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사이언스카페 | 커피 맛의 과학] “최고 커피 공식은? 원두 갈 때 물 몇 방울”
비싼 원두를 샀는데 커피 맛이 별로다. 무슨 문제가 있을까. 바리스타가 된 과학자들이 완벽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만드는 공식을 찾았다. 미국 오리건대 화학과의 크리스토퍼 헨돈 교수 연구진은 2023년 12월 6일 국제 학술지 ‘매터(Matter)’에 “원두에 물을 조금 뿌리고 갈면 정전기가 줄면서 풍미가 더 좋은 에스프레소를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정전기 감소로 커피 낭비 줄여
커피는 씨앗인 생두를 볶은 원두로 만든다. 에스프레소는 곱게 간 원두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추출한 커피다. 커피 전문점에서 흔히 보는 기계가 바로 고온·고압 환경에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내리는 장치다. 집에서 커피 가루를 거름종이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
헨돈 교수는 실험실에 에스프레소 커피 추출기를 두고 커피 맛의 비밀을 추적했다. 그 결과, 같은 원두와 장비에도 커피 맛이 다른 것은 정전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원두를 갈면 입자들이 마찰하면서 정전기가 발생한다. 입자들이 전기를 띠는 것이다.
입자들은 (-)전기, (+)전기에 따라 서로 밀거나 달라붙는다. 자석이 같은 극이면 밀어내고, 다른 극이면 달라붙는 것과 같다. 원두를 가는 영상을 보면 가루가 사방으로 튀고 밑으로 떨어지는 커피는 뭉치는 것을 볼 수 있다. 헨돈 교수는 “볶은 커피 내부의 수분이나 분쇄 중에 추가된 외부 수분이 원두를 갈 때 생기는 전기의 양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생두는 오래 볶아 색이 짙을수록 수분이 적다. 연구진은 원두 색이 짙을수록 분쇄 과정에서 정전기가 많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반면 생두를 볶는 시간이 짧아 색이 옅은 원두는 수분이 더 많아 갈아도 정전기가 덜 생겼다.
같은 원리로 짙은 색을 띠는 원두라도 갈기 전에 물을 추가하면 역시 정전기가 줄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물의 양은 원두 1g당 20㎕(마이크로리터, 1㎕는 100만분의 1L)면 충분하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이는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을 만들 원두에 작은 분무기로 두세 번 물을 뿌리는 정도와 같은 양이다.
커피 맛 높이고 비용도 절감
원두를 갈 때 정전기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커피 업계에 오래전부터 알려졌다. 하지만 정전기가 커피 추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헨돈 교수는 원두를 갈 때 발생하는 정전기를 연구하기 위해 같은 대학 지구과학과의 화산(火山)학자인 조수아 멘데스 하퍼 교수와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
하퍼 교수는 “화산이 폭발하는 동안 마그마는 수많은 작은 입자로 분해돼 밖으로 나온다”며 “이 과정에서 입자들이 서로 마찰하면서 번개를 일으킬 정도로 전기가 충전된다”고 말했다. 그는 원두를 갈아서 고운 가루로 만드는 과정은 마그마 분출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정전기는 커피의 원산지나 가공 방법과는 별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반면 원두의 색상이나 입자 크기, 수분과는 연관성이 있었다. 커피의 내부 수분 함량이 많을수록, 커피 입자를 굵게 갈수록 정전기가 덜 발생했다.
연구진은 물을 넣고 갈면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는 방식이 달라지는지 시험했다. 그 결과, 물을 추가하고 갈면 커피 추출 시간이 더 길어지고 더 진해지는 것을 발견했다. 원두를 갈 때 정전기를 줄이면 커피 가루가 균일해져 밀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 물을 넣고 갈면 커피를 내릴 때마다 맛이 비슷해졌다. 커피 맛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번 연구 결과는 경제적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의 커피 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5%인 3432억달러(약 453조240억원)에 이른다. 헨돈 교수는 “동일한 건조 커피에서 농도를 10~15% 높이는 것은 비용 절감과 품질 향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앞서 헨돈 교수는 2020년에 ‘매터’에 발표한 논문에서 과학적 에스프레소 추출법을 이용하면 미국 커피 시장에서만 연간 총 11억달러(약 1조4520억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하퍼 교수는 커피 연구가 재난 대응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커피 가루가 물과 반응하는 형태를 통해 자연에서 입자와 물의 상호작용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퍼 교수는 “원두가 어떻게 부서지고 물과 상호작용하는지 알아내면 산사태나 화산 폭발 또는 토양 침수 같은 지구물리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으로 생두부터 성분 알아내
미국 오리건대 연구진은 어떤 원두가 커피 맛을 좌우하는지 밝혀냈다. 콜롬비아에서는 바로 수확한 생두 단계부터 커피 맛을 예측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콜롬비아의 스타트업인 데메트리아(Demetria)는 가공하지 않은 커피콩인 생두가 나중에 어떤 맛과 향의 커피를 만들지 예측하는 AI 기술을 개발했다.
이 회사는 먼저 볶지 않은 생두에 근적외선을 쏘고 반사파를 분석해 어떤 유기 분자가 있는지 알아냈다. 커피에 들어있는 유기 분자마다 적외선에 반응하는 형태가 다르다. 이를 근거로 유기 분자 종류를 알 수 있다. 제임스 웨브 우주망원경이 적외선 카메라로 외계 행성의 대기 성분을 알아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앞서 AI는 전문가들이 평가한 커피 향과 맛이 어떤 유기 분자와 연관돼 있는지 파악했다. 커피 전문가들의 입맛을 학습한 셈이다. AI는 이를 토대로 근적외선 반사 결과를 해독해 생두가 나중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 예측했다.
데메트리아는 이제 재배 단계부터 원하는 품질의 커피인지 파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 소비자가 원산지와 품종을 보고 와인을 고르듯 커피도 자신의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여러 식음료 업체가 더 좋은 맛을 내기 위해 AI를 활용하고 있다. 앞서 2018년 덴마크의 맥주 회사인 칼스버그는 AI로 맥주에 들어가는 효모와 다른 재료가 나중에 어떤 맛을 낼지 예측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IBM은 미국 향신료 회사 맥코믹을 위한 AI를 개발했다.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