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파워 인터뷰 | ‘포용성을 위한 남성 연대’ 공동 창립자 개리 포드 전 JP모건체이스 글로벌 디렉터] “남녀 누구나 ‘우연한 성차별주의자’ 될 수 있다… 포용적인 리더 중요”
미팅에서 발언권을 빼앗길 때, 상사나 동료에게 부적절한 언행을 당할 때, 커리어 확장의 기회를 박탈당했을 때, 당신 편을 들어준 직장 동료를 둔 적이 있는가?
여기, 그런 사람이 있다. 대표적인 남성 표준 직장인 금융 기술 기업에서 일하다, 어느 날 “왜 내 주위에 나만 남자지?”라는 의문을 품고, 직장 내 성평등을 위해 뛰어든 사람. 현재 아마존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직장 내 포용성을 위한 핸드북 ‘우연한 성차별주의자(The Accidental Sexist)’의 공동 저자이자 ‘포용성을 위한 남성 연대(Men for inclusion)’의 창립자인 개리 포드다.
개리 포드는 JP모건체이스의 글로벌 기술 디렉터로 일하던 어느 날, 주변 50명의 직원 중 ‘나 홀로 백인 남성’인 걸 자각한 후 기술업계의 ‘성비 불균형’을 파헤쳤다. 나름 공감 능력이 풍부하다고 자부했으나, 막상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해 보니 여성의 커리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많았다고 한다.
중요한 건 성차별이 악의적이거나 고의적이 아니었다는 것. 우리가 처음부터 인간의 표준을 남성으로 정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일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상황을 기준으로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남성은 여성의 현실을, 여성은 남성의 현실을 잘 모른다. 이후, 그는 여성의 커리어를 돕고 남성의 대화 참여를 주도하는 ‘남성 연대’ 활동을 시작했고, 영국, 미국 아시아 전역의 기술 생태계에 이 선한 불씨는 들불처럼 번져갔다. 포용성이 높은 조직일수록 이직률이 낮으며, 병가를 적게 내고 지속 가능한 높은 성과를 냈다. 2023년 11월의 포근한 어느 날, 유엔여성기구 성평등센터에서 개최한 제1회 서울 성평등 담화에 참가하기 위해 장녀 이사벨라와 함께 내한한 개리 포드를 만났다. “지금 비즈니스 업계에서 성평등은 매우 중요한 이슈다. 직장에서 약점을 털어놓아도 안전하다는 것, 과하게 터프 가이인 척할 필요가 없다는 것, 이 모든 과정의 핵심에 ‘포용적인 리더’가 있다”라고 그는 ‘리더의 역할’을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최근 여성 경제학자 클라우디아 골딘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골딘 교수는 120년간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성별 소득 격차의 주요 원인을 ‘탐욕적인 일자리’로 지목했다. 기업이 그동안 ‘시간을 올인하는 자리’에 막대한 급여를 지급하는 보상 체계를 유지해 왔기에, 가계 구조상 여성은 육아와 돌봄을, 남성은 탐욕적인 일자리를 담당하게 됐다는 거다. 성별 소득 격차와 가정 내 불평등의 범인으로 ‘탐욕적인 일자리’가 지목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일하는 문화가 점차 바뀔 거다. 데이터를 보면 다행히 한발씩 전진하고 있다. 앞으로 금융 분야의 ‘탐욕스러운 일자리’에 큰 변화가 있을 거로 보인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는 ‘유연한 일자리’와 남성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해법으로 내놨다. 남녀 모두 탐욕스러운 일자리의 희생양으로 보고, ‘서로를 대체할 수 있는 유연한 팀’으로 일하라는 거다. 전문성 있는 일조차 대체 가능한 파트너 구조로 만들면 서로의 비움을 채울 수 있다는 얘긴데, 그동안 ‘대체 불가능한 인력’을 최고의 성취로 인정했던 상식이 바뀔 수 있을까.
“일자리 문화는 기업 혼자서는 안 된다. 인사 시스템, 정부의 보조, 지역사회가 함께 논의해야 한다. 삶에서 중요한 게 뭔지, 개인들은 무엇을 추구하는지⋯ 보상과 급여 체계에 그 변화를 반영해야 한다.”
현장에서 그 변화의 조짐을 보았나.
“일단 보상 체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단순히 수치적 목표 달성만 측정하지 않고 다양성과 포용성 지표를 성과 체계 안에 넣는 식이다. 앞선 기업들은 역차별 문제를 고려해서 다양성보다 일단 포용성 부문에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동료, 상사, 후배 등이 서로 포용성 리스트에 따라 점수를 매기도록 360도로 평가해서 그 점수를 공개한다든가, ‘무엇을 달성했나’보다 ‘어떻게 달성했나’를 세밀하게 평가하는 거다.”
추측컨대 당신도 현업에서는 장시간 근무해서 고위직에 오르지 않았을까.
“맞다. 그래서 나는 썩 좋은 롤모델이 아니다(웃음). 금융 분야뿐 아니라 학계, 법조계, 언론계도 다 마찬가지 아닌가. 경쟁이 치열하고 더 일할수록 계약도 따고 특종도 하고, 그걸 영광의 상징처럼 여기니 당장 바꾸자고 하면 저항도 있을 거다. 그런 구조는 여성이 대표성이 낮은 것과 상관관계가 있다. 탐욕적인 일자리가 유지되기 위해 여성이 돌봄을 담당하고, 가사와 육아 노동은 무급으로 처리돼 왔으니까. 그래서 실험이 필요하다. 남녀가 돌봄 노동을 50대 50으로 했을 때, 장시간 노동에 대한 입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말이다. 내가 일한 기술 분야는 8시간 이상 일하면 퀄리티가 떨어진다. 그걸 알고도 여전히 오랜 시간 일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가 바뀌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다. 최근 영국의 한 기업에서 실험을 해보니 주 4일 근무와 5일 근무의 효율이 같았다는 뉴스도 있다. 지금 주목하는 변화는 금융계와 학계가 점점 더 개인보다 팀에 보상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는 거다.”
팀으로 보상하는 것이 ‘탐욕적인 일자리’ 개선에 효과가 있나.
“물론! 포용성이 뛰어난 팀은 내가 옆 사람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용적인 리더 아래 서로 격려하고 돕는 문화가 발생한다. 하지만 여러 장벽이 있다. ‘일이 취미일 정도로 좋다’고 하는 사람에게 일하는 시간을 줄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은행권은 2009년 이후로 수익이 떨어진 적이 없어서, 기존의 성공을 지탱했다고 믿은 장시간 노동 신념을 리더들이 바꿀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리더가 중요한가.
“중요하다. 좋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모델이다. 가령 나도 오후 6시가 넘으면 이메일을 보내지 않는다. 모아놓았다가 다음 날 아침 근무 시간이 되면 한꺼번에 보낸다. 직원들이 근무 시간 외에 답할 의무가 없으니까. 휴가 갈 때도 ‘2주 동안 이메일에 답하지 않겠다’고 미리 말한다. 휴가 기간에 계속 확인하는 것 자체가 직원들을 못 믿는다는 시그널이잖나.”
여성 리더들은 어떤가.
“JP모건에 있을 때 유능한 최고재무담당임원(CFO)이었던 메리안은 출산 후 일주일에 3~4번 아이를 보러 오후 4시쯤 일찍 퇴근했다. 처음엔 몰래 나가더라. 그런데 ‘그런 모습은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게 좋다’는 조언을 들은 후엔 일부러 모두가 보도록 ‘육아 하러 일찍 갑니다!’ 큰 소리로 인사하고 나갔다. 그런 모습이 불씨가 돼서 문화를 바꾼다. 엘리트들이 더 나서서 육아휴직을 쓰고 유연 근무를 하면, 그 모습이 더 쿨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당신은 JP모건에서 금융 기술 서비스 분야의 고위 관리자로 일하면서 여성의 숫자가 현저하게 적은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했다. 그 고민을 JP모건의 최고경영자(CEO)와 공유하며 왜 여성들이 기술 분야의 커리어를 이어갈 수 없는지 탐구했고, 현장의 여성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우연한 성차별’을 알아차렸고, ‘포용성을 위한 남성 연대’ 링크드인 회사까지 설립했다. 나는 글로벌 대기업 임원인 백인 남성이 이런 식으로 커리어를 전환했다는 게 놀랍다. 편견 없는 가정에서 성장했나.
“좋은 질문이다. 나는 워킹맘 가정에서 성장했다. 부모님이 내가 아홉 살에 이혼했기 때문에 한 부모 가정의 외동으로 성장하면서, 어머니는 나의 롤모델이었다. 어머니는 성실하게 성공했고, 내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내가 속한 집안도 동네도 부유하지 않아서, 나는 가족 구성원 중 최초로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자 중 최초의 대학 입학생 세 명 중 한 명이기도 했고. 공정한 경쟁, 공정한 기회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이런 배경 덕이다. 돌아보면 나는 운 좋게 기술 분야에 발을 디뎠다. 기술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논리와 숫자를 기반으로 해서 좋았다. 그 뒤 JP모건에서 경영진으로 수백 명의 구성원을 이끌게 되면서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개인보다 팀이 좋은 성과를 내는 걸 돕는 걸 좋아했다. 포용성은 팀이 좋은 성과를 내는 데 매우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관찰해보니 여성의 난관 중 어떤 점이 특히 눈에 들어오던가.
“여성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도 ‘내가 자격이 있나’를 의심한다. 가면증후군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공정 본능’이 자극됐다.”
당신이 공저자로 참여한 핸드북 ‘우연한 성차별주의자(The Accidental Sexist)’는 아마존 베스트셀러가 됐다. 우리가 모르는 대표적인 우연한 성차별엔 어떤 것이 있나.
“가령 우리는 여성이 성실하고 세부적인 관리에 강점이 있다고 보고 행정 업무 등 다소 덜 중요한 것을 맡긴다. 이에 비해 남성은 리더십과 성공 야망을 높이 평가받는다. 남성은 잠재력에 따라 승진할 가능성이 크지만, 여성은 과거의 성공에 따라 더 높은 기준을 채워야만 승진하게 된다. JP모건에서도 여성 엔지니어가 핵심 개발에서 벗어나 관리를 요청받는 것을 종종 보곤 했다. 이런 걸 안다면 리더가 행정 업무의 경우 순차적으로 배분한다든가, 해결책을 논의할 수 있다.”
역차별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나.
“연구에 따르면 긍정적인 차별에 둘러싸여 있다고 믿는 남성, 자신이 가장 피해를 보는 집단이라고 믿는 남성이 20%가량 된다. 직장 내 현실 데이터(성별 임금 격차 등)를 보면 사실이 아니다. 여러 번 말하지만 평등이 한쪽 성이 아니라 남녀 모두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걸 알리는 게 우선이다.”
주변 남성들이 당신을 고깝게 보지는 않나.
“성평등, 포용성이 팀의 성과에 더 도움이 된다는 증거가 차고 넘치는데, 남들이 뭐라든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웃음)? 이 일의 출발은 이타주의가 아니라 이기주의다. 우리 모두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길 원하지 않나. 나는 순전히 나를 위해 이 일을 한다.”
‘극한 배려 사회’가 도래했고, 앞으로는 배려를 선점하는 게 경영에 ‘유리하다’는 걸 기업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더라.
“맞다. 어떻게든 변화를 촉발하고 싶다. 여성들은 동성끼리는 힘든 점을 나누지만, 남성들과는 잘 공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워크숍이 중요하다. 동료들과 이 문제를 꺼내 터놓고 이야기해야 한다.”
‘너는 누구 편이냐?’라는 질문을 받았나.
“종종 받는다. ‘남성들이 더 손해’라고 화내는 이도 있다. 그럴 땐 먼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최대한 이야기를 귀담아듣는다. 현장의 얘기를 들어보면 교육 분야라든가 몇몇 부분은 실제로 남성이 뒤처져 있기도 하다. 계속 남성의 목소리를 듣고 취합해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고 싶다. 이 일은 하나의 성을 위한 게 아니라 모두를 위한 거니까.”
성평등을 옳고 그름으로 갈라치기 하지 않고, ‘경청’과 ‘경쟁력’으로 접근하니 희망이 보였다.
안타깝지만 한국은 요즘 젠더 이슈가 좌우 갈등으로 불거지면서 매사 조심하려는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나는 기업에 일단 파일럿 워크숍을 가져보도록 조언한다. 그동안 절반 정도는 남녀가 함께, 절반 정도는 남성만으로 구성된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만족도가 높았다. 임원들, 최고 경영진들도 함께 참가한다. 결코 일방적인 트레이닝이나 교육이 아니다. 자발적이고 진솔한 대화라는 게 핵심이다.”
어떤 남성이 호의적인가.
“눈치 보지 않고 쿨하게 자기 라이프를 찾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예컨대 좀 더 유연한 스케줄로 일하는 사람, 육아휴직을 완전히 사용한 사람, 강한 페어플레이 감각을 보이는 남성들이 있다. 여성 멘토가 있었던 남성도 성별 편견 경험에 대한 지식이 훨씬 더 많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함께 해법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한가.
“그렇다. 문제 해결의 욕망을 일으켜야 한다. 아무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수십 년 동안 성평등 문제에 접근해도 개선되지 않는 것은 남성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압박감을 느끼지 않도록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명령해서도, 가르쳐서도 안 된다. ‘이런 문제가 있으니, 아이디어를 내달라’고 해라. 모든 사람은 문제 해결을 좋아한다. 집단 지성으로 같이 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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