화심 군쌀에 들어가는 쌀 전부를 굽는 것은 아니고, 5분의 1 정도만 굽는다. 스모키향을 내기 위해 5분의 1 정도의 쌀을 굽고, 알코올 발효를 잘하기 위해 나머지는 굽지 않은 일반 쌀을 쓴다. 생쌀과 구운 쌀을 섞어 고두밥을 찌지 않고, 분쇄한 뒤 생쌀 발효를 한다. 생쌀 발효하는 이유는 곡물 본연의 향이 더 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발효 시간도 위스키 발효와 마찬가지로 짧다. 72시간 정도 발효한다.”
화심주조는 누룩을 발효제로 쓰지 않는다. 당화 발효(전분을 당분으로 바꾸는 것)제로는 정제 효소를 쓰고, 알코올 발효(당분을 알코올로 바꾸는 것)제는 위스키 효모를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쌀 소주에는 전통 누룩이나 개량 누룩을 쓰지만, 화심주조에는 위스키 스타일의 술을 만들기 위해 위스키 효모를 사용한다. 증류는 2회 한다. 1차 증류하면 알코올 도수가 25도, 2차 증류 때는 65도 정도의 술이 나온다. 증류 원액은 약간의 안정화 기간을 거쳐 곧바로 병입한다. 6개월 기본 숙성 같은 절차는 이곳 화심주조에서는 하지 않는다.
오수민 대표는 “숙성을 거의 하지 않은 제품이 스모키한 향이 더 나기 때문에 가급적 숙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장기 숙성을 포기한 건 아니다. 점차 오크통 구입량을 확대해, 오크통 숙성 제품을 늘려나갈 작정이다.
스모키한 향을 제대로 느끼려면 화심 25도보다는 40도 제품이 제격이다. 은은한 단맛과 구수한 누룽지 향이 매력적이다. 어릴 적 입으로 호호 불며 뜨거운 누룽지를 식혀가며 먹던 추억을 떠올리는 맛이라고 할까. 음식이든 술이든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먹거리에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군고구마 소주는 오븐에 고구마를 구워 껍질과 꽁다리를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구마를 으깨서 발효한다. 군고구마 소주에는 정말 군고구마 맛이 난다. “액체로 된 군고구마 자체를 마시는 느낌”이라는 평도 있다고 한다. 오 대표는 “라벤더 같은 보라색 꽃향기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생고구마 자체가 보라색 아닌가.
마지막으로 ‘나중에 화심주조가 반석 위에 오르면 뭘 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10년쯤 지나면 회사가 어느 정도 안정화 단계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가 오면 내가 스코틀랜드에서 일했던 아일라섬에 다시 가서, ‘라이스 위스키 증류소’를 만들고 싶다. 스코틀랜드 맥아 위스키를 만드는 아일라섬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모키한 위스키를 한국 쌀로 만들고 싶다.”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