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도의 음악기행 <78> 로랑 드렐랭쿠르의 ‘소네트’] 17세기 젊은 세대가 선호했던 ‘숏폼’ 콘텐츠, 14행의 짧은 시
한때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이는 ‘나 때는 말이야’를 풍자하는 표현으로서 기성세대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말하는 것이라 한다. 한 웹사이트 포털에 ‘라떼’를 검색하니 연관 검색어에 ‘꼰대’라는 단어가 자동적으로 함께 등장한다. 이 또한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며 권위적인 표현으로 남을 가르치는 이’라는 뜻이다.
필자가 2022년 대학에 부임할 때 가장 다짐했던 것 중의 하나가 ‘나 때는 말이야’ 그리고 ‘요즘 애들은 말이야’의 첫 글자도 입에 올리지 말자는 것이었다. 동등한 눈높이에서 학생들과 함께 학문과 음악을 탐구하고 토론하고자 하는 바람에 혹여라도 권위적인 모습으로 사고의 자유를 억압하지는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의를 하는 동안 그리고 학생들과 대화하며 필자 학창 시절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할 때, 무의식적으로 “저 때는 말이죠” “예전에는 말이죠”라고 말하는 나 자신을 인지하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의 경험을 전해줌으로써 그들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려는 의도였지만, 이런 표현이 워낙 현재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느낌이 들어, 내 본래의 의도를 퇴색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보통 이런 경우 말끝을 흐리곤 했다.
물론 필자의 경험을 빌려 학생들의 입장에 공감하는 것과 필자의 경험을 일반화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오만은 실타래 위를 널뛰기하듯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인생 경험이 많은 이들이 앞으로 험한 인생을 헤쳐 나갈 어린 세대에게 한마디라도 더 해주고 싶은 진심 어린 마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런 표현은 2024년 새해를 맞은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 시대의 유명한 고전 ‘일리아스’에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나약하다”라고 언급한 구절이 종종 등장하고, 고대 로마 시대 때 키케로가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 때보다 분별력이 떨어진다”고 한 구절 역시 찾아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 ‘숙종’ 편에 요즘 선비들이 학문을 대하는 것과 품행이 예전만 못하단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것을 비춰 볼 때, 이런 기성세대의 우려는 시대와 나라를 가리지 않고 늘 등장한다.
필자는 최근에 음악 자료를 리서치하다 이와 비슷한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로랑 드렐랭쿠르(Laurent Drelincourt)라는 17세기 프랑스의 성직자이자 문학가가 자신이 새로 출간한 시집을 두고 말한 내용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집중을 오래 하지 못하고, 길이가 긴 작품을 소화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1670년대 세대의 취향에 맞게 짧은 길이의 작품을 창작했다.” 무려 350년 전에도 젊은 세대의 집중력을 걱정하는 이가 있었다니 고대 로마 시대나 17세기의 고전 시대나 지금 현대나 사람 사는 모습은 여전히 똑같은 것 같다.
그가 창작한 작품은 ‘소네트’라는 시다. 소네트는 ‘울리다’ ‘노래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sonare(소나레)에서 기원을 찾는 단어로서 ‘노래하는 작은 시’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소네트는 14행의 시가 4행과 3행 단위로 묶여 구성된 짧은 시다. 또한 각 행에 총 10개 혹은 11개의 모음으로 구성된 낱말이 배열돼 있기에 읽다 보면 노래한다는 소네트의 어원이 이해될 정도로 선율적인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리고 각 행 마지막 압운을 반복적으로 배치해 이는 시 전체에 운율의 통일성을 부여한다.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소네트 형식의 시가 시작이 됐다고 하며, 이후 전 유럽에 퍼져 이탈리아에는 페트라르카, 프랑스에는 라신, 영국에는 셰익스피어, 독일에는 괴테 같은 이들이 걸출한 작품을 써 내려갔다. 소네트의 주된 테마로는 남녀 간의 사랑을 담은 연가를 꼽을 수 있다. 물론 의미를 곱씹으며 읽어 내려간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14행의 짧은 시를 읽는 것은 사실 채 1분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소네트가 유럽에서 대단히 유행했다니, 당시 중요하게 여겨졌던 성서, 수사학, 고대 문헌 등 벽돌만큼 두꺼운 책들을 멀리하고 앞서 드렐랭쿠르가 언급한 것처럼 이런 짧은 연애 시를 즐겨 읽는 젊은 세대를 걱정하는 이가 있다는 것도 적당히 이해될 법하다. 이런 감성적이고 운율이 아름다운 시는 멜로디와 함께 음악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았다. 가곡의 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는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가 쓴 소네트를 독일의 시인 슐레겔이 번역한 텍스트를 기반으로 걸출한 가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이후 헝가리 태생의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도 역시 페트라르카의 소네트로 아름다우면서도 화려한 가곡을 작곡했다.
현재 각종 매체에서 ‘요즘 사람들이’ 문화 콘텐츠를 소비하는 경향을 두고 예전과 다르게 콘텐츠 길이가 너무도 짧아졌다는 우려의 기사를 자주 접한다. 책보다는 전자 기기의 영상을 통해 그리고 영상 길이도 점점 짧아져 현재는 소셜미디어(SNS)에서 제공하는 릴스, 쇼츠 같은 약 1분 길이의 ‘숏폼(짧은 영상)’ 콘텐츠가 대세라고 한다. 필자도 책을 읽어야지 하고 책상 한구석에 책을 쌓아두고는 핸드폰의 숏폼 콘텐츠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착잡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짧은 길이의 콘텐츠에 우리가 익숙해진다면, 20~30분이 우습게 넘어가는 클래식 작품을 제대로 감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때문이다. 짧은 길이의 소네트 시에 열광하던 1670년대 젊은 세대를 걱정하는 드렐랭쿠르와 같은 마음인 것일까.
숏폼 콘텐츠는 단순한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이 대다수지만 종종 복잡한 정보와 뉴스 등의 소식을 이해하기 쉽게 압축해서 편집해 놓은 유용한 영상도 많고, 마음에 잔잔한 감동과 위안을 주는 콘텐츠 또한 다수 있다. 물론 숏폼 콘텐츠와 소네트를 비교하는 게 얼마나 적당한 비유인지는 자신이 서지 않지만, 소네트가 유행하는 가운데서도 19세기에는 1시간 길이의 교향곡도 다수 작곡됐으며 5시간이 넘는 바그너의 오페라에 전 유럽이 열광하지 않았는가. 숏폼 콘텐츠가 도파민 중독을 야기한다는 기사도 다수 있지만, 현재도 또 다른 장르의 콘텐츠 개발을 통해 인간 여가 삶의 즐거움이 좋은 균형을 찾아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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