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영의 세상만사 <14>] 탈세계화 속 베트남의 기회와 리스크
세계화 흐름이 약화하면서 탈세계화,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 같은 단어가 어느 순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세계화 시대의 경제는 최적의 생산 조건을 갖춘 곳을 찾아 물건을 생산하고, 그렇게 생산된 물건을 다시 지구 전역에 운송해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은 중국이었으며, 많은 기업은 중국에 대규모 생산 설비를 갖추기 위한 투자를 통해 큰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중국 역시 해외 기업들의 투자를 통해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기업들의 수요를 반영한 공급망이 자연스럽게 형성됐고, 일단 형성된 공급망은 더 많은 기업과 투자가 집중되도록 만들었다.
영원할 것 같던 이런 흐름은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무역 불균형을 둘러싸고 시작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점차 중국에 집중된 공급망 자체를 중국으로부터 이탈시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인한 지속적인 인건비 상승 및 산업구조 변화로 인해 많은 해외투자 기업이 다른 나라로의 이전을 검토하던 상황에서 공급망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많은 기업에 당장은 아니지만 중국 이외의 다른 생산 거점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이에 따라 북미에서는 멕시코가 새로운 생산 거점으로 부상했다. 멕시코는 중국의 60%에 불과한 인건비 그리고 미국 시장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라는 장점을 통해 많은 해외투자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의 여러 국가 역시 공급망 변화의 흐름 속에서 경제 발전을 위한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경쟁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국가는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1억 명에 달하는 인구와 더불어 경제활동인구가 전체 인구의 69.3%에 달하는 인구구조, 과거에 비해 많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월 350달러(약 45만원) 수준에 불과한 낮은 임금 수준 등의 장점을 활용하면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양호한 학습 능력에 기반한 인력 수준, 사회 보편적인 근면·성실함 등이 결합하면서 베트남이 중국을 대체할 생산 거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많은 기업으로 하여금 베트남으로 향하게 했다.
베트남의 경제성장 수준은 과거에 비해서는 낮아졌지만, 연평균 5% 수준을 지속하고 있다. 중산층의 확대는 소비 수준 향상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에 기반한 새로운 산업의 등장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베트남을 방문하는 많은 이는 우리나라의 1990년대 초반과 비슷한 역동성을 느끼면서 베트남의 미래는 당연히 밝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9000개가 넘는 우리나라의 기업이 베트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 역시 이런 판단에 따른 것이다.
베트남의 ‘대나무 외교’
베트남의 성장은 미국과 중국에도 전략적인 측면에서 관계를 격상시키도록 하고 있다. 2023년 한 해에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모두 베트남을 방문했다는 점은 양국 모두 베트남을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의 경우 베트남과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켰으며, 베트남이 중국에 집중된 공급망 가운데 전자 및 반도체 분야의 대체자로서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베트남의 관련 산업 인력 육성을 위한 다양한 지원 방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최근 주요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싼 갈등을 겪고 있는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급속한 관계 개선 및 접근을 견제하기 위해 시진핑 국가주석이 방문해 양국 관계를 기존의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서 한 단계 더 높은 운명 공동체로 격상시키고자 했다. 중국은 우리나라와 싱가포르를 제치고 베트남에 대한 최대 외국인 투자국으로 부상했으며, 다양한 분야에 대한 투자를 통해 베트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이와 같은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실용적인 외교 노선을 걷고 있다. ‘대나무 외교’라고 불리는 베트남의 외교 전략은 탄력성과 적응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국익의 틀 안에서 현실적 관점에 기반한 실용적 접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베트남 자국의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 모두의 친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지만 동시에 독립과 자립성을 지키기 위해 관계 다각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미국의 항공모함 전단의 기항을 허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과 중국, 양국 공산당 관계자들의 방문을 통한 우호 관계 과시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베트남의 경제 상황을 걱정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점과 고민이 많다. 단적으로 베트남의 생산성은 중국 이외에 태국, 인도네시아 등 주변 국가에 비해 낮다. 2022년 베트남 정부가 설정한 15개 경제 목표 가운데 유일하게 노동생산성만 목표 달성에 실패하기도 했다. 대규모 외국인직접투자(FDI)에 의해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지만 이에 상응하는 베트남 기업의 성장은 늦어지고 있다. 베트남 내부의 산업 생태계 형성이 지연되면서 핵심 장비나 부품은 여전히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인프라 투자의 지연은 경제성장의 지속은 물론 고도화된 산업으로의 전환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고속도로 및 철도의 확장 등은 2000년대 초반부터 논의됐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고질적인 부패도 베트남의 미래에 대한 회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각종 인허가 단계에서의 뇌물 관행은 여전하고, 수백억달러 규모의 은행 횡령 사건 등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인력 유출 가속화…베트남의 리스크
베트남의 가장 큰 장점인 인적자원의 미래 역시 밝지 않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속적인 출산율 저하에 따라 2030년이 되면 베트남 역시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인력 부족으로 인해 외부에서 인력을 도입하는 국가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한국, 일본, 대만 등의 인력 부족 심화는 베트남 인력의 유출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산업구조 전환과 고도화에 필요한 인력들이 지속적으로 해외로 빠져나감에 따라 베트남 정부가 추진하는 고부가가치 및 첨단산업 분야의 성장이 어렵게 됐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유엔인구기금(UNFPA)에 따르면 14세 미만 인구가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하고 65세 이상의 고령 인구는 전체 인구의 15% 수준을 유지하는 시기를 경제 발전에 가장 유리한 황금기로 분류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이 시기에 10배 이상의 경제성장에 성공하면서 선진국으로 도약했지만, 태국의 경우 3배 성장에 그치면서 동시에 급속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어 중진국의 덫에 걸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구 황금기를 거치고 있는 베트남이 어떤 경로를 걸을 것인지에 따라 미래는 크게 변화할 것이다.
동남아 지역은 탈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지역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베트남은 그 가운데 선두 주자로 꼽힌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기회만큼 내부적으로는 여러 가지 위험 요소가 자리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베트남이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면서 도약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보다 냉정한 시각과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의 활력, 끝없이 올라가는 고층 건물의 외형 뒤편에 내재해 있는 불안 요소들을 동시에 파악해야만 베트남의 미래를 보다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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